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잘 관리된 그랜드 피아노를 두고 연회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 시선이 모인 곳에는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아릴은 태연하게 건반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건 겉보기일 뿐, 실은 진땀이 나 심장이 쿵쾅 뛰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피아노를 내려다봤다.
‘난 겸손을 위해서 실력이 부족하다고 한 게 아닌데…….’
정말로 피아노 건반 하나 손가락에 닿은 적이 없어 그리 말한 건데, 어째선지 구경꾼들 사이에서는 아릴이 굉장한 연주 실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소리가 돌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보는 아릴의 외양이 한몫한 거였다. 꼭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것만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평생 고상한 것들만 배우고 건드렸을 것만 같은 청초한 느낌을 줬다.
그러나 정작 아릴의 속은 불난 집을 진압하는 것처럼 긴박하기만 했다.
아릴은 저들의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지 고민했다.
‘어쩌지…… 내가 우스운 꼴을 보이면 이딜로스에게도 피해가 갈 텐데.’
그러나 베르제나에게 어울려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계속 피하며 꼬리를 뺐다간 어떤 딴지를 걸며 아무런 잘못 없는 마멜라를 괴롭히려 들지 몰랐다.
아릴은 숨 막히는 시선을 느끼며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야, 음악의 역사를 저술한 책에서 봤잖아.’
할 수 있어. 도레미파솔라시도 정도는 알잖아.
그래, 분명 아는데……. 문제는 활자로 읽은 건 소리로 치환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피아노의 반복되는 흰건반과 검은건반을 잠시 집중해서 본 아릴은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아 울상을 지었다.
무수한 건반들 중에서 도대체 뭐부터 눌러야 하는 건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대체 뭐가 ‘도’고 뭐가 ‘레’인 거지?’
이딜로스가 제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을지…… 아릴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부담감 속에서 손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한가운데의 것을 골라 손가락을 내렸다.
서늘한 겉면이 손끝에 닿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건반을 막 눌렀을 때였다.
생각보다 크고 낮게 울리는 소리에 놀라기도 잠시, 주변이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갑자기 왜들 저러지? 내가 너무 어설픈 티를 냈나……?’
불안감을 느끼던 그녀는 이윽고 저들이 웅성대는 이유를 알아냈다.
소란을 뚫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온갖 향이 어우러진 난잡함 속에서 카델라로트의 정원에서 막 꺾은 듯한 시원한 꽃 내음이 서서히 끼쳐 왔다.
아릴이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등 뒤로 온기가 와 닿았다. 등으로 약간의 무게가 전해졌을 때, 큰 손이 그녀의 오른손을 덮었다.
“천천히 해도 돼.”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낮은 음성 한번에 아릴은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걸 느꼈다.
뒤편에서 느껴지는 향기와 체온에 신경을 기울이던 아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이딜로스가 겹친 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은 도부터 높은 도까지, 그가 아릴의 검지를 지탱하며 건반 하나하나를 눌러 주었다.
기교 같은 거라곤 없는, 아주 기본적인 피아노의 음이 연회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릴은 이딜로스와 겹쳐 잡은 손을 홀린 것처럼 눈으로 좇았다. 주변의 소음 같은 건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피아노가 내는 깊은 울림과 안달이라도 난 듯이 뛰는 심장 소리만이 들릴 뿐.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아릴은 흰건반 검은건반 가릴 것 없이 천천히 음을 익혔다.
주변에서 어떻게 보고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
낮은 웃음소리가 아릴의 귓가에 흘렀다.
“잘하네.”
그 한마디에 아릴의 심장이 눈처럼 녹아내릴 것 같았다. 바다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거센 설렘을 느끼며 아릴은 침을 삼켰다.
“이만하면 충분해. 돌아가자.”
그녀의 등에 몸을 바짝 기울인 이딜로스가 속삭였다.
아릴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딜로스가 의문스럽게 아릴을 내려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
속닥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꽤 자신만만했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도전적인 마음을 말리지 않았다. 잠시 아릴과 눈을 맞추더니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아줄 뿐이었다.
‘이제 음은 모두 알아.’
주변의 구경꾼들은 이미 아릴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아릴은 그저, 지난번 자신에게 글자를 쓰는 법을 차근차근 알려 준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딜로스에게 배운 대로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릴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는 연회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 들었던 연주곡을 떠올렸다.
이딜로스의 도움으로 각각의 건반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알게 되었더니, 그 연주곡의 음정 또한 하나하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딜로스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 이딜로스가 보고 있으니까, 다 괜찮아.’
아릴이 손을 움직여 곡의 시작을 알리는 건반을 지그시 눌렀다. 단번에 음정을 잡아낸 아릴에게 그 뒤는 쉬웠다.
그저 망신을 주려고 이 상황을 달갑게 지켜보고 있던 베르제나는 점차 입이 벌어졌다.
곁에서 아릴을 지켜보고 있던 이딜로스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수인이기에 천부적으로 다재다능한 것일까.
이딜로스는 아릴이 피아노에 난생처음 손을 대었다는 걸 알기에 더욱 믿기지 않았다.
페달조차 밟을 줄 모르는 미숙한 실력으로 연주해 가는 당당한 선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의 웅성거림도 모조리 잡아먹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홀린 것처럼 아릴의 당찬 연주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뒷부분은 듣지 않아서 내 마음대로 연주했는데…… 이대로면 끝이 나지 않겠어.’
