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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08화 (98/191)

108화

바로 앞에 강아지처럼 반짝이고 있는 한 쌍의 녹색 눈이 있었다.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아릴은 그를 경계하며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이딜로스 역시 뜻밖의 인물에 낭패스러운 듯 눈가를 좁혔다.

“로비드…… 네가 여기 있는 이유가 뭐지? 내가 성가시게 찾아오지 말라지 않았던가.”

마르젠로트의 수석 디자이너, 로비드 멜저튼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제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마르젠로트에서 저만 빼고 모두가 본 전하의 약혼녀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꽁꽁 감추시니 제가 직접 뵈러 와야지 않겠습니까? 역시 제 예상보다도 더 아리따운 분이셨군요. 전 정말 깜짝 놀랐지 뭡니까.”

“……그래서 내 명을 어겼다? 네 호기심 때문에?”

“제가 전하를 존경하는 건 맞지만, 전하의 하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하십니다.”

“하인은 아니지. 부하지. 그러니 잘라야겠군.”

“예……? 아니요, 아니요! 잠시만요.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낯이 파리해진 로비드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이딜로스는 아릴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려다 말았다.

“뭐지.”

또다시 심기를 거슬리는 말을 한다면 정말로 자르기라도 할 기세의 눈빛이었다.

로비드는 이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카델라로트 공작에게 팔짱을 끼고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 여자가 경탄스러웠다.

믿기지 않는 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훌륭한 것인지, 대체 어떻게 이 성격 나쁜 공작의 마음을 함락시킨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원래 드레스는 치수를 정확히 재고 제작해야 하는 법입니다. 한데 전하께서는 안셀 님을 통해 약혼녀분의 치수만 달랑 적은 종이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심지어 눈으로 대충 쟀다고 들었습니다. 이러니 제가 직접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요!”

로비드의 열변을 들은 아릴은 눈을 게슴츠레 좁히고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로비드의 말에 설득당하기라도 한 건지 이딜로스가 드레스 제작을 대충 맡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뚱한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물었다.

“드레스 제작은 마친 건가?”

“예. 일단은 마쳤습니다만, 제가 약혼녀분의 치수를 정확하게 잰 후에 추가로 수선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릴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로비드는 이래도 자신을 내쫓을 거냐며 이딜로스에게 항의하는 눈빛을 보냈다.

“……알겠다.”

결국 이딜로스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러곤 홀로 성가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로비드는 이름 날린 마르젠로트의 수석 디자이너인 만큼 뭔가를 가꾸어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데 타고난 자였다.

그는 로비드와 인사를 주고받는 아릴의 모습을 바라봤다.

“반갑습니다, 아리따우신 숙녀분. 저는 마르젠로트의 로비드 멜저튼이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저는 아리…… 아니 아펠리아 로제트예요.”

실수를 인지한 아릴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어정쩡한 미소에도 로비드는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이딜로스의 뒷골이 뻐근해지는 광경이었다.

로비드는 아릴을 연회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주리라 호언장담하며 기세 좋게 행동할 것이 분명했다. 그건 이딜로스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제가 만든 드레스를 입어 주신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영광이랄 것까지야. 부끄럽네요.”

아니나 다를까, 로비드는 현란한 말을 술술 내뱉으며 아릴을 찬양해 대기 시작했다.

“분명 로제트 영애와 제 드레스가 만난다면 그곳 연회장에서도 가장 빛나실 것이…….”

로비드는 순간 스미는 한기에 말을 멈췄다.

공작보다 더한 후광을 자랑하는 아릴의 옆에서부터 그 후광을 압살시키는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딜로스가 말없이 로비드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약혼녀분을 칭찬한 것 말고는 없는데…….’

자신이 아릴을 넋 놓고 바라봤다는 것. 그리고 아릴을 더 사랑스럽게 만들고자 했다는 것. 연회장 모두의 이목을 끌려고 했다는 것.

그것들을 죗값이라고 생각할 리가 없는 로비드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뭔지 도무지 알 턱이 없었다.

이딜로스는 어리바리한 로비드의 시야에서 아릴을 당겨 빼내며 말했다.

“이따가 드레스를 가지고 따라오도록.”

