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94화 (84/191)

94화

아릴의 목욕과 몸단장이 끝나자 넬라는 돌아갔다. 그제야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던 아릴은 소파에 몸이 푹 파묻힐 정도로 기대 누워 입학할 학교의 팸플릿을 보고 있던 마멜라에게로 다가갔다.

“끝났나 보네. 더 뽀송해진 것 같아, 아릴!”

팸플릿을 홱 내린 마멜라가 옆에 앉은 아릴의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인간 모습일 때는 변한 게 없는데, 마멜라가 신나서 그렇게 느끼는 거야.”

아릴은 일주일 전부터 온종일 학교에 대해서만 떠들어 댄 마멜라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마멜라는 배시시 웃으며 아릴을 와락 끌어안았다.

“안 되겠다, 아릴이도 같이 입학할래? 우리 함께 다니자.”

아릴은 마멜라의 장난 반 진심 반이 섞인 말에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마멜라의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기운을 훅 밀어 넣었다.

“오늘은 푹 쉬어. 며칠 동안 기대돼서 잠이 안 온다고 뜬눈으로 보냈잖아.”

“아, 내가 그랬나?”

마멜라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릴은 너무 신난 나머지 다크서클까지 만들어 낸 꼬마 공녀를 잠재우곤 방을 나섰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딜로스를 찾아가 보자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봐 온 게 있어서인지, 아릴은 이딜로스가 불안감을 느낄 때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알았다.

일단 불안감이 신경 쓰이지 않을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그 몰아붙이기 위한 행위로 일을 택한다. 그렇게 밤낮없이 일만 주야장천 해 대는 것으로 그는 불안감을 잠재우곤 했다.

‘최근 들어 이딜로스가 집무실에서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뻔하지 뭐.’

아릴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냥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릴 역시 마멜라의 빈자리가 걱정되었고 불안했기에, 지금 그를 찾아가는 건 함께 우울함을 덜어 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릴은 이딜로스의 집무실 앞에 섰다.

“공작님, 저 아펠리아예요.”

노크하고 기다리자 한참 만에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무슨 일로 왔습니까?”

집무실의 푹신한 카펫을 밟고 서자 이딜로스가 손에 든 서류를 내리며 물었다. 아릴을 바라보는 이딜로스의 표정에 방해되니 어서 용건만 말하고 사라지라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의 기세에 잠시 기가 죽었지만, 아릴은 곧 당당하게 말을 내뱉었다.

“제가 공작님을 도와 드릴 일은 없을까 해서요.”

“없습니다.”

단 몇 초도 망설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곤 할 말이 끝났으면 어서 가 보라는 저 눈빛까지.

과연 함께 힘내서 이겨 보자는 아릴의 마음을 접어 버리고 싶게 만드는 단호함이었다.

아릴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서둘러 말을 더했다.

“그럴 리가요. 늘 일에 쪼들리시잖아요.”

이딜로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남한테 저런 말을 직설적으로 듣는 것은 처음이라 황당했다.

‘함께 있으면 분명 집중이 안 될 텐데.’

그는 시선이며 신경이며 모든 게 아펠리아 로제트에게 쏠릴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다지 그녀를 집무실에 두고 싶지 않았다.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돕겠다 한들, 아펠리아 양이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내가 일하는 걸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사업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정곡을 찌르는 말들에 아릴은 할 말이 없어졌다.

물론 그가 일하는 모습은 고양이일 때 질리도록 봤다지만, 늘 옆에서 낮잠을 자거나 멍을 때릴 뿐이고…… 그의 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건 사실이었다.

이딜로스는 곤혹스러워하는 아릴을 보더니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심심한 거라면 고양이와 공놀이나 해 주시던지요.”

아릴은 이딜로스를 몰래 째려봤다. 내가 공놀이를 뗀 지가 언젠데…….

애초에 아릴은 이딜로스의 중대한 일거리들을 거들어 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려는 것일 뿐.