계속해서 새롭게 이어지던 연주를 아릴이 적당한 곳에서 끊었다.
아릴은 홀가분한 숨을 내뱉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고 있던 아릴은 뒤늦게 주변이 너무나 적막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 설마 큰 실수라도 한 건가?’
모두가 생전 처음 듣는 연주 방식에 넋을 놓았다는 걸 알 리가 없는 아릴은 겁먹은 눈으로 이딜로스를 돌아봤다.
아릴과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이딜로스는 정신이 들었다.
그는 사고를 치고 안절부절못하는 고양이처럼 구는 아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릴은 불안에 떤 만큼 냉큼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딜로스는 아릴을 데리고 베르제나에게로 다가갔다.
그 누구보다도 연주에 빠져들어 있던 베르제나는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황후는 눈앞에 선 아릴을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이 입장할 때 연회 홀을 울리던 연주곡은 예술을 사랑하는 베르제나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실력으로 연주했으니 음악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어째선지 그녀의 연주는 그것대로 곡을 재구성한 것처럼 새로운 느낌을 선사했다.
믿기지 않게도, 베르제나는 아릴이 연주한 쪽이 원곡보다 더 좋다고 느꼈다. 과연 제대로 기교를 갖추고 연주한다면 얼마나 황홀하고 기가 막히는 연주곡이 될지, 정말 무서운 재능이었다.
“……썩 나쁘진 않았구나.”
베르제나는 겨우겨우 입을 뗐다. 황후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적지근하게 시작한 박수는 곧 우레처럼 크게 쏟아졌다.
아릴은 깜짝 놀라 이딜로스에게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제 약혼녀가 무리한 모양입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이딜로스가 아릴을 이끌었다. 박수갈채 속에 주변의 기묘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그중 몇몇은 아릴의 아름다운 외양과 연주 실력에 경탄해 홀린 듯 따라가는 시선이었고, 또 다른 몇몇은 카델라로트 공작이 레이디를 다정히 이끄는 모습을 경악스레 쳐다보는 시선이었다.
아릴은 일대를 소심하게 째려봤다.
‘왜 다들 이딜로스를 쳐다보는 거야. 이딜로스는 내 건데…….’
아무래도 이 인간은 고양이의 눈에만 잘생긴 게 아닌, 여느 인간들 눈에도 잘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시선이 몰리지…….
아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연회장의 끄트머리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칠흑색의 긴 머리칼, 심도 있는 녹색 눈, 화려한 색채의 연회장과는 대비되는 흰 차림새…….
‘아슐란?’
그러나 잠깐 새에 인파에 휩쓸려 인영이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한창 주변의 시선에 목이 바싹 타는 것 같을 때였다. 마침 눈치 좋은 웨이터가 아릴에게 음료를 권했다.
아릴은 탄산 가득한 음료를 한입에 털어 마시며 이딜로스를 따라갔다.
“아릴, 네가 아까 갑자기 피아노를 연주하겠다 해서 내가 얼마나…….”
작게 소곤거리며 뒤를 돌아본 이딜로스는 아릴의 손에 들린 좁고 길쭉한 잔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딜로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를 곧잘 따라가던 아릴은 몇 초간 비틀거리다 바로 섰다.
“너…… 이거 네가 마셨어?”
“뭐를?”
아릴이 해사하게 고개를 갸웃하자 이딜로스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그가 음료 잔을 들고 있던 아릴의 손목을 다급히 잡았다.
“이거.”
“아, 이거! 응! 맛있는데, 이딜이한테도 줄까?”
이딜로스의 입이 아연히 벌어졌다.
취했다. 아릴은 지금 저걸 마시고 취한 게 분명했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양 뺨이며, 쓸데없이 헤실헤실 웃어 대는 것 하며……. 거기다 제멋대로 이름을 줄여 부르기까지.
‘대체 뭘 마신 거야? 냄새로는 술인 건 분명한데.’
신경이 예민한 만큼 후각도 예민한 이딜로스가 아릴의 손에 들린 잔을 바라봤다.
아릴은 그러한 이딜로스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제 손에 들린 잔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여기 있네. 다시 안 가지러 가도 되겠다. 이딜이 마셔! 내가 손수 가지고 왔어.”
“…….”
“왜 안 마셔? 그럼 내가 마신다? 나중에 달라고 귀엽게 굴어도 안 줄 거야.”
“허…….”
아릴이 이딜로스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내더니 빈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잔을 기울이더니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자 미간을 찡그렸다.
“으응? 없네. 너 언제 마신 거야?”
아릴이 이딜로스를 치사한 작자로 여기며 노려봤다.
말문이 막힌 이딜로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둘러 아릴을 끌고 근처 테라스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한시름 놓은 이딜로스가 아릴을 돌아보았다. 어슬렁어슬렁 끌려오던 아릴은 입을 비죽 내밀고 이딜로스를 째려보고 있었다.
“너 못됐어. 귀엽게 굴지 말랬다고 멋대로 훔쳐 먹다니.”
이딜로스는 기가 찼다.
원래 술이 약한 체질인 건지, 아니면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 건지.
아릴은 눈을 앙칼지게 치켜떴다. 그러곤 풀 하나 꺾지 못할 것 같은 무해한 얼굴로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이딜이는 성격이 나빠. 예쁜데 성격이 나빠. 그래서 귀여워…….”
이딜로스는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아릴은 그냥 취한 게 아닌 듯했다. 만취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