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능숙하게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걸음을 옮긴 이딜로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날 위해 준비했다며 브러시와 털실 공, 장난감 같은 것들을 꺼내었다. 나는 그런 이딜로스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요나의 말로는 이딜로스가 고양이 용품을 이것저것 챙겼다고 하던데, 정말 잡동사니까지 다 챙겨서 온 거였다.
“손.”
나를 소파에 내려놓고 나와 눈높이를 맞춘 이딜로스가 브러시를 집어 들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 위로 자그만 발바닥을 올렸다.
이딜로스는 잘했다며 내게 칭찬을 연달아 해 주더니 브러시로 털을 빗겨 주기 시작했다. 죽은 털이 퐁퐁 빠져 날리자 조금 걱정되었다.
이딜로스의 옷이 엉망이 될 것 같은데…….
“아펠리아 양도 함께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문득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게 빗질을 해 주고 있으면서, 이딜로스의 눈은 엄한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등에 스치는 그의 손목으로부터 느껴지는 이딜로스의 박동 소리가 유난히 빠른 것이 느껴졌다.
“어제 내가…….”
이딜로스는 평소처럼 내게 혼잣말을 하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벌린 채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음을 자아냈다.
“너와 그 여자가 닮은 구석이 있어서 그런가. 꼭 아펠리아 양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아.”
이딜로스의 말에 나는 온몸을 경직시켰다. 비록 농담조의 가벼운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딜로스의 눈빛만은 예리하게 벼린 황금빛 칼날처럼 느껴져서…….
브러시를 쥔 이딜로스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옮겨 왔다.
“바다 같은 푸른색 눈도, 회색빛 무늬가 스미지 않은 곳의 유독 새하얀 털도.”
“…….”
“나를 유하게 풀어 주는 이상한 힘을 가진 것도……. 너와 아펠리아 양은 너무 닮았어.”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은 나는 등허리를 뻣뻣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뭐지, 설마. 설마…… 내가 아펠리아라는 걸 눈치챈 거야?
불안감을 내비치면 안 될 것 같았기에 나는 일부러 무관심한 척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콩알 같은 심장은 부리나케 뛰며 불안감을 알리고 있었다.
“아릴.”
몸이 붕 떠올랐다. 어느새 브러시를 내려놓은 이딜로스가 나를 안아 들고는 잠자코 바라봤다.
태연한 척해야 했다. 이딜로스는 신앙심이 없어 아마도 수인의 존재라는 것도 믿지 않을 인간이니, 내가 아펠리아라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나는 평소처럼 이딜로스의 손에 고개를 비비적댔다. 그의 손등에 꼬리의 보드라운 털을 살며시 스치며, 부디 그의 생각이 거기서 그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딜로스는 웃음을 피식 내뱉었다.
“털이 말끔해졌네, 아릴.”
“…….”
안도의 숨이 속에서부터 우러나왔다.
이딜로스는 얼굴 가까이 나를 당겨 와 내 머리에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딜로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연이어 내 볼에 입을 몇 번 더 맞추고는 나를 품에 안았다.
“네가 있어서 마음이 편해. 널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울했을 텐데.”
“아옹.”
“난 어쩌면 사랑스러운 것들에 마음이 유독 풀어지는 편인가 보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이딜로스는 내 턱을 긁어 주곤, 소파 위를 굴러다니던 털실 공을 끌어왔다.
“마멜라가 깰 때까지만 놀아 줄게.”
“아옹.”
고양이로 버티는 건 조금 괴로웠지만 마침 할 일이 없었고, 또 잠을 푹 자서 기운이 팔팔하던 나는 순순히 그에게 어울렸다.
그러다 마멜라가 깰 때까지라는 한정이 무색하게 결국 마멜라가 옷까지 다 갖춰 입고 직접 찾아오고서야 이딜로스와의 놀이는 끝이 났다.
이딜로스는 여전히 나보다도 노는 것을 즐거워하고, 내가 놀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인간이었다.
“아릴, 오늘도 힘내.”
출발하기 전, 이딜로스를 의식하던 마멜라가 내게 속삭였다.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그 괴로운 멀미와 배 아픔을 견딜 생각을 하자니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지만……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니 어쩔 수 없었다.
떠날 채비를 마친 우리는 다시금 마차를 타고 수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내달리자 슬슬 치미는 인간화의 조짐에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나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느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성이 생긴 건가? 오늘은 어제보다 더 버틸 만하네.’
마멜라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간간이 내 상태를 살폈다.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어 내가 괜찮다는 걸 알렸다.
한참이 더 걸려서야 마차가 멈췄다. 차창의 풍경에 카델라로트 저택만큼이나 일대가 새하얗게 물든 도심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안은 채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마멜라가 입김을 불어 내며 말했다.
“아릴, 델트로타에 도착했어!”
마멜라는 들뜬 걸음걸이로 재빠르게 걸어가다가 멈췄다. 한발 늦게 내 상태가 나쁠지도 모른다는 걸 상기한 건지 나를 내려다봤다.
마멜라가 눈을 재빠르게 깜빡이더니 눈가를 지그시 찌푸리곤 나를 꼼꼼히 훑어봤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 별로 안 아파.’
어제 하루 동안 내가 한계를 깨 버리기라도 한 건지, 오늘은 정말로 배가 살짝 아픈 것에 그쳤다.
무엇보다 마멜라의 배려로 밥을 먹을 때 사료가 아닌 고기를 먹은 덕도 있고.
내가 괜찮다는 걸 알아본 마멜라의 표정이 다시금 환해졌다. 마멜라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그러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곳을 더 잘 보이게 만들어 줬다.
