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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03화 (93/191)

103화

이딜로스는 얼마 전, 안셀을 불러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안셀, 너라면 알고 있겠지.”

“무슨 일인진 모르겠으나, 저 같은 유능한 측근은 본래 모르는 일이 없지요.”

안셀이 거들먹대자 이딜로스는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그래, 말 한번 잘했군. 그럼 내가 묻는 족족 진실을 말해야 할 거다.”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혹 제가 아릴 님의 총애를 독차지한 방법을 캐물으실 거라면 죄송하지만 일급 비밀인지라…….”

“선생님.”

“……예?”

“데비드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안셀의 눈이 잠시 커졌다. 그가 제 첫째 형님인 데비드의 소식을 물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러나 곧, 안셀은 곤란함을 만면에 띠며 손을 내저었다.

“죄송하지만, 전하. 형님에 대한 소식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난 들어야겠어.”

“전하, 갑자기 또 왜 이러시는 겁니까. 형님을 더는 찾지 않겠다고 저와 했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안셀의 말을 듣던 이딜로스의 미간에 실금이 생겼다. 이내 그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책상 위, 깍지 낀 손 위로 이마를 기대었다.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그 끝을 마무리 지은 것은 이딜로스의 깊은 한숨이었다.

“나 역시 이러고 싶지 않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이딜로스의 눈에는 어렴풋이 짐작만이 가능한 막연함이 수북이 묻어 있었다.

안셀은 그 눈을 보고서야 지금 이 상황이 몇 년 전, 어리기만 하던 제자가 고집스레 의지할 데를 찾는 어리광뿐인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셀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무슨 일인 겁니까?”

“선생님께서 아릴과 신전에 대해 뭔가를 알고 계신다.”

“예? 그게 무슨……?”

“들은 적이 있어. 선생님께서 갑작스레 교직을 관두시고 성직에 발을 들이셨을 때. 그 무렵 선생님께선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차갑게 식은 황금색 눈동자가 안셀을 맹렬히 노려봤다.

“그곳은 악마에 홀린 끔찍한 곳이라고. 신에 대적하고자 하는 미친 짓을 벌이고 있다고도 했지. 넌 이게 무슨 말일 것 같나?”

그의 말을 곰곰이 듣던 안셀의 동공이 커지더니 곧이어 두려움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셀은 당황을 머금은 숨과 함께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신전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것은…… 아릴 님이시지요……?”

“다시 묻겠다, 안셀.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감당 못 할 마음

“백합 두 다발.”

“예, 가주님.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늘 즐겨 입던 흰옷을 두고, 어쩐 일로 검은 옷을 차려입은 이딜로스가 정원사에게서 흰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평소보다도 멀끔한 차림새.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기까지 한 그의 눈은 유독 가라앉아 있었다.

정원사가 관리하는 거대한 온실에서 두 꽃다발을 들고나올 때, 그는 모퉁이 한 곳에 마련된 긴 거울을 감흥 없는 눈으로 흘겨봤다.

이곳을 들어올 때와 나올 때, 그는 제 차림새에 흐트러짐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원사가 다가와 푸근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변함없이 단정하고 멋있으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분께서도 분명히 좋아하실 겁니다.”

“……그런가.”

이딜로스는 정원사를 돌아보며 미미한 미소를 걸쳤다.

곧 그는 정원사에게 눈인사를 남기곤 온실을 나와 마멜라의 3호 화원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이딜로스!”

차가운 겨울과 대비되는 새의 지저귐 같은 맑은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멈춰 서자 그의 앞으로 발랄한 걸음걸이의 누군가가 달려왔다.

한기가 스며들 틈조차 없게 옷을 겹겹이 껴입고 털모자까지 쓴 아릴이 천연스럽게 웃었다.

“어디 가?”

평소와 사뭇 다른 이딜로스의 차림새를 본 아릴이 갸웃거렸다.

이딜로스는 하다 하다 마주치는 것만으로 술렁이는 마음을 잠재우며 태연하게 말했다.

“부모님께 가고 있어.”

“부모님?”

아릴의 시선이 흰 꽃다발에 닿았다. 한순간 그녀의 눈빛이 숙연해졌다.

이딜로스는 그녀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한쪽 발을 틀어 걸음을 옮길 준비를 마치고 말했다.

“가 볼게. 이따가 보자.”

“이딜로스.”

