118화
그렇다면 아천타는 이딜로스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황실과 손을 잡은 것이 되는데…….
나는 숨을 짤막하게 내뱉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천타의 검에 죽지 않는 수인은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 역시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내가 살아 있는 걸 알 리가 없다.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야. 내 상상이 지나친 거야.’
부디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온한 행복이 이대로…….
“아릴.”
부드러운 음성을 타고 넘어온 부름에 나는 시선을 들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마치 내가 가진 혼란을 다 이해한다는 듯 나와 가만히 눈을 맞추다가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가 천천히 내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
“걱정하지 마.”
참 이상했다. 내가 가진 이 불안감은 분명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왜 너는 날 이해하는 것처럼 이렇게…….
나는 잠자코 이딜로스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로 마음을 다스렸다.
이 행복을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옷자락을 간절히 손에 쥐면서.
* * *
“정말로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응. 건강해.”
“정말?”
“지금 당장 업무를 봐도 될 정도로 멀쩡해.”
“안 돼! 오늘은 쉬어. 내일도 쉬고, 여행 다녀올 동안 계속 쉬어. 아, 네가 많이 안 좋으면 여행도 다음으로 미루는 건…….”
“걱정이 너무 과한데. 날 이렇게 살뜰하게도 챙겨 주고, 고양이를 잘 키웠군.”
이딜로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그는 곧 내 머리에 손을 얹더니 내 머리칼을 정성껏 쓰다듬었다. 고양이를 입에 올리더니, 정말로 고양이라도 대하는 손길이었다.
“이제 진정 좀 되었으면 이만 돌아가는 건 어때.”
“싫어! 걱정되어서 안 돼. 내가 눈 돌린 새에 이딜로스가 그 정체 모를 차 때문에 배앓이를 하면 어떡해?”
“그럴 일은 없어.”
나는 이딜로스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도리질했다.
그러니까, 불안하다는 핑계만으로 이딜로스가 이만 자야겠다고 침실로 향하는 걸 기어이 쫓아온 상태로.
위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자야 내일 떠날 채비를 하지. 너도 자러 가.”
“그럼 차라리 같이 자.”
“뭐?”
지난번의 일을 떠올리는 건지 이딜로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찡그려졌다.
그는 나를 똥고집 가득한 세 살배기 애를 보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릴,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건데, 인간들 사이에선 미혼 남녀가 한 침대에서 자는 건 부도덕한 짓이야.”
이딜로스의 말에 나는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사람이 이렇게 꽉 막히다니. 마멜라의 책에서는 남녀가 미혼이어도 잘만 부둥켜안고 자던데?
하긴, 이딜로스는 나랑 입술만 맞대어도 종종 야단이긴 했지.
나는 김이 샌 코웃음을 아무렇게나 내뱉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그게 문제야? 그럼 이딜로스가 나랑 결혼해.”
“뭐, 뭐라고?”
“나랑 약혼한 사이잖아. 그렇게 만든 건 너면서.”
이딜로스는 잠시간 말문이 막힌 듯하더니 한참 만에 꾸역꾸역 말했다.
“……그건 눈속임이잖아.”
“날 가지고 논 거였어? 너무해.”
“너 대체 마멜라가 보던 로맨스 소설에서 뭘 배운 거야?”
“흥.”
“애초에 결혼은 정략혼이 아닌 이상, 서로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사람끼리……!”
이딜로스가 갑작스레 말을 멈췄다. 나 또한 그의 말에 잠시간 머리가 멍해졌다.
이딜로스는 잘못된 말을 내뱉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차츰 다물더니 곧이어 나를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봤다.
그러곤 내 어깨를 밀어내며 재차 말했다.
“돌아가서 네 방에서 자. 난 정말 아무런 이상도 없어. 피곤한 것만 빼면.”
너무나 멍해진 나머지 그의 손길에 쉽사리 밀려난 나는 어째선지 상처받은 눈을 하는 그를 바라봤다.
잠시 머뭇대다가 말했다.
