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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09화 (99/191)

109화

이딜로스는 한순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누가 잡아먹히는 걸 겁내는 줄 아나. 고작해야 한 뼘보다 조금 큰 고양이인 주제에.

아릴이 고양이일 때 하품하는 것에도 여전히 종종 놀라곤 하는 사람답지 않게 속으로 불만을 토로한 그가 붙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놀 거리는 있고?”

“어, 놀아 줄 거야?”

“지금 놀아 줘야 네가 내 방에 오지 않을 거라면서.”

얼굴이 환해진 아릴이 신난다며 아래에서 이딜로스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딜로스가 놀라 소스라쳤다.

“아릴, 너 어디에 기대는 거야……!”

“아, 이딜로스 냄새 진짜 너무 좋다…….”

갑자기 아래에서 끌어안는 걸로도 모자라서, 냄새까지 킁킁 맡아 대는 탓에 이딜로스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역시 그냥 어울려 주지 않는 게 답이었나 보다.

쫓아오지 않겠다고 한 것도, 처음부터 그가 문을 열어 주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는데. 아릴에게 휘말리기만 하면 왜 늘 사고가 퇴화해 버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제발 떨어져.”

“난 이게 좋아. 생각해 보니 나한텐 이게 노는 거 같아.”

“……자꾸 이러면 또 때릴 거니까 그만 떨어져.”

“때려도 돼.”

아릴이 그의 허리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는 아까의 명랑함은 온데간데없이 우울한 기색만이 가득했다.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데, 지금.

이딜로스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밀어내려는 찰나였다. 아릴이 먼저 볼멘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네가 나 때려도 되니까 난 이대로 있을 거야.”

“아릴, 그렇게 고집부려 봤자…….”

“넌 진짜 너무해! 내가 너한테 붙어 있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왜 자꾸 밀어내는 거야?”

아릴은 순간 눈물을 팽 터트려 버렸다. 그 모습에 이딜로스는 사고가 멈춰 굳었다.

그녀 역시 이렇게 울음을 터트릴 생각은 없었는지 입술을 꽉 물며 울먹임을 참았다.

어쩌다 혼자 마멜라의 방에서 그 수두룩한 로맨스 소설들을 정독하기에 이르렀을까.

왜 이렇게 이딜로스와의 오랜만의 접촉이 반갑고 기쁜 걸까.

그건 다 이딜로스가 그녀를 만나 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가 어울려 주지 않는 시간 동안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내가 널 찾아갈 때마다 넌 계속 날 내쳤잖아. 바빠도 조금은 같이 있어 줄 수 있는 거잖아.”

“…….”

“난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잘 놀 수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따질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 이건 잘못됐어. 너 역시 날 그렇게 생각하니까 날 혼자 둔 거잖아.”

“아릴, 난 그런 게 아니라…….”

“고양이인 나도 외로움 타고, 혼자 있는 게 무서워. 하는 것 없이 가만히 엎드려서 낮잠 자는 걸 좋아해도 옆에 아무도 없으면 불안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아릴의 눈에서 왈칵 치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건 내가 사람이어도 마찬가지야. 마멜라도 없는데, 너마저 떨어져 있으면 난 외롭단 말이야…….”

아릴의 울음 섞인 말에 이딜로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늘 천진하고 해맑기만 한 아릴에게 이러한 불만이 터져 나올 줄은 몰랐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릴을 더는 신경 써 줘야 할 반려동물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취급했기에 여태 그러한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뿐.

만약 아릴이 수인이 아닌 평범한 고양이였다면, 지금쯤 외로움에 굶주려 병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어쩌면 인간이어도 마찬가지일까.

“……아릴.”

아릴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딜로스는 막막한 심정에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아릴의 눈가를 문질러 닦아 주었다.

“미안해.”

“…….”

그의 눈에서 엿보이는 불안감과 가라앉은 사과에 아릴은 붙잡고 있던 그의 허리를 놓쳤다.

찰나 의심이 들었다.

요즘 들어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는 이딜로스인데, 그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소설에 나오던 인간들의 모습처럼 그 마음이 식어 버린 건 아닐까, 하고.