발을 떼기도 전에 아릴이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 손길에는 힘이 제대로 실려 있지도 않았지만, 지나쳐 가려던 이딜로스의 마음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딜로스는 아릴을 바라봤다. 아릴은 조심스러움이 어린 눈길로 이딜로스를 간절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

“여기서 살기도 하는데, 너희 부모님께 인사를 못 드린 게 조금 걸려서……. 내 바람일 뿐이니까, 안 된다고 해도 돼.”

아릴은 자신이 불편한 말을 한 걸까 봐 이딜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부탁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기에 옷자락을 슬며시 놓았다.

이딜로스는 그런 아릴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걸음을 틀었다.

“가자.”

긍정이 떨어지자마자 아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릴은 종종걸음으로 이딜로스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의 차림새가 든든하게 껴입은 자신에 비해 유독 추워 보이는 것 같았기에 바짝 붙어 팔짱도 껴 주었다.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이 이쪽이구나.’

이딜로스를 따라 걷던 아릴은 이곳이 익숙한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멜라의 3호 화원으로 통하는 길. 가을에 이딜로스와 마주쳐 뱀을 보았던 그 길목이었다.

“이딜로스, 혹시 나랑 뱀을 봤던 그 날도 부모님께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어?”

“그랬었지.”

“자주 찾아가?”

“생각이 날 때마다 찾아가는 편이야. 가까우니까.”

“그렇구나.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다.”

마멜라의 세 번째 화원으로 가는 길을 거닐자 옆으로 작게 난 또 다른 길이 있었다. 이딜로스는 아릴과 함께 그 길목으로 들어갔다.

곧 산과 맞닿은 넓은 언덕이 나타났다.

“조심해. 눈이 쌓여 미끄러우니까.”

“응.”

도착한 언덕의 꼭대기에는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있었다. 언덕 위라 그럴까, 이곳의 겨울바람은 속이 시큰할 정도로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이딜로스와 함께 묘지 앞에 선 아릴은 분명 과거에는 생기를 가지고 있었을 두 사람의 이름을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묘석에 각각 꽃다발을 내려놓곤 말했다.

“저 왔습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도 함께 왔어요. 아마 처음 보실 텐데, 마멜라가 데리고 와 얼마 전부터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된 새로운 식구입니다.”

이딜로스가 아릴을 바라보자, 그녀는 두 묘비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릴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은혜로 이곳에서 신세를 지고 있어요. 배려심 깊은 두 사람을 훌륭하게 키워 주신 두 분의 덕이 클 테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의외로 아릴은 진중한 말을 차분히 내뱉었다. 묘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하늘에 있을 이들을 향한 연민이 아닌 경애를 담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그런 아릴의 모습을 잠자코 옆에서 지켜봤다.

내쉬는 숨결마다 피어나는 흐릿한 입김처럼, 새하얀 눈밭으로부터 반사되어 올라온 빛이 은은하게 그녀를 감싸는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잠시간 홀린 기분이 되어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아릴은 눈을 감고 두 손바닥을 맞대었다. 자그만 신격체 하나가 낯선 인간이 잠든 곳을 향해 기도했다.

“부디 저편에서도 평온하길 바랍니다.”

기도를 마친 아릴은 손을 내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금 해사한 미소를 띤 아릴이 이딜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윤슬의 빛깔을 머금어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본 이딜로스는 그대로 넋을 놓았다.

“이딜로스?”

한참이나 아릴의 모습을 눈에 담고서, 어리둥절한 그녀의 부름을 들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나룻배 위로 마음을 싣고 넘실댄다면 이런 기분일까. 잔잔한 파장이 이는 술렁임에 이딜로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재차 마음을 억누르며 부모님께 마멜라가 기숙사로 떠났으며 곧 입학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릴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석을 바라봤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부모님께 할 말을 모두 마친 그가 묘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릴도 뒤따라 묵례하자, 이딜로스가 돌아보며 말했다.

“날이 추우니 이제 가자.”

“응.”

아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길은 눈이 쌓인 언덕 위의 발자국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길 잃을 걱정이 없어 당당하게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곧잘 가던 아릴의 발이 별안간 미끄러졌다.

“헉……!”

“아릴!”

이딜로스는 앞서가던 아릴이 갑자기 아래로 쑥 미끄러져 버리자 놀라 손을 뻗었다.