“……알았어, 이만 갈게. 내일 봐.”
그의 앞에서 걸음을 돌려 방을 나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순간 이딜로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로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사람끼리…….’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내게 이딜로스와 나는 당연히 그런 사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이딜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이딜로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건가?
하지만, 입맞춤 같은 건 연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내가 이딜로스랑 가벼운 뽀뽀를 했던 것도 아니고.
가만 생각해 보면 최근 들어 내가 입술을 들이미는 걸 이딜로스가 모두 질색하며 내치긴 했는데.
‘몰라, 모르겠어……. 인간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거지?’
그러잖아도 혼란스러운 머리가 이딜로스의 감정까지 생각하자니 터질 것처럼 복잡해졌다.
그뿐이라면 다행이련만, 속까지 울렁거려 안에 든 걸 모조리 게워 내고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조리 쏟아 내고서도 아천타에 대한 불길함과 이딜로스에 관한 불안감은 토하지 못하고 그대로 박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딜로스가 내 반려가 아니면 어떡하지…….’
그런 건 단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 * *
“아릴, 나야. 준비는 잘 되어 가?”
이른 아침, 노크와 함께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에 펼쳐 둔 짐 가방을 바라보다가 가방을 닫고는, 망설임 끝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인 이딜로스는 평소와 다름없는 낯이었다.
“잘 잤어?”
그 물음조차 너무나 여상한 투여서, 나 역시 어제의 복잡함은 미뤄 두고 평소처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응. 이딜로스는?”
“나도 잘 잤어. 누가 괴롭히질 않아서.”
게슴츠레 눈을 뜨며 하는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의미로 문에서 살짝 비켜서자 이딜로스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내가 정리해 둔 짐 가방 앞에서 멈춰 섰다.
이딜로스가 내 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나가 싸 준 짐에서 내가 은근슬쩍 몇 가지 물건을 바꿔치기하거나 끼워 넣은 두툼한 짐 가방이었다.
이딜로스는 가방을 보다가 묘한 눈길로 다시 나를 쳐다봤다.
“……왜?”
“혼자 준비했어?”
“아, 요나가 준비해 준 거에 내가 거들…… 자, 잠깐만!”
그의 질문에 의아해하며 대답하는데, 갑자기 이딜로스가 내 가방을 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옆으로 한달음에 갔다.
내 가방 안을 막무가내로 들여다본 이딜로스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무슨 짐이…….”
이딜로스가 한숨 같은 헛웃음을 흘리자, 나는 흘끔 시선을 내려 온갖 잡동사니를 담고 있는 가방을 바라봤다.
막상 짐을 챙기려니 평상시엔 쓰지도 않던 게 다 필요해질 것 같아 이것저것 챙긴 참이었다.
일전에 고양이로 그와 황궁에 갔을 때 보았던 이딜로스의 짐에 비해 찔리는 구석이 많자, 나는 이딜로스에게 소리쳤다.
“다 필요한 거야! 숙녀의 가방을 이렇게 함부로 열면 어떡해!”
그 말에 이딜로스는 픽 웃기만 했다. 비웃는 듯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나는 씩씩거렸다.
불현듯 이딜로스가 내 짐에 손을 뻗어 제일 위에 있던 쥐 모양 끈끈이 인형을 집어 들었다.
“숙녀의 가방에 이런 흉측한 게 있는데?”
“그건…….”
그 쥐 인형은 깨물면 빛도 나고, 소리도 나서 유치한 나머지 요즘엔 잘 가지고 놀지도 않는 거였지만, 왠지 두고 가기엔 갑자기 생각날 것 같아 챙긴 거였다.
내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딜로스가 자못 한심한 눈으로 날 보더니 쥐 인형을 밖으로 빼 버렸다.
그러곤 거침없이 그 밑에 있던 것으로 손을 뻗었다.
“아펠리아 양, 이건 빼셔야죠. 대체 이런 건 왜 챙긴 거지?”
이딜로스의 못마땅한 시선이 강아지 모양의 장난감에 닿았다.
