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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95화 (85/191)

95화

이딜로스는 부드럽게 맞물려 있던 입술을 머금다가 놓아주며 한기가 느껴지기 전에 다시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스치는 숨결조차 달콤해서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버겁게 뛰는 것을 여자는 알까. 아니, 그녀의 심장도 이렇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버겁게 헐떡이고 있을까.

미친 듯이 고막을 때리고 있는 박동 소리는 이딜로스의 정신을 점차 흐릿하게 만들었다.

맞붙은 여린 입술을 느리게 문지르며 그녀의 숨과 목소리 모든 걸 삼켰다. 그럼에도 아쉬워 조금 더 파고들려 하는데,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눈을 살짝 뜨니 힘들기라도 한 건지 눈썹을 찡그린 채 낑낑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입을 맞추고 있는 상황에, 사랑스러우리만치 애쓰는 모습을 본 이딜로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로부터 넘어온 웃음에 아릴이 속눈썹을 바르르 떨다가 들어 올렸다. 초점조차 맞춰지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잔잔한 시선을 마주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부터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몽롱하게 흩어져 있던 아릴의 정신이 한순간 돌아왔다. 아릴은 놀라 이딜로스를 밀쳤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손길에는 꼼짝도 하지 않다가, 그녀가 손을 물리자 아쉬운 듯 입술을 머금다가 떨어졌다.

가까운 거리에서 열띤 시선이 교차되었다. 이딜로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는 천천히 아릴의 입술을 엄지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아릴은 쿵쿵, 진정되지 않는 소리를 들으며 이딜로스가 손을 거둬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 안 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딜로스는 한 발자국 물러나며 생각했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어떻게 딱 그녀가 밀치고 나서 누군가 찾아왔을까.

이딜로스는 문득 지난번 황궁에서 그녀가 귀가 밝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흐트러진 크라바트를 고쳐 매곤 말했다.

“들어와.”

아릴은 금방이라도 온몸에 힘이 풀릴 것 같은 자신과 달리 어느덧 차분하기만 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나만 이렇게 기분이 좋고, 심장이 뛰고, 어지러웠던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입을 맞출 때 마주쳤던 그의 시선이 생생히 기억났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열감은 분명히 아릴과 맞먹을 정도로 거셌다.

아릴은 입술을 다물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문이 열리고 얼떨떨한 표정의 안셀이 들어왔다. 이딜로스가 들어오라 대답을 해 주다니, 별일이라 생각하며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그러다 자신의 책상에 아릴이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안셀은 이딜로스를 의식하며 좋은 삼촌 연기를 시작했다.

“아펠리아, 네가 여긴…….”

그러나 곧 말끝을 흐렸다.

아릴의 붉어진 눈가며 평소보다 촉촉한 푸른 눈동자에 안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양옆에 쌓여 있는 무시무시한 양의 문서들…….

안셀의 벌어지는 입이 경악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단 몇 초 만에 상황 파악을 끝낸 안셀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이딜로스를 홱 노려봤다.

“전하, 제 조카님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조카님?

그 애매하고 이상한 호칭에 의문이 들기가 무섭게 안셀이 그를 파렴치한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아실 것도 다 아시는 분이 어찌 몸도 마음도 약한 우리 조카님을 괴롭히신단 말입니까?”

안셀은 씩씩대며 이딜로스에게 다가가서는 손에 들린 서류철을 억지로 떠넘겼다. 그러곤 등을 돌려 서둘러 아릴에게 다가갔다.

안셀은 아릴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괴롭힘당하면 얼마나 힘든지 제가 잘 압니다……. 어서 가시지요.”

아릴은 얼떨결에 안셀을 따라가며 이딜로스를 돌아봤다. 가만히 책상에 기대어 아릴을 시선으로만 좇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릴은 눈을 굴리다 그를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짓고는 집무실에서 끌려 나갔다.

쾅, 안셀의 손에 거칠게 닫힌 문소리가 요란했다.

이딜로스는 아릴이 어설픈 미소를 남기고 사라진 문을 바라봤다.

천천히 옮겨 간 시선은 조금 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한 책상에 머물렀다. 보는 것만으로 아까 전, 맞닿았던 입술이 떠올라 귓가가 달아올랐다. 이딜로스는 한숨과 함께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미친 자식.”

분명 그녀가 이 집에 머무는 손님이며 최측근의 조카이고 은사의 따님이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자신은 무슨 짓을 벌인 건가.

한순간 이성이 뚝 끊기기라도 한 것 같은 제 행동에, 머릿속에는 미쳤다는 생각만 반복되었다.

거기다 뒤늦게 떠올리자니 제 충동에 못 이겨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던 건 아닐까 후회도 밀려왔다. 안셀의 말대로 몸이 허약한 여자인데.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있던 자신이 숨도 못 쉬게 몰아붙였던 것은 아닐지.

“하…….”

몸이며 마음이며 모든 것이 녹을 것 같던 촉감을 떠올린 이딜로스는 잠시 침을 삼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은 그녀가 한 것인데, 어째선지 자신이 정말로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안셀을 따라 밖으로 나온 아릴은 줄곧 멍했다. 안셀은 아릴이 이딜로스에게 심한 괴롭힘이라도 당했을까 걱정되었다.

그 인간의 못된 성미를 익히 아는 안셀인데,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대체 어쩌다 악마의 소굴인 집무실을 가시게 된 건지…….