이미 기가 죽을 대로 죽었지만, 아릴은 고집스레 말했다.

“허드렛일이라도 좋아요. 부디 시켜만 주세요.”

서류철을 넘기던 이딜로스의 한쪽 눈썹이 삐뚤어졌다. 성가시다는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든 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아릴은 그의 입에서 또다시 거절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일이란 게 꼭 어려운 것들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공작님이 하기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을 맡겨 주세요. 전 한가하고, 공작님은 바쁘시니까 같이 한다면 분명 좋을 거예요. 힘들 땐 도와야 하는 거잖아요, 네?”

거침없이 말을 내뱉곤 아릴은 숨을 살짝 몰아쉬었다. 이딜로스가 제 말을 중간에 자르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릴의 두서없는 설득을 듣던 이딜로스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윽고 그는 비록 탐탁잖은 표정이었지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의 눈가가 구겨진 것을 못 본 척한 아릴은 들떠 물었다.

“일 시켜 주실 건가요?”

이딜로스는 대답 대신, 다가온 그녀에게 산을 이룬 수두룩한 종이 더미를 건네었다. 한순간 이게 뭐지 싶은 표정을 지은 아릴에게 그가 말했다.

“필사해 주시면 됩니다. 이 정도면 두 시간이면 끝내겠지요.”

이딜로스의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어서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릴은 당혹감에 말했다.

“이, 이걸 다요……? 거기다 두 시간이라니…….”

“허드렛일을 맡기라 하지 않았습니까? 싫으면 관두시던지.”

……이 인간, 역시 자신을 빨리 돌려보내고 싶어 못살게 구는 게 분명했다.

이딜로스의 표정까지도 어서 눈앞에서 비키라고 말하는 게 보이자 아릴은 오기를 불태웠다.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아릴은 그 종이를 기세등등하게 모조리 받아들였다.

“아니요! 할 수 있어요. 이래 봬도 전 읽는 속도가 무척 빠르거든요. 꼼꼼히 모두 옮겨 적을 테니 맡겨 주세요.”

“그럼 저기서 하시면 됩니다.”

그는 마뜩잖은 얼굴로 비어 있는 안셀의 자리를 가리켰다.

아릴은 이딜로스에게서 받아 든 묵직한 종이 탑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쿵 소리가 났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딜로스의 시선이 느껴지자 아릴은 의연하게 앉아 마련되어 있던 잉크 펜을 잡았다.

이딜로스는 그녀가 실력도 없이 자신감이 넘친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녀가 읽는 속도가 빠른 건 사실이었다. 인간들의 문물을 익히려 공부할 때는 800장에 달하는 책을 하루에 서너 권씩 정독하곤 했으니.

그러나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딜로스는 분명 필사를 하라고 했지. 그런데…….

‘펜을 어떻게 쥐더라……? 마멜라가 한 번 알려 줬었는데.’

아릴은 글자를 써 본 적이 많이 없었다. 펜을 쥐는 방법조차 생각나질 않으니 말 다 했다.

아릴은 온갖 자세로 펜을 잡아 보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 막막함에 빠졌다. 펜을 잡는 법을 모르면 글자를 쓸 수가 없지 않나.

그러다 옆에 이딜로스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느새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 이딜로스를 도둑고양이처럼 흘깃 훔쳐봤다. 재빠르게 그의 손 모양을 눈으로 복사해 온 아릴이 눈을 반짝였다. 맞아, 저거였어!

그제야 마멜라가 가르쳐 줬던 것들이 떠올랐다.

아릴은 우여곡절 끝에 금세 페이스를 찾아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펜을 쥐는 게 익숙지 않아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두 시간이라는 제한 때문에 서두르기에만 급급했다.

아릴이 이딜로스의 글씨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글씨가 아주 날아다니는데.”

바로 뒤편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릴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온 것인지 이딜로스가 바로 뒤에서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 공작님.”

