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딜로스의 별빛 눈동자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온화한 색의 눈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휘었다.
“잘 지냈어?”
“응……. 네가 보고 싶었던 것만 빼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딜로스는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듯이 감싸고서 끌어안았다. 그의 손길이 나를 놓치지 않을 것처럼 굳세게 느껴졌다.
“다녀왔어.”
잔잔하던 그의 심장이 바람을 품은 해일처럼 점차 세차게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이딜로스의 말이며 행동에 유독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그 역시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딜로스의 손길에 따라 잠자코 눈을 감고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어흠, 흠! 아릴 님, 저도 있습니다.”
“어서 와.”
“……그게 끝인 겁니까? 왜 저는 보고 싶었다고 해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딱히 안 보고 싶었으니까?”
나는 뚱하게 대답하곤 이딜로스에게 애교 부리듯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었다.
그의 표정이 사르륵 녹더니 곧 나를 품에서 놓아주곤 손을 잡고 이끌었다.
“가자.”
“응.”
“오랜만이니 차라도 들자. 준비하고 다시 나올게.”
“응, 너무 좋아.”
이딜로스의 손을 꽉 잡은 채로 걸었다.
뒤편에서 안셀이 진저리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막상 흘긋 돌아보니 우리를 뒤따르며 안도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아가씨, 어떤 차로 준비해 드릴까요?”
“피로를 풀어 주는 레피치오 차로. 공작님 것도.”
“어머, 레피치오 차는 찻잎이 떨어졌던 것 같은데……. 한번 확인하고 올게요!”
온실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내게 베로니가 고개를 숙이더니 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이딜로스를 기다리며 들뜬 기분으로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이딜로스의 얼굴 한 번 봤다고 이렇게나 기분이 변하는구나.
역시 이딜로스는 내게 특별해.
존재만으로 기분을 붕 뜨게 만드는 상대. 이딜로스는 그런 존재이기에 아마, 아니 틀림없이 그가 나의 반려일 것이다.
“아릴.”
한창 실실거리고 있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따스한 봄바람을 실은 듯한 온화한 저음에 한차례 가슴이 찡하게 간질거렸다.
곧바로 돌아보자 시선이 마주친 그가 가볍게 웃음 짓고는 맞은편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 일련의 움직임에, 그에게서 포근한 비누 향이 몰씬 풍겨 왔다. 돌아가자마자 목욕한 것일까.
다분히 일상적인 면에서조차 이딜로스와 관련이 되니 이상하게도 두근거렸다.
“내일 여행 갈 채비를 하고 떠나면 되겠어.”
“막 출장 다녀왔잖아. 좀 더 쉬지 않아도 되겠어?”
“나한텐 너랑 보내는 시간이 휴식이야.”
이딜로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이런 거침없는 말은 내가 고양이일 때나 해 주던 건데…….
이딜로스는 수줍은 기색 한번 없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매를 올려 더 웃기만 했다.
머리가 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딜로스가 가짜인 건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그게 아니라면, 출장에 가 있을 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나?
워낙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 내가 껴안거나 입을 맞추는 것과 같은 애정 표현만 해도 물러나곤 했으면서…….
이런 적은 없는데, 이딜로스의 말에 내가 괜히 부끄러워져서 나는 서둘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 없는 동안 할 게 너무 없어서 피아노 연습도 하고 책도 읽고, 글씨 쓰는 연습도 했어.”
“잘했어. 피아노랑 글씨는 실력이 많이 늘었겠네.”
“당연하지. 요나가 내 피아노 실력이 유명 음악가 못지않댔어. 이따가 들려줄게! 아, 그리고 글씨는……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멜라보다는 잘 써, 이제.”
이딜로스는 웃음을 가볍게 터트리더니 우리 집 고양이는 못 하는 게 없다며 나를 한껏 띄워 줬다. 나는 양껏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나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책은 어떤 걸 읽었어?”
“아, 마멜라 방에 있는 로맨스…….”
불현듯 그가 그런 부류의 소설을 싫어했던 것이 떠올라 말을 멈췄다.
그러나 이미 ‘로맨스 소설’이란 글자의 절반 이상을 말해서일까, 이딜로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미 거의 다 말한 마당에 발뺌할 수도 없어 나는 어색하게 웃음 짓기만 했다.
이딜로스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속으로 무척 망설이고 있는 듯한 눈으로 입을 달싹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직접 물으려던 때, 뒤편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소리에 반응해 뒤돌아본 나는 표정을 굳혔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가주님.”
정중히 인사한 넬라가 화초 무늬가 새겨진 화려한 트롤리를 끌고 다가왔다.
‘왜 또 넬라인 거지?’
나는 넬라를 티 나지 않게 경계 어린 눈으로 보다가 거짓 웃음을 살며시 띤 채 물었다.
“베로니는? 아까 베로니가 찻잎을 찾으러 간다고 해서.”
“아, 시녀장님이 말씀하시길 급히 저택을 나설 일이 생겼다고 해서 저에게 대신 부탁했어요. 레피치오 차로 준비해 왔으니 걱정 마세요.”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인 나는 넬라를 살폈다. 본능적으로 코가 탐색이라도 하듯 재빠르게 냄새를 맡았다.
‘뭐지? 이상한 냄새…….’
쌉싸름하고 비릿한 향이 코끝을 희미하게 맴돌았다. 넬라에게서 나는 냄새인지, 찻잎의 향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굳은 낯으로 넬라가 찻잔에 차를 따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날아드는 냄새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나는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미미하게 이딜로스의 냄새도 섞여 있잖아.’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딜로스는 보름간 집무실을 비웠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이딜로스와 잠깐 새에 접촉했다고 하기엔 이딜로스에게는 넬라의 냄새가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데.