로비드와의 대화를 흐지부지하게 마무리 지은 아릴은 아쉽게 뒤를 돌아봤다. 좀 더 찬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원래부터 인간들의 추앙을 받으며 태어나야 할 신격체이기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

“넘어져. 앞에 봐.”

“아, 응.”

들리는 목소리에 아릴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금세 머무를 객실에 다다랐다.

마차에서 맞은 딱밤의 여파인지, 아릴은 굳이 고집을 부려 가며 이딜로스의 방에 들어가겠다고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 덕에 이딜로스는 안심하고 제 객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실은 여러 책을 습득하면서 남녀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던 아릴은 호텔 사용인이 켜 두고 간 벽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었다.

손바닥의 냉기가 따뜻한 열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릴은 벽난로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과거에 신전에 있을 땐 이런 곳이 무서웠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어떤 고통도 서서히 무뎌지기 시작한다는 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두려움이 혼자 닳아 없어졌다기보다 그녀가 밟고 일어섰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까.

‘지금이 과분할 정도로 행복하니까 그런 과거의 흔적이 설 자리도 사라지고 있는 거야.’

이 모든 게 다 그녀를 주워 온 마멜라와 좋은 기억만 만들라던 이딜로스의 덕분이었다.

아릴은 불을 쬐며 방싯방싯 미소를 피워 냈다.

난 정말 좋은 가족을 뒀구나.

그녀 역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일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기만 한다면 아릴은 망설임 없이 다른 모든 것들을 제치고 가족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언제든. 그리고 무슨 일이든. 설령 목숨을 거는 것이더라도.

이건, 그들이 되살려 낸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평소의 반의반의 반만큼만 실력을 낼 테니 제발 진정 좀 하시지요!”

멀리서부터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아릴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간 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곧 가까워진 발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릴은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기도 전에 발소리만으로 한쪽이 이딜로스임을 알아차렸다.

“아펠리아, 나야. 드레스를 가지고 왔어.”

부드러운 목소리 탓일까, 오랜만에 듣는 인간일 적의 이름이 낯선 만큼이나 무척 달게 느껴졌다.

이딜로스의 옆에 로비드도 있을 걸 알았기에 아릴도 아펠리아인 체를 했다.

“들어와도 돼요.”

열린 방문으로 이딜로스가 먼저 들어왔다. 그는 방을 둘러보다가 벽난로 앞에 쪼그리고 있던 아릴을 발견했다.

이딜로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이러고 있어, 추워? 불을 더 지피라고 할까.”

“아니요. 전 괜찮아요, 공작님.”

아릴의 입에서 나온 경칭에 이딜로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나 아릴은 뒤따라 커다란 행거를 질질 끌고 들어오는 로비드의 모습에 한눈이 팔려 알아채지 못했다.

‘또 푸른색이네.’

로비드가 힘차게 끌고 온 드레스를 본 아릴은 조금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딜로스가 푸른색을 좋아한다고 하니 구태여 따질 마음은 없지만, 왜 매번 아릴에게 푸른 계열의 드레스를 입히려 드는 것인지.

정작 아릴은 노란색을 가장 좋아했다. 그게 햇살에 가장 가까운 색이고, 이딜로스와 가장 닮은 색이니까.

이딜로스가 손을 내밀었다. 아릴은 순순히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자, 일단 이리로 와 보시지요.”

줄자를 든 로비드가 넓은 소파 앞으로 아릴을 불렀다. 아릴이 그가 지정한 위치에 서자 로비드는 고심하듯 턱을 매만지더니 말했다.

“치수를 재어야 하니 일단 이 두꺼운 털옷과 드레스를 탈의하셔야겠습니다.”

평소 손님을 대하듯 진지하게 말한 로비드는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제 실수를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이딜로스에게 혹독하게 시달리고 온 로비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물론 여성 종업원과 함께 왔으니 불러 드리겠습니다!”

“치수는 네가 재나?”

“아, 그거야 당연히 제가…… 아니라, 종업원에게 맡겨야지요!”

이딜로스는 로비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막힐 지경이던 로비드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경외란 말이 있긴 하나, 존경과 두려움은 엄연한 별개였다.

‘이 차갑고 무서우신 분을 홀딱 빠지게 해 다정하게 만들다니…….’