“아릴, 보여? 저기 있는 건물이 내가 다닐 학교야.”
“마멜라, 넘어지겠어.”
뒤따라온 이딜로스가 흥분한 마멜라를 진정시켰다.
나는 마멜라가 학교라고 소개한 커다랗고 넓은 건물들의 집합체를 바라봤다.
마멜라가 들여다보곤 하던 팸플릿의 그림과 똑같았다. 아니, 그건 흑백 그림이었으니 색채가 우아하게 곁들여진 실제 귀족들의 학교는 더욱 활기 있어 보였다.
마멜라의 품에 안긴 채로 이동하며, 학교 외부를 둘러봤다. 막연히 상상만 했던 모습과는 달리 단정한 듯하면서도 이름에 맞게 엄숙한 호화로움이 느껴졌다.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수도 황궁 연회에서 본 인간들보다 족히 많아 보였다.
나는 마멜라의 품에서 그들 사이를 지나치다가 위화감에 일대를 훑어봤다.
‘……왜 다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지?’
쳐다볼 뿐만 아니라 무리를 지은 몇몇 인간들은 서로 속닥거리기까지 했다. 구태여 알고 싶지 않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카델라로트 공작이잖아.”
“그럼 옆에 있는 애가 이번에 입학한다던 공녀인가 봐.”
“진짜 입학할 줄은 몰랐는데…… 황실이랑 공작가 사이가 나쁘다며?”
“그래도 혈통을 타고났는데 황실도 체면이 있지. 황족을 쩌리 학교에 보낼 순 없잖아. 그리고 황후 폐하는 공작이랑 사이가 좋다고 들었어. 얼마 전에도 직접 공작저에 방문하셨다잖아.”
“귀찮게 됐어. 엄마가 공녀한테 친한 척 좀 해 보라고 하잖아.”
걸어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따라붙는 대화 소리에, 나는 떠드는 인간들을 흉흉하게 노려봐 주었다.
‘마멜라에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면 꿈에 나타나서 홀랑 잡아먹어 버릴 거다!’
상급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 중에는 이딜로스를 흘끔대거나 대놓고 감탄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흉흉하게 노려봐 주었다. 감히 내 걸 3초 이상 쳐다보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간들이었다.
일찍이 이 학교를 졸업한 이딜로스의 소개로 학교를 가볍게 둘러본 우리는 마침내 마멜라가 지낼 기숙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개인 시종도 들이지 못하는 규정 탓에 마멜라는 이딜로스로부터 짐이 든 가방을 건네받았다. 나는 자연스레 마멜라에게서 이딜로스의 품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딜로스는 마멜라의 얼굴을 보다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건강히 잘 지내.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내게 편지를 쓰고.”
“무슨 일 안 생겨도 쓸 거예요. 매일매일 쓸 거니까 귀찮아하시면 안 돼요.”
“내 동생이 보내는 편지가 귀찮을 리가 없지.”
이딜로스는 나를 한 손으로 받쳐 들더니 반대 손으로 마멜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가 마멜라의 머리를 쓰다듬자 마멜라가 웃었다.
“이렇게 만지면 머리가 엉망이 된다니까요! 오라버니가 제 말을 들은 체도 안 하시니까, 제가 하루빨리 오라버니보다 커지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래. 네가 쑥쑥 자랐으면 좋겠구나. 지금은 너무 작아.”
마멜라는 키 얘기에 발끈했다.
이딜로스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곤 마멜라의 머리에서 손을 옮겨 그녀의 어깨를 두 번 토닥였다. 그 행동에 마멜라의 웃던 표정이 잠시간 일렁거렸다. 그새 촉촉이 젖어 든 마멜라의 눈이 미소에 가려지더니 내게 닿았다.
그녀는 내게 근심 섞인 미소를 보냈다.
“아릴. 나 없어도 오라버니랑 요나랑 잘 지내야 해.”
“아옹…….”
“얼른 학교 졸업하고 다시 집으로 갈게. 그때까지 우리 집 잘 지키고 있어.”
마멜라는 내가 저택의 영웅 고양이라는 말을 장난스레 들먹였다. 그녀의 가벼운 말에 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멜라가 손을 뻗어 오자 나는 그녀에게 인사 대신 뺨을 문질렀다.
“그럼 다음에 보자.”
“네, 오라버니.”
마멜라는 다시금 나를 진중히 바라보다가 우리에게 인사하곤 뒤돌았다. 비록 마멜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게 아펠리아로서도 내게 별 탈 없이 잘 지내라고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안녕, 마멜라.’
마멜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간간이 뒤돌아 우리에게 어서 가 보라고 손을 내젓던 마멜라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얗게 물든 일대는 벌써 뉘엿뉘엿 지는 노을의 빛으로 물들어 갔다.
머리 위에서 기운 없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가라앉은 눈을 한 이딜로스의 침울한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발을 뻗어 이딜로스의 뺨을 꾹 눌렀다. 볼이 눌린 이딜로스는 픽 웃음을 흘리곤 내 등을 문지르며 걸음을 돌렸다.
“우리도 집으로 가자. 가는 길에 들를 곳도 있으니 서둘러야겠어.”
그렇게 마멜라가 들어간 건물로부터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 * *
이딜로스의 말대로 마차는 곧장 라벨라르로 돌아가지 않고 수도의 델트로타에서 조금 벗어난 곳으로 내달리다 멈췄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앞의 익숙한 건물을 바라봤다.
……들를 곳이라는 게 여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