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아릴? 무슨 일이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싸늘한 표정을 감추며 이딜로스를 돌아봤다.
넬라를 향한 이 적개심은 아직까진 직감일 뿐이니 일단 그녀에 대한 의심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 나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이딜로스!”
나는 이딜로스의 앞으로 총총 달려가 그의 책상을 짚고 눈을 반짝였다.
“우리 오늘 바다 보러 가자! 아, 네가 피곤하면 내일 가도 돼. 기다릴 수 있어!”
잔뜩 들뜬 표정으로 나는 그의 앞에서 종알대기 시작했다. 바다의 푸르고 맑은 전경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갈매기, 그리고 간간이 파도와 함께 몰아치는 시원한 물줄기와 바람 같은, 책 속에서 보았던 것들.
“아릴, 미안한데…….”
“응?”
한창 꿈결 속에 있던 내게 이딜로스가 곤란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당장은 못 가.”
“응? 아, 바다에 갈 준비도 해야 하지, 참. 너무 시일이 빨라서 그런 거면 모레 갈까?”
그러자 이딜로스는 꼭 골머리를 앓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간 말이 없더니 막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적어도 한 달은 지나서 가야 할 것 같아.”
“뭐? 왜……?”
“황제 폐하께서 루다비토 왕국과 마르젠로트에 접점이 생긴 걸 아신 모양이야. 갑자기 사업에 참견하기 시작해서 골치 아파졌어. 그러니 폐하의 간섭을 피할 때까지만…….”
한순간 나도 모르게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나 보다. 이딜로스가 말을 뚝 멈추더니 미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미안해. 들떴을 텐데. 그래도 그땐 꼭 가자. 지금은 날도 추우니 바닷바람도 많이 찰 거야.”
나를 달래기 위한 이딜로스의 말에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응. 괜찮아. 한 달 후면 봄이겠네. 그때는 경치도 더 예쁘겠다.”
“……괜찮아?”
“당연하지. 그럼 이제부터 또…….”
“응?”
또 바빠져? 나 자주 못 만나 줘?
그런 어리광 같은 말을 무심코 내뱉으려다 멈췄다. 이미 한 차례 이딜로스 앞에서 울음까지 터트려 놓고서.
계속 만나 달라 곁에 있게 해 달라 징징대면 이딜로스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한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나를 불렀다.
“아릴. 언제든 찾아와도 돼. 놀아 주지는 못하겠지만, 계속 옆에 있어도 돼.”
“……정말?”
“여긴 네 구역이잖아.”
그가 책상 위 보금자리를 눈짓하며 하는 말에 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여긴 내 구역이지, 참.
“응. 그럼 나 내치면 안 돼. 오늘은 이딜로스도 피곤할 테니까 괴롭히지 않고 그냥 갈게.”
“여태 날 괴롭혔다는 건 아네.”
나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손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기분이 우울해졌지만, 이딜로스가 나처럼 한가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쉬운 만큼이나 이딜로스의 냄새가 멀어지는 것이 싫어서, 그의 집무실에서 나와서도 한참이나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별장의 소나기
서걱서걱. 한창 움직이던 펜이 마침내 종이에 온점을 찍는 것을 끝으로,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놓였다.
눈가를 문지르며 긴 한숨을 내쉰 이딜로스가 찡한 마비가 찾아온 손을 털었다.
확인을 마친 서류 더미들을 쌓아 뒤뚱뒤뚱 들고 오던 안셀도 ‘쿵!’ 소리가 나게 이딜로스의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고는 트인 숨을 내쉬었다.
안셀이 활짝 핀 얼굴로 소리쳤다.
“드디어 해방입니다!”
“고생했구나, 안셀.”
“하하, 저보단 전하께서 고생하셨지요. 갑자기 급증한 거래처와 폭등한 물량을 이렇게 빨리 맞추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간 카델라로트의 사업처라면 진저리를 치시던 폐하께서 갑자기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도 의아합니다만……. 뭐, 드디어 전하의 사업력을 알아주신 게 아니겠습니까?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오늘은 일찍 퇴근해도 좋아.”
“그게 정말입니까? 전하께서 그런 말도 다 하시다니……. 23년을 살았지만 이렇게 감동적이기도 처음입니다. 아, 그런데 아릴 님은…….”
“잠들었어.”