이딜로스는 아릴의 해괴한 글씨를 보더니 눈가를 찌푸렸다. 뒤이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은 아릴에게 대못을 박았다.

“일을 맡긴 게 후회될 정도입니다.”

그 정도인가 싶어 제 손과 잉크가 지나간 자리를 돌아본 아릴은 할 말이 없어졌다. 너무 급했기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글씨가 엉망으로 날아다녔다.

아릴은 이딜로스를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의 단정하고 유려한 글씨와 너무나 비교되었다. 아릴은 제가 쓴 고양이 언어 같은 글자들을 손으로 가리고 싶은 창피함이 밀려왔다.

함께 힘내 보자고 온 건데, 이딜로스의 일을 더 늘리기만 한 걸까.

마음은 좋았으나 행동이 그래 주질 못한다면, 그건 안 하느니만 못한 거였다.

아릴은 미안함과 민망함에 펜을 꾹 쥐고 고개를 숙였다. 구차하게도 자신감을 잃은 목소리가 변명처럼 흘러나왔다.

“그게, 제가 정말로 읽는 건 빠르거든요……. 그런데 펜을 자주 안 쥐어 봐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도와주겠다 해 놓고서 방해가 되어서 죄송해요…….”

뒤편에서 숨을 푹 내쉬는 소리가 들리자 아릴은 움츠러들었다.

이만한 꼴불견이 있을까. 겨우겨우 그와 친해진 것 같은데, 피나는 노력으로 쌓은 호감을 멍청하게도 자신이 갉아먹는 짓을 하고 말았다.

‘한 번 더 사과하고, 그냥 돌아가자. 이대로 있다간 도움도 못 되고 미운털만 박힐 거야.’

낭패감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펜을 쥔 손 위로 무게감이 실렸다.

전류를 실은 듯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아릴은 흠칫하며 눈을 떴다. 그녀의 손 위로 겹쳐진 다른 손이 보였다.

귀 바로 옆에서 익숙한 기척이 스쳤다. 허리를 숙여 아래로 몸을 기울이고서 아릴의 손을 지탱한 이딜로스가 말했다.

“펜을 쥘 때는 힘을 조금 빼는 게 좋습니다.”

귀를 간지럽히는 낮은 저음에 아릴은 잠시 굳었다가, 그의 말 대로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이렇게요?”

“맞습니다. 그 상태로 이렇게, 문자의 첫머리부터 가볍게 시작해 끝으로 갈수록 굵고 힘차게 이어 가는 겁니다.”

의외였다. 이 일을 빌미 삼아 방해만 되는 아릴을 내쫓으리라 생각했던 그는 어째선지 그녀에게 천천히 글자를 쓰는 법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이딜로스가 겹친 손을 움직이자 펜촉에서 나온 잉크가 제법 봐 줄 만한 글자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조급해지지 말고 천천히.”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릴은 온몸의 털이 바짝 섰다. 그가 조금만 더 몸을 기울이고 팔을 뻗으면 안긴 거나 다름없는 자세라는 사실이 도화선에 불을 지피기라도 한 듯 심장을 한껏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그 버거운 두근거림 탓일까, 아릴은 실수로 펜을 삐끗했다. 놀라 숨을 들이켰다.

“죄, 죄송해요.”

그러나 이딜로스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좀 더 힘 있게 붙잡으며 글자를 이어서 써 나갔다.

한 문장을 끝맺고 온점까지 찍고서야 이딜로스는 손을 놓았다. 온기가 떨어지자 곧바로 한기가 밀려왔다.

“이제 혼자 해 보시죠.”

아릴은 달라붙는 시선이 주는 부담감을 견디며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있는 남자 때문인지, 쿵쿵 귓속으로 치닫는 소리를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왜 이러는 것일까. 진정해야 하는데, 도무지 진정되지가 않았다.