가까스로 아릴을 붙잡고 안심하기가 무섭게, 이딜로스의 몸도 덩달아 아래로 기울어졌다. 가까이서 아릴의 기겁한 숨소리가 들렸다.

함께 휩쓸려 미끄러지게 된 이딜로스는 아릴이 다치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감싸 품에 안은 채 언덕 아래까지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윽…….”

마침내 구르는 걸 멈추게 되었을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그의 시야에 하늘이 들어왔다.

이딜로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제 품에 고개를 묻고 있는 아릴을 바라봤다.

“아릴, 괜찮아?”

그러나 아릴은 어째선지 미동이 없었다. 이딜로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에 그가 다급히 아릴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릴. 아릴.”

그때 이딜로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떨고 있는 게 아니라, 아릴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 거였다.

이딜로스가 어깨를 흔들던 손을 멈춘 순간, 고개를 묻고 있던 아릴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릴이 눈이 잔뜩 묻은 머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재밌어!”

“……하, 놀랐잖아.”

아릴은 한순간 철렁했던 이딜로스의 심정도 모른 채 맑은 웃음을 연신 터트렸다. 그는 아릴의 천연스러움에 심기 불편한 한숨을 흘렸다.

이딜로스의 탐탁잖은 표정을 보던 아릴은 그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콕 눌렀다.

“그거 알아? 너 코 빨개졌어.”

“너도 빨개.”

그의 말에 아릴이 방싯 웃었다. 아릴은 두 손을 들어 이딜로스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아릴이 물었다.

“따뜻해?”

“……네 손이 더 차가워.”

이딜로스의 퉁명스러운 말에 아릴은 배시시 입매를 끌어 올렸다.

“맞아, 나보다 네가 더 따뜻해.”

녹을 듯이 달콤한 사랑스러운 웃음은 이딜로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감정이 걷잡을 수 없게 부피를 키워 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릴은 언제나 그렇듯 다가오는 것에 있어 양보가 없었다.

아릴이 이딜로스의 품을 제 보금자리처럼 다시 파고들었다. 그뿐 아니라 고양이가 하듯이 그의 품에 이마를 문질러 대기까지 했다.

이딜로스는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어 아릴을 밀어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러나 시야에 눈이 수북이 묻은 아릴의 머리칼이 들어오는 순간.

그가 들어 올린 손은 원래의 목적을 잃고 제멋대로 새하얀 머리칼에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아릴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 주고 있었다. 아릴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품에 고개를 묻고 있던 아릴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온 건 그때였다.

“너 심장 소리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너무 빨라.”

이딜로스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 심장 소리가 뜻하는 바도 모르고, 아릴은 쿡쿡 웃어 대다가 말했다.

“근데 나도 이상해.”

“……또 뭐가.”

“내가 너보다 더 빠르게 뛰는 것 같아.”

“…….”

“어, 갑자기 네가 나보다…….”

“아릴.”

이딜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까보다 부스스한 머리가 된 아릴이 고개를 들었다.

“응?”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딜로스는 격랑에 못 이겨 입을 달싹였다.

그녀에게 네가 방금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정작 아릴은 입을 맞추는 것의 의미조차 모를 정도로 이러한 감정에 무지할 텐데.

아릴은 복잡한 감정이 어린 이딜로스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곧 아릴이 입꼬리를 올리며 눈밭에 누운 그에게 고개를 내렸다. 겨울 냄새를 머금은 차가운 입술이 쪽 소리가 나게 맞붙었다가 떨어졌다.

아릴은 눈을 접어 웃으며 그에게 이마를 맞대었다.

그러곤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딜로스가 범람할 수 없게 쌓아 둔 댐을 산산이 무너뜨렸다.

“뽀뽀 받고 싶어서 망설인 거지?”

“…….”

“이딜로스는 부끄럼쟁이라서 그런 거 말 못 하잖아.”

다시금 이딜로스의 뺨을 붙잡은 아릴은 그의 눈빛이 점점 침잠해지는 줄도 모르고 조잘거렸다.

“너 뺨이 다 식었어. 내가 열을 다 빼앗아 갔나 봐.”

“…….”

“이딜로스, 우리 감기 걸리기 전에…….”

내뱉고 있던 아릴의 말이 먹혔다. 한순간에 끌려 내려간 아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술이 막혔다. 예고도 없이 맞부딪친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고, 겨울의 한기가 침범할 수조차 없게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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