역시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존재였다. 숭배하고 좋아해야 할 대상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열렬히 좋아했던 것에는 금세 싫증을 내고 만다.

실망감이 들려던 때, 아릴이 힘없이 떨어트린 팔이 이딜로스의 손에 다시금 잡혔다.

“안아 줄게.”

“안아 줘……? 정말?”

아릴의 눈이 커졌다.

이딜로스는 대답 대신 아릴을 당겼다. 순순히 끌려와 제 무릎 위에 앉게 된 아릴을 그가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와아.”

기쁜 환호를 내뱉은 아릴이 잠시 머뭇거리다 이딜로스의 목을 감싸 안았다.

아릴은 이딜로스의 정돈된 머리칼을 손으로 만지작대다가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이제 좀 만족스러워?”

“응, 좋아…….”

그녀가 이딜로스에게 제 머리를 비비적댔다. 사람의 모습이나,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이딜로스는 요동치는 마음을 삼키며 아릴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겨 주었다.

‘내 감정 하나 때문에 아릴이 외로움을 탈 줄은…….’

이건 어쩌면 버릇이었다.

제 감정과 신념 하나 지키겠다고 상대방을 방치시키는 건 마멜라에게도 한 적이 있지 않던가. 고질병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릴에게 곁에 있으면서 좋은 기억만 만들라고 한 주제에, 외로움을 심어 주어서 어쩌자는 건지.

그것도 고작해야 감정 하나 때문에.

평범했던 사이에 돌멩이를 던져 넣어 모나게 만든 것은 바로 이딜로스의 그 감정이었다.

잘못된 것은 자신인데 왜 아릴이 피해받아야 하는 걸까.

“이딜로스?”

“…….”

“왜 그래?”

허리를 끌어안는 손에 점차 힘이 실리는 걸 느낀 아릴이 의아하게 물었다.

이딜로스는 한참 만에 불규칙한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응?”

어쩌면 아릴에게서 평생 얻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이 무모한 감정 따위는 하루빨리 털어 버리는 것이 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하고 다짐하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이건.

그러기엔 안고 있는 그녀를 이대로 영영 떨어트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 마음이 너무 거대하기만 한데.

“이딜로스.”

갑작스러운 부름에 이딜로스가 아릴을 바라봤다.

“우리 바다 보러 언제 가?”

“바다?”

“응. 지난번에 그 퍼즐 맞췄을 때. 내 소원.”

“……정말 둘이서 가자고?”

“응. 데이트하자.”

순진한 웃음을 머금은 아릴의 말에 이딜로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데이트라니. 이 고양이가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알아 온 걸까. 그 뜻도 모르고 책에서 주워들은 말을 그냥 내뱉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찌푸려지는 그의 미간을 본 아릴은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둘이 가서 더 재미있을 것 같아.”

“너한테 재미없는 게 뭐겠어.”

“그런가? 그래서 넌 언제가 좋은데?”

“……연회에 다녀온 후 정도가 괜찮을 것 같은데.”

“난 언제든 좋아. 네가 원하는 때이기만 하면.”

아릴이 생글거렸다. 그러다 이딜로스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직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곤 그의 눈을 가만히 마주 봤다.

길고도 촘촘하게 드리운 그의 속눈썹은 꼭 그 속에 별빛을 감춘 정교한 별자리 같았다.

“있잖아, 이딜로스…….”

아릴이 뭔가를 바라듯 속눈썹을 팔랑이며 이딜로스의 코끝에 제 코를 톡 맞부딪혔다.

이딜로스는 또다시 무력하게 심장이 방망이질 당한 것 같았다.

눈앞에서 속삭이는 사랑스러운 목소리 다음으로 이어진 위태로운 뜀박질에 그의 정신이 혼미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인내심을 자꾸만 시험하려 드는 것인지.

이딜로스는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아 아릴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탓에 아릴은 그의 어깨에 코를 세게 박았다.

“아야…….”

이딜로스는 아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했다.

