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형님, 그게 무슨.”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안셀이 당혹감에 꺼낸 말이 이딜로스의 싸늘한 목소리 아래 깔려 사라졌다.
뇌까림 끝에 이딜로스에게서 까득, 치아를 으스러지게 무는 소리가 들렸다.
한때 의지했고 도움을 주었던 은사이기에 믿고 찾아왔다.
그런데 눈앞의 이 사람도 실은 신전에서 아릴을 학대했던 자들과 같은 이들이었던 걸까.
그래서 이리도 쉽게, 매몰차게, 수인을 내쫓으라고 하는 건가?
그들에겐 아릴의 일이 너무나 쉬운 남 일이었다.
당장에 열에 차 터질 것만 같은 이딜로스의 분개한 눈을 보던 데비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수인을 곁에 두면 위험해질 수 있어 이러는 거다. 아니, 위험해질 수밖에 없지. 이대로면 넌 큰 곤혹을 치르게 될 거다.”
데비드가 하는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는 이딜로스는 눈가만 찌푸렸다.
불현듯 데비드가 물었다.
“그 수인과 가까운 사이인 거냐?”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때는 짐승의 ‘짐’ 자만 꺼내어도 기겁했던 녀석이.”
“…….”
“그 아펠리아라는 수인이 네게 그런 존재란 말이지. 아주 지독하게도 엮였군.”
“……이름을 아시는 겁니까? 아니, 그럼 당신의 양딸로 들인 것이 수인이었다는 것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오해 마라. 최근에야 알게 된 거야. 내 귀여운 따님이 어떤 아이인가 싶어 매일같이 기도했더니 신께서 알려 주시더군? 잘도 나를 속였다, 안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데비드의 나무람에 안셀이 시선을 피했다.
데비드는 부쩍 낯이 어두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가 세상과 단절된 시간 동안 데비드는 안셀로부터 이딜로스의 소식을 종종 전해 듣곤 했다.
처음엔 제자에 대한 근심으로 안셀에게 몇 번 물은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굳이 묻지 않아도 안셀이 꾸준히 알려 주기 시작했다. 그 덕에 데비드는 이딜로스에 대해 많은 것을 전해 듣고 있었다.
주로 그의 상태. 그의 불안정하던 심리가 제법 안정적으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요즈음엔 그가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 낱낱이 들은 것이 있기에 데비드는 지금, 제 모든 일을 내려 두고 이곳까지 달려온 이딜로스가 그 수인과 여간 깊은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낭패였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은…….
데비드는 찻잔을 비우고는 탁 내려 두었다. 여전히 고집불통이기만 한 제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그 수인과 신전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다는 건가.”
아직 그에 대한 용건은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딜로스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가를 좁히며 그를 바라봤다.
데비드는 픽 웃었다.
“안 봐도 뻔하지. 그런데 유감이지만 난 지금 알려 줄 수 없다.”
마냥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에 알려 줄 수 없다는 것일 뿐.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인 이딜로스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유가 있습니까?”
데비드는 시선을 내려 오래된 나무 테이블을 바라봤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수심이 그의 눈에 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이윽고, 그의 행색과 다른 낮고도 경건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명을 받았다.”
“예?”
안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딜로스는 보좌관과 달리 입을 굳게 다문 채 제 선생 되는 자를 차분히 살폈다.
하지만, 신명을 받았노라고 말한 그에게는 거짓의 기색이 조금도 묻어나 있지 않았다.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애초에 널 설득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듯하니.”
데비드가 시선을 들어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롱아롱 흔들리는 등불이 그의 얼굴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꼭 예전의 명예를 조금도 잃지 않은 것처럼, 날카롭고 사납게 벼린 시선이 묵직하게 주변 공기를 억눌렀다.
“머지않아 하늘 아래의 역사가 뒤바뀔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천타와 수인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라.”
* * *
짙은 어둠과 추위가 몰아치는 매서운 밤.
에펜도르의 밤은 달이 뜨지 않아 어두웠으나,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별들이 창창했기에 타지보다 유독 밝은 밤이 찾아오기로 유명했다.
이딜로스는 눈으로 뒤덮인 울창한 산맥 속 허름한 나무 집의 마당에서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아래로 쏟아질 것처럼 가득했다.
