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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00화 (90/191)

100화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끌어 올렸다. 잠시나마 두려움은 묻어 두고 현실을 바라보게 했다.

내 정체를 그가 알게 되었다는 현실을.

나는 한참 만에 그의 목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겨우 그치게 되었던 울음이 이딜로스를 마주 보는 순간 다시 고여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못 볼 꼴로 일그러졌을 게 분명했다.

꼴사나워 보일 거야.

그저 인간이 아닌 고양이란 이유로 그에게 애정을 받던 시간이 앞으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네가 아픈 것보다 너한테 미움받는 게 더 좋아. 그편이 더 마음이 아프지 않아.

여전히 동요하던 이딜로스가 손을 뻗었다.

“울지 마.”

엉망이 된 얼굴을 이딜로스가 매만졌다. 눈을 감았다 뜬 나는 눈물을 떨구며 그를 바라봤다.

“숨겨서 미안해…….”

“…….”

“네가 날 싫어할까 봐 말할 수 없었어……. 이제 날 싫어하게 될 거지……?”

이딜로스가 눈물을 닦아 주자 그의 손이 닿는 쪽의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일그러진 못난 얼굴을 보며 이딜로스가 한참을 말이 없더니 이내 한숨 같은 미약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해.”

이딜로스의 그 말 한마디에, 무너질 것 같던 마음이 완고한 벽에 감싸여진 것 같았다.

안도감이 들이닥쳤다. 그 감정이 찡그렸던 눈썹을 풀어 주고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러나 눈물은 더 무서운 기세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딜로스는 내가 떨어트리는 닭똥 같은 눈물들을 열심히 닦아 주었다.

“왜 더 울어.”

“기뻐서……. 네가 나를 싫어하지 않아서.”

흐느낌을 달고 내뱉은 말에 이딜로스가 또 한 번 옅은 웃음을 흘렸다. 위태로운 새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뚝.”

“응…….”

눈물을 애써 참으며 코를 훌쩍였다. 불현듯 이딜로스가 피로 얼룩진 새하얀 재킷을 벗더니 드러난 내 어깨 위로 걸쳐 주었다.

“춥겠다.”

“…….”

“왜 늘 이런 차림인가 했는데. 인간이 됐을 때는 어쩔 수 없었나 보군.”

나는 재킷을 여며 주는 이딜로스의 손을 바라봤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이딜로스의 잔잔한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옷이 조금 더러워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우선 마차로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먼저 일어서는 이딜로스를 뒤따라 굽혔던 무릎을 폈지만,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 전의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혹은 추운 눈밭에 오래 꿇어앉아 있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고양이로 오래 있었던 부작용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내게 이딜로스가 손을 건넸다.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마비라도 된 것처럼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갓 태어난 기린 같은 노력을 보다 못한 건지, 이딜로스가 몸을 숙였다. 그의 손이 각각 어깨를 감싸고 무릎 아래를 파고들었다.

“어……!”

이딜로스에게 번쩍 들린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딜로스는 놀라 크게 뜬 내 눈을 보더니, 안심시키듯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가자.”

마차에 다가가자 나를 안아 든다고 두 손을 모두 쓰고 있던 이딜로스가 문을 바라봤다. 눈치껏 알아들은 나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이딜로스는 마차에 올라 나를 내려놓기 전에 인상을 찡그렸다.

“엉망이군. 망할 놈들.”

그리 말할 만도 했다. 나를 인질로 잡았던 인간이 마차의 창을 깨지 않았던가.

이딜로스는 부서진 창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를 훑어보더니 나를 내려놓았다. 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낮추며 말했다.

“마부가 희생당했어. 내가 대신 마차를 몰 테니 넌 여기 있어.”

나는 겁에 질린 눈으로 다급히 이딜로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딜로스를 밖으로 보내는 순간, 가까이서 들리는 이 심장 소리가 멎을까 무서웠다.

“안 돼. 가지 마.”

“내가 가야만 마차를 움직일 수 있어.”

“그럼 나도 갈래. 난 네가 안 보이는 사이에 다치게 될까 봐 무서워…….”

이딜로스는 잘게 떨리는 내 시선을 마주하다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까 내 실력 봤을 텐데. 난 지금 다친 곳 하나 없어. 그 정도는 내게 위협도 되지 않으니 안심해도 돼.”

“그래도…….”

“그리고 네가 이 차림으로 밖을 나갔다간, 내가 다치는 게 아니라 네가 얼어 죽겠어.”

“…….”

“나도 무서워. 네가 다칠까 봐.”

예상치 못한 그의 진중한 말에 나는 짤막하게 숨을 흘렸다. 깨부숴진 차창을 넘어 들어온 한기가 마차 안에서도 옅은 입김을 피어나게 했다.

이딜로스는 놓아 달라는 듯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옷깃을 붙잡은 손에 힘을 서서히 빼며 말했다.

“그럼 잠깐만…….”

조금 전 사투를 벌였음에도 여전히 말끔히 잘생긴 얼굴로 손을 뻗었다. 이딜로스의 뺨에 묻은 피를 걸치고 있던 큰 옷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내가 손을 떼자 이딜로스는 옷소매에 묻어난 핏자국을 보더니 웃음을 흘렸다.

“내 옷을 아주 멋대로 사용하는군.”

“어차피 이미 더러워졌잖아.”

“하긴. 이 정도면 손수건처럼 다시 빨아 쓸 수도 없겠어.”

“……나 네가 버리라고 했던 손수건, 빨아서 방에 놔뒀어.”

“응. 잘했어.”

