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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90화 (80/191)

90화

아슐란은 검지와 중지만 펴 내 이마 위에 조심스레 올렸다.

“최소한의 기억만 살리는 겁니다. 그것이 아릴 님을 위한 저의 배려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게 왜 나에 대한 배려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기억을 살려 주는 것이 좋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아슐란의 눈을 감으라는 말에 가로막혔다.

나는 얌전히 눈을 감고, 은근한 긴장감에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 나직한 말과 함께, 아슐란이 낯선 언어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가볍게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점차 표정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 뒤죽박죽된 영상 같은 것이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럽게 울렁거렸다.

이윽고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미천한 것!>

귓가에서 터지듯이 들려온 소리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들이 귀 양옆에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짐승이면 짐승답게 살 것이지 감히 인간을 따라 하려 들다니.>

<인간에게 해만 되는 요물 같은 것.>

처음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감각이 살아나 기시감으로 점철된 기억들을 받아 내기 시작했다.

억센 발길질, 우악스러운 손길, 심장을 터트릴 듯 짓밟아 버리는 날카로운 말들까지.

숨을 크게 뱉어 냈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숨이 멎는 것이 느껴졌다. 삽시간에 시야가 온통 먹색으로 물들었다.

* * *

“신께서도 무정하시지. 또다시 이것을 인간에게 내리시다니. 지긋지긋하군.”

깊은 멸시와 혐오. 그들의 목소리에서는 구역질이 치밀 정도의 증오가 묻어났다. 무엇이 그리 싫었던 것일까.

“짐승 새끼가 인간인 척을 하니 이런 꼴이 되는 거지.”

그들은 나를 싫어했다. 인간보다 고귀한 생명체라는 것이 고작, 그들과 같은 인간의 몸에 야만적인 짐승의 피가 섞였을 뿐인 존재라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백 년 전의 모든 수인들에게도 이랬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만 이러는 것일까.

나는 웅크리고 떨었다. 그때의 난 저항할 힘도 없는 작고 연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설령 힘이 있다 한들, 그것으로 인간을 해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들의 비난과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만 했다. 나를 집요하게 쫓고 무섭게 헐뜯는 것들에 굴복해야 했다.

타고나기를 수인이기에. 여느 신격체와 같이 수인으로서의 사명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기에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제발, 누가 도와줘…….’

그들은 나를 발로 걷어차고 내던졌다. 내게 뜨거운 물을 뿌리고 돌을 날렸다. 그리고 돌아설 땐 길가의 개미를 보듯 무관심하게 등을 돌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를 대하듯이.

“짐승 새끼, 어디서 눈을 부라리는 거지?”

“다 제 명을 재촉하는 게지. 재수 없는 것 같으니.”

나를 버려두고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차츰 흐려졌다. 눈물인지, 시야의 일렁임인지, 알 수 없어 하염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얼마였을까. 눈앞의 장면이 뒤바뀌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목을 짓밟는 것이 느껴졌다.

“수인은 아천타의 검이 아니면 죽을 수 없다던데.”

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목소리가 바뀐 것을 알아채곤 나는 체념했다. 뒤죽박죽 흘러 들어오던 기억들 중, 이번엔 어떤 기억인 것일까.

밭은 숨을 내쉬며 정신을 바로잡으려던 때였다.

거친 발길이 나를 뻥 찼다. 몸이 불가항력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기관지에 맵고 무거운 가루가 들어차 반사적으로 기침을 내뱉었다.

뒤이어 느껴진 것은…….

‘뜨거워……!’

번쩍 트인 시야에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가 보였다. 이곳은 깊은 벽돌 화덕이었다.

등허리가 섬찟해져 화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그러자 화로 속의 열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서늘한 쇠꼬챙이가 나를 찔러 화덕 속으로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정말 상처 하나 생기질 않네?”

웃으며 내뱉는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그들의 말대로 내 몸은 불길을 앞두었다기엔 흠집도 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 어떤 상처도 보이지 않는다 해도 전해지는 고통은 고스란했다. 온몸을 달구는 끔찍한 감각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며 앞발을 뻗었다.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애원했다.

‘제발 이러지 마. 꺼내 줘, 부탁이야…….’

그러나 요란한 소리와 함께, 녹이 슨 화로의 새까만 철문이 바깥에서 스미는 빛을 모조리 집어삼킨 순간, 나는 절망했다.

“내일까지도 그을린 곳 하나 없이 살아 있다면, 정말 신의 축복을 받은 생명체인 거겠지.”

“쯧, 저까짓 짐승이 그런 존재라니…….”