이딜로스는 제 자리 옆에 마련된 자그만 간이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묻고 있는 아릴을 바라봤다.
눈꽃 송이가 내려앉아도 위화감이 없을 듯이 길게 드리운 달빛 색의 속눈썹이 맑은 눈동자를 죄다 감추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누가 낚아채 가도 모를 정도로 평온히 잠들어 있는 아릴을 보다가 픽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아릴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작은 단위의 손길 하나하나에도 두터운 애정이 묻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셀은 잠시 얼떨떨한 낯을 하다가도, 곧 따뜻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아릴과 함께 있을 때면 이딜로스는 파장 한번 일지 않는 물결처럼 평온해 보인다.
늘 위태롭게 쫓기는 것 같기만 하던 사람이…… 아릴과 함께 있기만 하면 온 세상의 햇살과 행복을 녹여 낸 것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며 그들을 지켜보던 안셀이 말을 꺼냈다.
“들었습니다. 이 일이 끝나시면 아릴 님과 휴양을 다녀오신다고요.”
“응.”
“이참에 전하께서도 가서 푹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릴 님께 감시하라 부탁할 터이니 일거리를 들고 갈 생각일랑 마십시오.”
“……내 휴식에 대한 네 집착도 정말 대단하군. 알겠으니 걱정 마.”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럼 내일 당장 떠나실 수 있도록 채비를 하라 이를까요?”
안셀의 물음에 이딜로스는 잠시 생각에 잠겨 시선을 내리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아니. 당장은 먼저 들를 곳이 있다. 아릴과의 여행은 그 이후야.”
“예? 아릴 님보다 중요한 것입니까?”
“아릴과 관련이 있어 중요한 것이지.”
이딜로스는 아릴의 부드러운 우윳빛 뺨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그녀의 눈썹이 해이하게 풀어지더니 아릴이 이딜로스의 손등에 뺨을 기대고 살며시 문질렀다.
이딜로스는 피식 웃었다. 고양이일 때나 사람일 때나 하는 행동은 같았다.
그런 아릴을 향해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하며, 그가 안셀에게 말했다.
“내일 선생님께 갈 거다. 너도 채비를 도와 동행하도록.”
* * *
처음 이딜로스가 아릴에게 말한 기간은 한 달이었다.
그러나 이딜로스는 안셀과 함께 눈코 뜰 사이 없이 일한 끝에 업무를 단 보름 만에 끝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실로 경탄할 속도였으나, 집무만 해도 몇 달 분씩 당겨서 보는 그들의 입장에선 실은 별것도 아니었다.
이딜로스는 그 한 달 중에서 남은 기간 동안은 아릴에게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안셀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공작저가 있는 카델라로트령의 라벨라르에서 출발한 마차는 보름이라는 기한 안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빠르게 내달렸다.
라벨라르는 남부. 마차가 향하는 목적지는 북부의 끄트머리였다.
그곳에 이딜로스의 은사이자 안셀의 큰형님인 데비드 로제트의 거처가 있다.
“저도 형님을 직접 뵙게 되는 건 무척 오랜만입니다.”
“그분이야 뭐 잘 지내리란 것은 훤한 사실이니.”
“하긴 그렇지요. 그나저나 아릴 님이 많이 기운 없어 보이시던데요.”
출장을 간다는 말에 시무룩하게 변한 아릴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딜로스의 낯이 조금 어둑해졌다.
실은 이딜로스도 보름씩이나 아릴을 못 보게 된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출발한 지 몇 시간이 안 된 지금도 벌써부터 아릴이 보고 싶은데…….
이딜로스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가시지 그러셨습니까?”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데려가겠어.”
“설마 그곳에서 알게 될 것들을 아릴 님께 숨기실 겁니까? 아릴 님의 일이지 않습니까.”
“……아릴이 상처받는다면.”
이딜로스는 눈썹을 아래로 허물어트린 아릴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다시금 중얼거렸다.
“그런다면 나는 말하지 않을 거다.”
달리던 마차가 갑작스레 멈춘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후였다.
줄곧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이딜로스가 어느 순간부터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갑작스레 창틀을 붙잡고 상체를 무너트린 것이 이유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바람을 좀 쐬니 괜찮아졌다.”
“갑자기 멀미를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여태 마차 멀미라고는 없던 사람이……. 어디 다른 곳은 불편한 데가 없습니까?”