이딜로스가 부드럽게 웃어 주곤 몸을 일으켰다. 나는 부쩍 높아진 그를 올려다봤다. 이딜로스는 내게 유리 조각을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서 마차 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후,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릴.”

눈가를 찡그리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가 그새 잠들기라도 한 건지 눈앞의 풍경이 마차의 너저분한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크고 넓은 낯선 방 소파에 기대 누워 있었다.

눈만 굴려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자 이딜로스의 얼굴이 보였다. 내 머리맡 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나를 차분한 눈으로 내려보다가 말했다.

“방금 막 들어왔어.”

이딜로스의 눈에는 더 이상 동요의 기색이 없었다.

내가 몸을 일으켜 앉자 그가 부스스해진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미안해, 잠들려던 게 아니었는데. 고양이로 오래 있으면 몸이 조금 안 좋아져서…….”

“그런데 그걸 여태 참고 있었던 거네.”

바보같이.

이딜로스의 잔잔한 목소리를 타고 날아온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 나…….”

“우선 갈아입을 옷부터 가져올게.”

내가 망설이다 뗀 말문을 그가 가로막았다. 소파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그의 모습에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내가 정체를 숨겨서 화난 걸까?’

이딜로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그 역시 옷을 갈아입어 깨끗하고 편안한 차림새였다.

이딜로스는 가져온 옷을 내게 건네곤 드레스 룸을 가리켰다.

“갈아입고 와.”

“응…….”

그가 돌아올 동안 버릇처럼 불안감에 싹을 틔우던 나는 이딜로스의 표정을 한 번 살피곤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이딜로스가 준 옷을 펼쳐 보니 또 푸른 계통의 옷이었다.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다.

연하늘의 가볍고 부드러운 드레스를 째려보던 나는 천천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행히 혼자 입기에도 부담이 없을 정도로 입기가 간편했다.

드레스 룸을 나오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따르던 이딜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딜로스는 내가 드레스 룸에서 소파로 다가가 앉을 때까지, 단 한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누그러진 눈으로 나를 잠자코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잘 어울리네.”

“……난 흰옷을 입고 싶어.”

내게 따끈한 찻잔을 밀어 주던 그가 그건 무슨 투정이냐는 듯이 쳐다봤다.

나는 연하늘색의 드레스를 손에 쥐며 입을 열었다. 기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흰색을 좋아하잖아.”

팔걸이에 턱을 괸 이딜로스는 어째선지 내 심각한 말에 제법 즐거운 눈을 하고 있었다.

“누가 그래?”

“황궁에 갔을 때…… 황후랑 그 기분 나쁜 여자가.”

“기억력도 좋아.”

나는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더니 말했다.

“흰색 좋지. 가장 무난하고 깨끗한 색이잖아.”

“…….”

“그런데 난 푸른색도 좋아해. 넌 푸른색이 잘 어울리고.”

“……정말로?”

“응.”

비록 이딜로스가 빈말로 했을지도 모르는 말일지라도 마음이 한결 풀린 나는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이딜로스는 식기 전에 마시라며 차를 권했다. 마시려고 보니 코코아였다.

뜨거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자 마차에서 얼어붙었던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 나른함과 달콤함에 취해 있던 나는 뒤늦게 이딜로스에게 고할 말이 있던 것이 생각났다.

찻잔을 내렸다. 고개를 들어 이딜로스를 바라보자 이쪽을 쳐다보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숨을 내뱉곤 말문을 열었다.

“이딜로스. 나, 너한테 정체를 숨겨서 미안해……. 내 정체를 말하면 네가 실망하게 될까 봐 무서워서…….”

“사과는 이미 했잖아.”

그의 굳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무지 이딜로스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아래로 살짝 피했다. 그리고 내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인이며, 내가 어쩌다 마멜라에게 주워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기억을 잃었었다는 것과 내 정체를 아는 또 다른 인간들은 누가 있는지와 같은, 여태 내 강박으로 숨겨 왔으나 이제는 그가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내 긴긴 말을 듣던 이딜로스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내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무렵엔 이딜로스는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신전이 미친놈들의 집단이란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딜로스의 험한 말본새에 깜짝 놀랐다. 이딜로스는 여느 인간들과 달리 신앙심도 없고, 수인의 존재도 미신이라고 했던 인간이지만…… 신전을 저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긴 이야기가 이어질 동안 다 식어 버린 찻잔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넌 내가 고양이인 줄 알고 여태 의지했던 것일 텐데, 미안해.”

또 튀어나온 사과에 이딜로스가 한숨을 흘렸다. 그의 입매는 어느새 매서운 미소를 감추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네 말이 틀린 게 없긴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

줄곧 애매하게 피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금 들어 올렸다. 이딜로스는 즐거운 기색도, 화난 기색도 없는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넌 고양이일 당시에 나한테 큰 힘이 되어 주었지. 다만 그건 인간의 모습인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난 네가 고양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어.”

“…….”

이딜로스의 진중한 말에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딜로스도 결국엔, 마멜라처럼 내가 어떤 존재든 상관없던 거였다. 나는 내 가족인 두 사람에게 고양이도, 인간도, 수인도 아닌 그저 아릴이라는 하나의 존재였던 거야.

난 지레 겁먹어서 그러한 사실도 몰랐던 거구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은 벅참에 입술을 꾹 깨물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딜로스가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며 기쁘게 웃었다. 이딜로스의 숨소리가 한순간 멈췄다.

나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이딜로스의 입에 쪽 소리가 선명하게 입을 맞췄다.

“고마워.”

수줍은 목소리와 함께 젖은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보이는 이딜로스의 얼굴은, 어째선지 진심으로 당혹스러워 굳은 낯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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