다시 생각해도 공작의 약혼녀는 대단한 여성이었다.

로비드의 부름에 찾아온 마르젠로트의 종업원은 아릴을 데리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로비드가 행거를 끌고 무심코 따라 들어서려 했으나, 이딜로스가 주는 무언의 압박에 막혀 결국 행거도 종업원의 손을 타고 들어갔다.

이딜로스는 몸이 근질거린다며 중얼거리는 로비드에게 낮게 경고했다.

“꼼짝 말고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잠시 후, 종업원이 홀로 나와 치수가 적힌 종이를 로비드에게 건넸다.

직접 자로 잰 정확한 치수를 들먹이며 상사에게 소심하게나마 대들고자 했던 로비드는 눈을 의심했다.

‘아니,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하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순간 종업원과 공작이 짜고 자신을 놀리려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이게 정말인 거라면 드레스는 수선할 필요가 없다.

로비드는 질린 기색이 담긴 눈길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눈대중으로 쟀다더니, 이건 뭐, 손으로 한 뼘 한 뼘 정성스레 만져 가며 잰 것이 분명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눈치채게 된 로비드는 굉장히 불쾌해졌다.

대체 평상시에 얼마나 붙어 지내면…….

한편 정말로 눈썰미가 좋아 아릴의 의상 치수를 한 번에 캐치한 것이던 이딜로스가 물었다.

“사이즈가 맞나?”

“네…….”

“다행이군. 이제 용건은 없겠지. 그만 가 봐.”

“잠시만요! 그래도 제가 제작자인데 한번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딜로스가 코웃음 쳤다.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구나.”

“디자이너의 긍지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신 디자이너로군. 한데 넌 바빠 그럴 시간이 없을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다비토의 공주 전하께서 마르젠로트의 의상을 아주 좋게 평가하고 계신다 들었다.”

“…….”

“출장 준비해. 이미 수석 디자이너가 찾아갈 거라 연통을 넣어 뒀으니 무를 수도 없다. 급히 결정한 사안이지만, 네 실력을 타국으로 알릴 기회라 생각해 의논 없이…….”

“허억! 감사합니다, 전하! 제게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시다니! 역시 전하의 성품은 신화 속 자비로운 수인 못지않습니다. 출가해 길거리를 전전하던 저를 불쌍히 여기고 고용해 주셨던 전하의 그 마음은, 제가 꼭 마르젠로트의 이름을 알려 보답하겠습니다! 에스카, 당장 떠날 준비를 하게!”

다시금 매무새를 정돈한 아릴은 두리번대며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아까부터 뭔가 소란스럽더라니, 그 시끄럽던 인간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릴은 남아 있던 종업원까지 나가고 난 후에야 이딜로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까 그 인간은 어디 갔어?”

“쫓아냈어.”

“……그래?”

아릴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딜로스가 부하 직원을 내쫓는 건 흔한 일이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조금 전 드레스 룸에서 얼핏 들려오던 소리로는 그리 매정히 쫓은 것 같지도 않았고.

아릴은 로비드의 수다스러움과 오버를 떠올리곤 말했다.

“로비드라는 인간 안셀을 닮았어.”

“내 주변에는 왜 저런 자들만 있는지 모르겠군.”

이딜로스가 질린 낯으로 중얼거렸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이딜로스는 불현듯 자신을 보며 빙긋 웃는 아릴을 발견했다. 그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급히 들었다. 여기 있다간 아릴이 어떤 무모한 스킨십을 하려 들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릴의 눈치와 행동력은 재빨랐다.

아릴이 이딜로스가 앉아 있던 긴 소파의 옆자리에 엎어지듯 풀썩 누웠다.

흠칫한 이딜로스가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는 이미 한쪽 손이 아릴에게 붙잡힌 후였다.

반대 손으로 턱을 괸 아릴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눈빛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빈틈이 없었다.

“다들 갔으니까 오늘은 나랑 놀아 줘. 놀아 준 지 꽤 됐잖아.”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어. 요새 바빠서.”

아릴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명심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아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지금 놀아 주면 네 방에 쫓아가지 않을게.”

“…….”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으니 말이다.

뒤이어 아릴은 천진하게 웃으며 그의 손등을 살살 간지럽혔다.

“걱정 마. 안 잡아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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