‘아릴에게 보여 주고 싶은 밤이군.’
밤하늘을 보고 눈을 반짝일 아릴의 천진한 모습을 떠올리자, 어둑한 그의 낯에 찰나 간 미소가 피어났다.
밤하늘을 조금이라도 가져가 아릴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뭐가 그리 기뻐 실실대는 거냐.”
이딜로스가 돌아봤다.
“선생님.”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다니. 여동생 생각이라도 했나 보지.”
“…….”
이딜로스는 말없이 데비드의 꾀죄죄한 꼴을 보다가 다시금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그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되뇌었다.
데비드는 제 눈으로 직접 그 수인을 보고 판단하겠다며 다음에 찾아오겠다고 했다.
아무리 캐물어도 그는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았다.
데비드가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째서 그리 신중을 가하는 것인지 이딜로스는 알 수 없었다.
문득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급한 마음은 알겠다만, 조금만 기다리거라. 나도 일이 있어 당장은 가지 못하지만, 조만간 찾아가마.”
“……그동안 또 노름판을 벌이시려는 건 아닐 거라 믿겠습니다.”
“네가 나를 아주 몹쓸 인간으로 오해하고 있구나. 뭐, 이 꼴을 보자면 그런 오해를 할 만도 하지.”
“…….”
“한 한 달쯤 후에 찾아가면 되겠나?”
“그걸 왜 제게 묻는 겁니까? 선생님의 일로 당장 함께 가지 못하시는 거면서.”
이딜로스가 날 선 목소리를 퉁명스레 툭 내뱉었다.
데비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말본새 좀 보라며 이딜로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 이딜로스가 질색했다.
“내 일은 금방 끝나지. 그런데 안셀에게 듣기론 네가 돌아가자마자 휴양을 떠난다고 하더구나.”
“아, 뭐…….”
“누구랑 가는 거지? 연인?”
“……당신이 얼굴도 모르는 댁의 따님이랑 갑니다.”
“아, 무슨 사이인가 했더니. 수인과 연인 사이였던 거였군? 진즉 말하지 그랬어. 하여간 쑥스러움 많은 자식 같으니.”
데비드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딜로스는 질린 눈길로 그를 째려보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냥 가족입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러나 데비드는 그의 속을 간파하기라도 한 것처럼 입가에 웃음을 연신 피웠다.
그 어떤 설명을 붙여도 그가 제대로 듣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이딜로스가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갑작스레 귀가 터질 듯한 굉음이 울리더니, 천지가 뒤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일어났다.
미처 대비 못 한 이딜로스가 비틀거리자 데비드가 옆에서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땅이 뒤흔들리는데, 데비드는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초연하게 산맥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다.
곧 거친 지진이 멈췄다.
이딜로스는 잠시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그럼에도 아까의 충격에 당혹스러워 쉽사리 말이 나오질 않았다.
“대체 이게…….”
“지각 변동. 온전한 것은 아니고, 곧 일어날 변동의 조짐이다.”
데비드의 태연한 목소리에 이딜로스는 입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의 부인께서는 에펜도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충격의 여파가 끝난 게 아닌지 또 한 번 쿠구궁 하고 땅이 흔들리다 멈췄다.
말을 끝맺지 못한 이딜로스는 연이은 지진에 창백해진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지각 변동. 그에 따른 거센 지진. 연이은 폭설.
온갖 재해가 끊이질 않는 이곳은 인간이 살기에 너무나 가혹한 환경이었다.
“이딜로스. 이 지각 변동의 이유가 뭐일 거라고 생각하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이 신성 제국에서 신앙심도 없는 막돼먹은 녀석이란 건 안다만, 그래도 아천타가 신에게 벌을 받고 쫓겨나 몸을 숨겼다는 신화 정도는 알겠지.”
“압니다.”
“에펜도르가 바로 아천타가 숨어들었던 곳이다.”
어느새 몇 걸음 나아가 푹푹 꺼지는 눈밭 위로 두툼한 발자국을 찍어 내던 데비드가 돌아봤다.
“아천타가 쫓겨난 건 수천 년 전. 그때 아천타는 힘을 모조리 빼앗긴 상태였고, 모자란 힘을 충당하기 위해 이곳에 숨어들어 지대의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지.”