“안아 주는 건 이만하면 되었겠지.”

그러곤 아릴을 떨어트렸다. 코를 살짝 매만지는 아릴의 눈에 실망이 가득 어리는 것이 보였다.

이딜로스는 그걸 알아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넌 모르겠지. 네가 보내는 그 사랑스러운 눈빛과 애정을 갈구하는 행동이 내겐 얼마나 괴로운지.’

그는 용케 아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참아 냈다.

아릴이 벌이는 무자각 유혹을 견뎌 낸 것은 실로 대견했다.

그 충동을 이겨 낸 것에 비하면, 무지막지하게 뛰고 있는 제 심장 소리를 무시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계속 아릴에 대한 마음과 충동을 억누르면 언젠가는…… 이 감정도 홀로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흐릿한 희망으로 이딜로스는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 * *

은빛의 자수가 새겨진 푸른색 튤 드레스에, 머리칼은 반으로 올려 묶어 다이아 핀으로 장식한 아릴이 거울을 바라봤다.

‘이딜로스가 보면 좋아해 줄까?’

치장을 돕던 호텔의 직원들은 다들 아릴에게 아름답다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아릴은 그들의 칭찬에 힘입어 내심 기대 중이었다. 이딜로스는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제 모습에 반해 넋이 나가 주면 만족스러울 것 같은데.

“아가씨,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마침 기다리던 이가 노크와 함께 찾아왔다. 아릴은 얼굴을 활짝 피곤 그를 돌아봤다.

그러나, 아릴은 기대와 다르게 자신이 먼저 넋이 나가고 말았다.

평소보다 배는 근사하게 차려입은 이딜로스가 다가왔다. 아릴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잘 빠진 흰 연미복에, 그와 어울리는 푸른 타이, 그리고 머리를 반듯하게 정돈해 올려 유독 멋있어 보이는 그의 수려한 인상이 아릴에게 강렬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딜로스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릴을 마주 보다가 다른 이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아침부터 정신없었겠네. 잘 잤어?”

“……응.”

어째선지 아릴은 그의 눈을 피했다. 이딜로스는 그녀의 반응에 의아해하다가도 손을 들어 부드럽게 물결쳐 내리는 아릴의 머리칼을 만졌다.

로비드가 공들여 디자인한 의상 덕일까. 아니면 그녀의 단장을 도운 이들의 솜씨가 좋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일까.

수줍음을 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심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깜빡이는 긴 속눈썹이. 앙다문 새침한 붉은 입술이.

오늘따라 무척…….

“예쁘네.”

짧게 눈썹을 움찔한 아릴이 시선을 들었다. 차분한 표정 위로 티가 날 듯 말 듯한 은은한 미소를 걸친 얼굴이 보였다.

“……정말?”

“응.”

이딜로스가 사람 모습인 그녀에게 이렇게 직설적인 칭찬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아릴의 마음이 한껏 어수선해졌다.

아릴은 오늘따라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그를 마주 올려다보다가 해사하게 웃었다.

“너도 예뻐. 햇살 같아.”

이딜로스는 살포시 웃음 짓곤 아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왼손 줘 봐.”

“응?”

고개를 갸웃한 아릴이 습관적으로 그의 손바닥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손을 살짝 붙잡고는 반대 손으로 재킷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뒤이어 그의 손에 쥐어져 나온 것은 지난 연회에서 눈속임으로 사용했던 반지였다.

아릴의 손으로 반지를 가져가던 이딜로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변명처럼 말했다.

“우린 약혼한 사이니까.”

“응.”

이딜로스의 묘한 반응에 아릴 역시 기분이 오묘해졌다.

이딜로스가 그녀의 약지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딜로스는 목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설레면서도 쓸쓸한 심정에 기분이 추락했다 날아오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듯했다.

내 이런 마음을,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보답을 바라는 구차한 마음이니 알아봐 주지 않는 것이 더 좋을까.

이딜로스는 제 손과 마찬가지로 아릴의 손에 가지런히 자리하게 된 반지를 엄지로 쓸어 만지고는 살며시 웃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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