결국, 잘게 떨리는 손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저기, 이딜로스…….”

“이딜로스?”

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심장 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릴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아, 아니요! 공작님, 제가 말실수를…….”

서둘러 변명하려던 아릴은 그만 말을 삼켜 버렸다.

흔들리는 푸른빛 눈이 황금색의 시선과 지척에서 마주쳤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건가.

의자와 책상을 짚고 있던 이딜로스에게 아릴은 포위당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거기다 그녀의 종이를 본다고 허리까지 숙이고 있었으니 아릴이 고개만 조금 더 들었다간 얼굴 박치기를 할 뻔한 거리였다.

당혹스러움에 굳은 그녀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이딜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펠리아.”

그 역시 존칭을 접어 두었다.

이딜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굳은 아릴을 바라보며 나직하고 느릿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있었지.”

귓가를 녹일 듯한 낮은 목소리가 두근거리는 소리와 뒤엉켰다.

아릴의 흔들리는 시선이 이딜로스의 눈을 마주 보다가, 사고를 거치지도 않고 그의 다물린 입술에 닿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 역시 뒤따르듯 아릴의 눈을 지나쳐 붉은 입술에 내려앉았다.

심장이 이렇게 넘칠 듯 위태롭게 뛸 수도 있을까. 아릴은 위험을 직감하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당장 이딜로스를 붙잡아 당겨 구석구석 흔적을 남기고 싶은 짐승 같은 충동이 휘몰아쳤다.

아릴은 맹수를 다룬 책에서 숱하게 본 소유욕과 독점욕이란 것을 떠올렸다.

‘안 돼, 왜 이러는 거야……. 참아야 해.’

그러나 이딜로스는 그런 아릴을 배려해 주는 법을 몰랐다.

세차게 흔들리는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보다가 아래로 몸을 숙였다. 그녀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등받이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이딜로스는 홀린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다 지척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 순간, 이딜로스가 멈췄다.

아래를 지그시 내려다보자 그녀의 눈에 혼란과 곤혹이 뒤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짧은 시선이 오가는 동안 이딜로스는 정신을 차렸다.

한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한 건지, 당황스러워 곧바로 몸을 뒤로 물렸다. 염치가 있지, 눈앞의 상대는 집에 머무는 손님이자 안셀의 조카이고, 선생님의 따님이기까지 한데.

찰나지만 충동에 휩쓸렸던 것이 민망하고 미안해져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뗐던 순간이었다.

아릴이 멀어지는 이딜로스의 크라바트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꼭 멱살이라도 잡는 듯한 거침없는 손길에 이딜로스가 흠칫하자 아릴이 그를 끌어당겼다.

버틸 수 있었다. 의자를 붙잡고 멈추면 그만인데, 이딜로스는 그러지 못했다.

허리와 목을 꼿꼿하게 편 불편한 자세로, 아릴은 그의 입술에 제 입을 가져다 댔다. 민들레 씨가 스치는 것처럼 가벼운 마찰이었다.

아릴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심장을 뱉어 낼 것 같았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입술을 떨어트리려던 때, 이딜로스가 도망칠 수 없게 고개를 숙였다. 위에서 무게가 더해지자 간지럽게 스치던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아릴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책상을 짚고 있던 이딜로스의 손이 아릴의 뺨을 감쌌다. 그는 아릴이 내쉬는 숨까지 모조리 삼켜 버릴 기세로 입을 맞췄다.

줄곧 눈을 뜨고 있던 아릴의 시선에 가지런히 감긴 그의 속눈썹이 들어왔다. 숨이 막히는 떨림과 낯설게도 부드러운 마찰에, 이내 아릴의 눈도 스르륵 감겼다.

모든 사고가 멈추자 뜨겁고 습한 감촉만이 남았다.

도르르, 팅.

놓친 지 오래인 잉크 펜이 책상 위를 제멋대로 구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 그 누구의 신경도 사로잡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