“그럼…… 그 탓에 에펜도르가 천재지변이 끊이질 않는 곳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래. 그리고 난, 그런 아천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거다. 불과 몇 년 전, 아천타의 자취가 에펜도르에서 사라졌거든. 아마 10년 내외로 추정 중이다만.”
“…….”
“내가 왜 네게 수인을 멀리하라 했는지 알겠느냐. 내가 받은 신명과 몇 해 전 사라진 아천타. 공교롭게도 너무 많은 것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야.”
뒷짐을 지고 선 데비드가 돌연 날카로운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발끝이 곱아들 듯한 위압감에 이딜로스의 눈썹이 짧게 경련했다.
“네가 이미 수인과 깊이 엮인 사이라면, 넌 감당해야 할 게 많을 거다. 그걸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다면, 재빨리 털어 버려야 할 것이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감당하겠다고?”
“……지킬 수만 있다면 그리할 겁니다.”
이딜로스를 가늠해 보듯, 데비드의 예리한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이딜로스 역시 그의 꿰뚫어 볼 듯한 뾰족한 눈초리를 결코 피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데비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영웅이 따로 없구나. 내가 대단한 녀석을 제자로 키워 뒀군. 장하다, 장해!”
데비드가 호탕한 칭찬에 뻣뻣하게 굳은 이딜로스의 등을 문으로 떠밀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이만 푹 쉬거라. 안셀 녀석은 진작 곯아떨어졌는데, 조금 전 지진으로 깼는가 모르겠군.”
눈밭에 발이 질질 끌리면서 억지로 나무 문 앞에 도착한 이딜로스가 복잡한 눈으로 돌아보자 데비드가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네 믿음이 확고하기만 하다면, 뭐든 괜찮을 거다.”
“…….”
“신은 늘 방관하지만, 때때로 굽어살피기도 하거든.”
* * *
오늘도 하릴없이 창밖만 내다보며 한숨 지었다. 이딜로스는 언제쯤 돌아올까.
보름간 출장을 다녀온다고 전한 그였다. 이제 내일이면 딱 보름이 되는 날인데, 그보다 일찍 오길 바라는 건 내가 욕심이 지나친 걸까.
“아가씨,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오시겠어요?”
내가 온종일을 창가에만 붙어 바깥을 내다보기만 한 것이 걱정되었는지 베로니가 말했다.
그녀의 배려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로니가 가져온 겉옷을 걸치고, 함께 저택을 나섰다.
가벼운 차림새로 거닐기 시작한 정원은 며칠 전만 해도 쌓여 있던 눈이 햇볕에 녹아 차가운 물기가 반짝거렸다.
새하얗기만 하던 일대는 어느새 파릇파릇한 생명의 빛깔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젖은 화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딜로스를 생각했다.
최근,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마음이 안절부절못했다.
구름이며 햇살, 바람, 공기마저. 이딜로스가 곁에 존재하기에 흘러가는 듯했던 모든 것들이 뚝 멈춘 것 같았다.
‘이딜로스…….’
그때였다. 두 귀가 쫑긋거리며 반응했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내달리는 마차 바퀴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한 걸음 정문을 향해 다가갔다. 느리게 움직이던 걸음에 비해, 마차가 달려오는 속도는 빨랐다.
얼마 안 가 정문에 카델라로트의 인장이 박힌 거대한 마차가 멈춰 섰다.
목 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벅찬 기분이 들었다. 이딜로스다. 이딜로스가 분명했다.
나는 서서히 속도를 높여 걷다가, 마차의 열린 문으로부터 그리운 황금색 머리칼이 보이는 순간 몸을 내던지다시피 달려갔다.
“이딜로스!”
나를 발견한 이딜로스의 눈이 커졌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여는 게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보다 더 꽉 끌어안을 수는 없을 정도로 그를 껴안고서, 보름 동안 너무나 듣고 싶었던 잔잔한 심박 소리를 들으며 이딜로스의 품에 머리를 문질렀다.
저물어 가는 겨울의 물기 어린 서늘한 향이 몰씬 풍겨 왔다.
“보고 싶었어. 너무, 너무.”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던 이딜로스가 곧 내 어깨를 감싸 나를 마주 끌어안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아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