그건 강아지의 입을 벌려 여러 개의 이빨을 하나하나 누르며 꽝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 강아지가 입을 확 다물어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신통방통한 장난감이었다.
이딜로스는 그 장난감도 옆으로 홱 치워 버렸다.
그 후로도 이딜로스는 친히 내 짐을 뒤적거려가며 내가 숨겨 둔 장난감과 쿠키, 사탕들을 쏙쏙 빼서 짐에서 걸러냈다.
그러면서 흐트러진 옷가지들은 각 잡히게 차곡차곡 개어 요나가 정리해 둔 것보다 깔끔하게 짐 가방에 넣어 뒀다.
이딜로스의 검수가 한차례 끝난 가방은 이전의 뚱뚱한 모양새에서 정상적인 크기를 되찾은 깔끔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딜로스의 폭풍 같은 행동에 입을 벌리고 있다가 억울하게 입술을 사리물었다.
“다 필요한 건데…….”
“가자.”
내 중얼거림을 무시한 이딜로스가 짐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나는 분한 눈으로 먼저 나서는 이딜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따라 나갔다.
마차는 일찍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딜로스는 이미 짐을 실은 상태인 건지, 내 짐을 시종에게 건네주기만 하고서 마차 문을 열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런 이딜로스를 잠시간 올려다보다가 손을 잡았다.
‘이딜로스가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을 리는 없어. 나랑 이딜로스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야, 분명!’
마차에 오를 생각 없이, 결연함을 눌러 넣은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나는 퍼뜩 정신 차리고서 손을 움직였다.
겹쳐져 있던 손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단단히 깍지를 꼈다.
나는 그 상태로 마차에 발을 들였고, 얼떨결에 이딜로스마저 내 손에 끌려 함께 마차에 오르게 되었다.
자리에 앉고서야 손을 놓아줬더니 이딜로스가 이상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에스코트하려다 끌려 들어오긴 처음이네. 내가 에스코트 받은 건가?”
“응.”
“영광이네.”
준비를 마친 건지 마부가 와서 알리자, 이딜로스는 출발하라 명했다.
나는 조금 전 마주 잡았던 손의 온기를 떠올리며 맞은편에 앉은 이딜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리는 듯했지만, 최근 내가 봐 온 그의 평상시 표정이 저랬기 때문에, 지금 나와 손을 잡아서 미소를 띠는 건지, 아니면 그냥 평소와 같은 기분으로 저러고 있는 건지 애매했다.
“아릴. 바다가 보이는 별장에 머물렀다가 돌아올 때 배를 탈 거야, 괜찮아?”
마차가 움직이고, 창밖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할 무렵에 이딜로스가 말했다.
이딜로스와 둘이서 떠나는 여행에 기대를 부풀리고 있던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바다’라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응, 괜찮아. 너무 좋아!”
“배를 타 보는 것도 처음이겠네.”
“응응! 여태 책으로만 봤어. 기대 돼.”
양 뺨을 상기시킨 채로 들떠 말하자 이딜로스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아, 저 표정은 이딜로스가 고양이인 나를 귀여워할 때나 짓던 표정인데.
일부러 좀 더 눈가를 접으며 환하게 웃자 이딜로스의 입꼬리가 일순 굳는 듯하더니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고개를 돌린 그의 옆모습으로부터 이상하게도 붉어진 귓가가 보였다.
‘귀가 왜 저렇게 빨갛지? 설마 그 차 때문에 열이 나는 건가?’
이딜로스는 원체 아픈 걸 곧잘 숨기던 인간이 아니던가.
나는 움직이는 마차라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벌떡 일어서 이딜로스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내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듯한 이딜로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아릴, 위험하게…….”
“이딜로스, 아파? 귀가 빨개. 설마 어제 그 차 때문에 열나는 거야?”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이딜로스가 말을 멈췄다.
좀 더 확실하게 열을 재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려던 때였다.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이딜로스에게 몸을 기울이며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는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다급히 허리를 잡아채는 손길과 함께, 더운 숨결이 훅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