이딜로스의 집무실을 청소하고 오기라도 한 건가?
‘뭔가 이상해. 아니, 사실 이전부터 계속 수상했어.’
후각을 건드리던 쌉싸름한 냄새는 넬라가 찻잔을 들어 이딜로스의 앞에 내려놓자 서서히 멀어졌다.
찻잎의 냄새였던 걸까. 레피치오 잎은 고소한 향과 씁쓸한 향이 섞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로 이딜로스의 찻잔을 바라봤다.
그러다 넬라가 내 앞에도 레피치오 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그리고, 내 찻잔에서 유독 고소한 향이 풍기고, 멀어지는 넬라의 손이 그 씁쓸한 향을 모조리 가지고 떠나려 했을 때.
동공이며 근육이 팽팽하게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의자를 밀쳐 내고 일어난 나는 거둬 가려는 넬라의 손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잡아챘다.
“꺅! 아, 아가씨?”
“너…….”
겁에 질린 듯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자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다음으로 속에서 화가 끓는 느낌에 웃음기를 흔적도 없이 지웠다.
“저기에 뭘 탄 거지?”
바로 앞에 있는 내 찻잔이 아닌, 맞은편의 이딜로스의 찻잔을 가리키며 음산하게 넬라를 노려봤다.
넬라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떠듬떠듬 말했다.
“네, 네? 레피치오 잎을 우려내기만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왜 이러세요?”
넬라의 손을 점차 세게 쥐자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그러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요량인지, 뻔뻔하게도 이딜로스에게 도움이라도 구하듯 간절한 눈으로 돌아봤다.
차에 무슨 짓을 한 걸로도 모자라…… 내 걸 쳐다봐?
나는 픽 웃음을 터트리며 넬라의 손을 잡아끌어 와 그 손에 코를 묻었다.
스산하게 가라앉은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넬라를 바라봤다. 동공이 섬뜩하게 줄어들었을 것이 분명한, 먹이를 앞둔 맹수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로 천천히. 그러나 숨이 막힐 듯한 압력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타지 않았어?”
“허억…….”
“정말? 그럼 찻잔에다 무슨 짓을 했겠군.”
새파랗게 질린 넬라가 뒷걸음질하다가 힘이 풀린 건지 주저앉으려 했다.
눈치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놓아 버리자 넬라는 뒤로 나자빠졌다.
그런 넬라를 싸늘한 분노가 느껴지는 눈으로 내려다보자 그녀가 질식할 것처럼 숨을 할딱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기류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 있던 이딜로스가 정신을 차리는 듯하더니 온실에 배치되어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붙잡아라.”
그의 신호 한 번에 기사들이 몰려와 넬라를 포위했다.
넬라는 주변의 기사들이 제 양팔을 붙잡아 끌어 올릴 때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과호흡만 이어 갔다.
이딜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넬라의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차에 무슨 짓을 한 거지?”
“허억, 흑……. 모, 몰라요…….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주, 죽을죄를 지었어요!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제발…….”
뭔가에 씐 것처럼 넬라는 헐떡이며 간헐적으로 말을 쏟아 냈다.
그러곤 내 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살려 달라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다가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딜로스 역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재차 물었다.
“누가 시켰나. 아니…… 언제부터 이 짓거리를 벌인 거지? 낱낱이 불어야 할 거다. 성벽에 머리가 걸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한 달하고 보름 전……. 폐, 폐하께서 그분이 내리신 것이라며……. 흑, 저, 저는 정말,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넬라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분? 누굴 말하는 거지?
이딜로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분명 황제일 터다. 황제가 높여 부를 만한 것이…… 누가 있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설마…… 아천타는 아니겠지.’
아니야, 아천타는 내 생사도 모를 텐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내 주변인을 위협했을 리가 없어.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넬라를 바라봤다.
물어야 할까.
아니, 진실을 알기가 두려웠다.
묻는다 한들, 심부름을 하듯 명에 따르기만 했을 이 인간이 그런 것까지 알까.
그사이, 이딜로스가 넬라에게 낮게 읊조렸다.
“다른 이들은 이리 술술 불기 전에 독약을 삼켜 자결하던데, 목숨 한번 귀한가 보군.”
“사, 살려 주세요……!”
“연행해라.”
혼란이 몰아칠 동안, 어느새 넬라는 기사들에게 끌려가고 없었다.
이딜로스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것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릴.”
“이딜로스……!”
파도에서 건져진 것처럼 찰나 숨을 헐떡인 나는 서둘러 이딜로스를 붙잡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 상황에서 아천타는 뒷전이었다.
무려 한 달 하고도 보름 동안 정체도 모르는 걸 차와 함께 삼켰을 이딜로스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괜찮아? 어디 아프진 않아?”
“아무렇지도 않아.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딜로스는 한 걸음 떨어져 있던 다른 시녀가 급히 달려와 넬라가 헛짓거리를 한 차와 찻잔을 들고 가는 것을 바라봤다.
그는 황망하게 제 상태를 살피며 더듬대고 있는 내 뺨을 양손으로 붙잡아 들어 올렸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의 요요한 눈빛과 시선을 마주하고서야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차가 이상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색과 맛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냄새……. 이상한 냄새가 났어. 사실 이전에도, 네 집무실에서 너랑 퍼즐을 맞췄을 때도 이상한 냄새를 맡았었어.”
“냄새? ……어떤?”
“쓰고 비린 냄새. 넌 느끼지 못했어?”
이딜로스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설핏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엇으로 이딜로스에게 해를 끼치려 한 것이기에 인간은 느끼지 못하고 나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불길함이 밀물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만약 아천타가 개입해서 벌인 일이 맞다면…….
아천타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물며, 내가 지내는 곳의 위치와 내 주변인들까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