안셀은 이딜로스를 염려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이렇게 묻기는 했지만, 실은 이딜로스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리란 걸 잘 알았다.
이딜로스는 본래 남들에게 제 상태와 감정 같은 걸 꽁꽁 감추는 이 아니던가.
그런데…….
“머리가 아파.”
이딜로스의 순순한 대답에 안셀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정말로 많이 아파서 평상시라면 혼자 끙끙 앓을 제 증상을 털어놓는 걸까.
아니, 혼자 과로를 참아 내다가 속이 곪아 종종 쓰러지기까지 하는 것이 이딜로스였다. 그런데 대체 무슨 변화가 생겼기에.
줄곧 아릴이 제 상태를 눈치채고 회복시켜 주었던 탓에 최근에 들어서는 그도 아릴의 속을 썩이지 않기 위해 제 상태를 숨기지 않기 시작했으며, 그게 이제는 습관으로 굳어 버렸다는 걸 알 리가 없는 안셀은 마냥 의아한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만 쉬었으니 되었다. 괜찮아졌으니 다시 출발하도록 하지.”
“조금 더 가면 솔레드로트가 있을 겁니다. 일단 그곳에서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다가…….”
“아니. 갈 길이 머니 어서 출발해야 해.”
이딜로스는 고집스레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눈빛에서 어떻게든 아릴을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가 보여 안셀은 차마 말리기도 뭐 했다.
안셀 역시 이딜로스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시무룩해진 아릴의 얼굴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이딜로스를 뜯어말려 봤자 그가 듣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잘리고 싶나’라는 소리만 해 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숙식을 해결할 때가 아니면 세우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마차는 닷새 만에 북부의 에펜도르에 도착했다.
그 긴 여정 동안 이딜로스는 괜찮았느냐, 그러한 물음만 떠올리면 안셀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싶었다.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그가 앓았다 한다면 그건 과장된 사실이지만, 이딜로스가 힘없이 마차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던 것은 종종 있던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안셀은 안절부절못하며 마차를 세우려다 이딜로스에게 제지당하기 일쑤였다.
안셀은 바깥 공기를 쐬어 낯이 조금 상쾌해진 이딜로스를 침잠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렇게 전하를 모시다간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지.”
“아닙니다. 어서 가시지요. 한시가 바쁘다지 않았습니까? 약속 시간에 늦어 데비드 형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안셀은 이딜로스의 등을 떠밀며 종아리까지 오는 눈밭을 거닐었다.
에펜도르는 매년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지방이었다.
그렇기에 쌓인 눈의 두께도 갈수록 높아져 마차가 움직이기 힘들기에 적당한 지점부터는 직접 걸어가야 했다.
형님께서는 참 혹독한 곳에서 사신다며 홀로 생각하던 안셀은 문득 이딜로스의 표정이 묘한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을 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선생님께서는 딱히 우릴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 테니…….”
안셀은 그의 말을 어리둥절하게 듣다가 별안간 낯을 굳혔다.
안셀이 걸음을 멈추자 그에게 등이 떠밀리던 이딜로스도 멈춰 설 수 있었다.
안셀은 길었던 마차의 여정을 떠올리며 설마설마하다가 물었다.
“설마 이리 찾아가는 것에 허락을 구하지 않으신 건…… 아니겠지요?”
이딜로스가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통보는 했다.”
그 소심한 말을 들은 안셀은 일순 속이 부글부글 끓어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통보라니? 그게 다라니!
에펜도르는 혹독한 환경과 매년 불가해하게 뒤바뀌는 지형 탓에 현지인을 대동하지 않으면 타지에서 온 이들은 길을 잃고 난민이 되기 십상이었다.
미스터리 한 지각 변동에 흥미를 가지고 탐험을 떠난 이들이 궂은 폭설에 시달려 현지인으로부터 동사한 채 발견되는 일이 이곳에서는 잡초를 뽑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이 무도한 인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안셀은 함께 죽자는 거나 다름없는 이딜로스의 무모한 행동에 눈물을 머금고 형님의 이름을 부르짖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대신, 이 원수 같은 인간의 등을 떠밀며 음산하게 뇌까렸다.
“이 망할 자식……. 내가 여기서 살아 돌아가면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말 거다.”
지금은 일단, 밤이 찾아오기 전에 데비드를 발견하든, 뭐든. 지낼 만한 곳을 찾아보는 것이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