“아릴 님, 대체 전하께서 무슨 몹쓸 짓을 당하셨길래 이리 기운이 없으십니까.”

조금 전의 자극을 겪고서 안셀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릴은 이딜로스가 머물렀다가 간 제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한 번 더 하고 싶어…….’

정신과 혼을 쏙 빼놓는 온기와 감촉에 아릴은 까무룩 기절할 뻔했었다. 그만큼 기분이 좋았던 것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멍하니 흘려보낸 것이 너무 아까웠다.

‘이렇게 좋은 건 줄 알았다면 진즉에 해 보는 건데.’

처음부터 입에다 해 주지, 손에나 해 주던 이딜로스가 조금 치사하게 느껴졌다. 물론 손에 입을 맞추어 줬던 것도 충분한 충격을 주었지만.

“아릴 님, 그럼 조심히…….”

어느새 안셀이 모셔다드린다던 아릴의 방에 다다랐다. 조금 전 입맞춤으로 상념에 푹 젖은 아릴은 안셀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오도카니 남은 안셀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아릴, 괜찮아?”

나는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말없이 웃음을 흘렸다.

밤잠을 설쳤다. 자려고 눈만 감으면 그 일이 생각나 도무지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자꾸만 이상한 감정을 들게 하는 간질거림이 밤새 가슴을 괴롭혔던 것은 덤이었다.

생각할수록 두근거려서, 이딜로스가 너무 좋아서,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간질거려서……. 그 모든 원인이 잠을 방해했다.

나는 잠을 깨우기 위해 마시던 따끈한 홍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못 보겠네. 난 이대로 너랑 떨어지기 싫은데…….”

“그래도 가끔 집에 찾아올 거야. 내가 떠나기 전에 네가 사람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다행이야.”

쓸쓸한 마음에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마멜라가 곁에 없다니, 벌써부터 허전한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음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 마멜라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종종 편지할게.”

“응……. 받자마자 답신할게.”

외출복으로 차려입어 평소보다 화사한 마멜라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없이도 잘 지내.”

“마멜라도 낯선 곳에 가서 씩씩하게 잘 지내야 해.”

이별하기 전 포옹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 곳이 텅 빈 것 같아 울컥 눈물이 나오려 했다.

수도의 학교까지 가는 것에 당연하게도 이딜로스는 동행하지만, 나는 마멜라와 상의 후에 가지 않기로 했다. 고양이와 사람의 모습 둘 중 어느 것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따라간다 한들 갑자기 모습이 변하면 곤란했다.

마멜라는 조금 붉어진 눈가로 품에서 떨어졌다. 그녀 역시 막상 포옹하니 이별이 실감 나는 모양이었다.

눈시울을 적신 마멜라를 보자 나도 시야가 흐려졌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눈물을 참아 내고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별은 웃음을 나누며 기분 좋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다는 무언의 확신이었다.

“이만 가 볼게.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쉬어.”

“응. 안녕.”

마멜라가 문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난데없이 바깥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급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마멜라가 문을 잡아 여는 순간, 바깥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마멜라가 움칠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가씨, 아릴 님!”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요나였다. 답지 않게 다급해 보이던 요나는 숨을 몰아쉬더니 마멜라의 방문을 닫고는 말했다.

“큰일이에요! 가주님이 그게, 아릴 님을 데려오라고……!”

“무슨 말이야? 사람인 아펠리아랑 고양이인 아릴이 중에 누구를?”

“고양이 아릴 님을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두고 가기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불안해서 데려가야겠다고 하셨어요!”

마멜라와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로를 바라봤다. 사람의 몸도 아니고, 하필 고양이인 나를?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지?

마멜라는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아릴이는 고양이로 오래 못 있잖아. 자고 있어서 데려갈 수 없다고 할까?”

“저도 고양이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조심히 안아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데려가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으신 것 같았어요. 제가 갔을 땐 모래와 간식, 사료 같은 것들도 이미 챙겨 두셨던걸요…….”

“아릴…….”

마멜라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떠나보내면 이딜로스도 며칠간 보지 못할 테고, 마멜라와도 한참이 지나야 만날 수 있을 거다.

나도 마멜라와 벌써부터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고양이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다가 힘을 뺐다. 멍하니 보고 있던 찻잔에서 시선을 들었다. 잠깐 새에 마음이 치우치는 쪽으로 결심이 내려졌다.

“갈게.”

“가겠다고? 하지만 아릴이 넌…….”

마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가며 말했다.

“나 고양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어. 버티면 돼. 이딜로스랑 같이 있을 때 이미 해 본 적 있어. 사실 배는 조금 아프지만…….”

“뭐? 아릴이 네가 아픈 건 싫어.”

“난 너랑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이대로 헤어지긴 싫어. 네가 학교에 잘 도착해서 손까지 흔들어 주는 걸 봐야 미련이 덜할 것 같아.”

마멜라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지는 듯하더니 그녀가 곧 미소를 띠었다.

“……알았어. 그럼 같이 가자. 수도랑 이곳 라벨라르는 거리가 머니까 아마 호텔에서 머무르면서 갈 거야.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돼.”

“응.”

나는 짧은 심호흡 끝에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멜라가 나를 품에 안고, 요나가 열어 주는 문을 통해 나갔다.

‘견딜 수 있어. 참으면 돼.’

세뇌하듯 나를 다독였다. 그 무모한 도전이 어떤 참사를 불러올 것인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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