그들이 발걸음을 돌려 떠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나마 열기가 덜한 철문에 달라붙어 앞발로 간절하게 육중한 쇳덩이를 두드리고 긁었다.

안 돼,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거친 철문의 표면에 앞발이 박박 긁혀 따가웠다. 서러움과 공포심에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눈물은 메마르지 않고 뚝뚝 흘러내렸다.

신께서는 왜 내게 이런 삶을 주셨을까.

왜 하필 내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순간, 노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떠나는 그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챈 나는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밀려드는 희망을 느꼈다.

“사, 삼 사제님…….”

“제가 경고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다가와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빛 속에서 칠흑색의 긴 머리칼을 풀어 내린 인간이 보였다.

그가 속상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나는 절박함에 달려 나가 그의 손바닥 위에 앉았다.

열기가 사라지고 온기가 남았다. 바들바들 떨며 그의 옷소매에 매달렸다. 그는 한숨과 함께 나를 감싸 안았다.

“이분은 신께서 내리신 고귀한 신격체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잘게 떠는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윽고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녹색 눈을 마주하자 그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지었다.

스며드는 기억에 감화되기라도 한 듯 덩달아 안도의 미소를 지으려던 때였다. 갑작스레 머릿속이 울렁거리며 멀미가 치밀었다.

눈가를 찡그렸다가 고개를 내젓자, 이번엔 비좁고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느 구석진 곳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또 어딜까, 생각하다가 흘러 들어오는 기억에 깨달았다.

나는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자연히 흘러 들어오는 과거의 내 생각에 귀 기울였다.

‘그들은 이상해. 다른 이들을 대할 땐 그 누구보다 선량하면서, 나를 마주치기만 하면 내게 깊은 원한을 품은 것처럼 돌변하고 말아…….’

먼지 가득한 어둠 속에서 우울하게 자그만 몸을 말았다. 막 쓸쓸하게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바로 근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반응한 나는 겁에 질려 다가오는 기척을 경계했다.

그러나 나를 지나쳐 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기척은 내가 숨어 있는 곳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나를 가려 줄 가림막도 머리 위에 있으니 들키지는 않을 것이라 희망을 가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파들파들 떨었다.

하지만…….

“여기 계셨군요.”

들키고 말았다. 뜨고 싶지 않았던 눈을 억지로 뜨자, 눈앞에 웬 낯선 인간의 신발이 보였다. 코앞에 큰 손바닥이 나타났다.

“괜찮습니다. 언제까지고 기다려 드릴 테니 안정되었을 때 나오시면 됩니다.”

나는 그 손을 미심쩍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가가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처음 맡아 보는 냄새…….

이곳 신전에서는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인간의 냄새였다.

한참을 머뭇대었지만 낯선 인간은 정말로 손을 거두어 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손을 펼치고 있을 인간이 신경 쓰여서 끝내는 머뭇거리다가 그 손바닥 위에 올라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나를 조심히 들어 올려 안았다. 어둠 속에서 빛이 가득한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나를 꺼내어 준 인간의 얼굴이 보였다.

심오하지만 올곧은 녹색 눈, 초여름이 생각나는 흑 비단 같은 긴 머리칼.

그가 싱긋 미소 짓자 어둠이 깔린 세상에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는 것 같은 충격이 밀려왔다.

나는 멍하니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새로 온 신전의 삼 사제, 아슐란이라고 합니다.”

“…….”

아슐란은 처음부터 유별난 인간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나를 증오하는 여느 인간들과는 다르게, 그는 유독 내게 호의적이었다.

나는 내게 낯선 호의를 베푸는 아슐란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떻게, 저 인간들처럼 돌변해 나를 내팽개치고 짓밟을지 몰랐기에.

“오늘도 여기 계셨군요.”

어김없이 내가 숨어 있는 장소를 귀신같이 알아낸 아슐란이 미소 지었다. 그는 이 무료하고 따분한 신전에서 꼭꼭 숨어 있는 나를 찾아내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거긴 지저분하니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제 곁에 계시면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

내가 불신하는 눈으로 쳐다볼 때면 아슐란은 늘 씁쓸하게 웃었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이해합니다. 줄곧 다른 인간들에게 몹쓸 짓을 당해 오셨으니까요.”

그리 말하는 아슐란의 눈빛에는 찰나에 분노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내 앞에서 분노를 내비치지 않았다. 이 또한 내가 숱하게 봐 온 인간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나는 망설임 끝에 아슐란의 손바닥으로 올라갔다. 오늘도 집요하게 손을 내민 끝에 나를 구석진 곳에서 끄집어내는 데 성공한 아슐란은 자못 수줍은 미소를 걸쳤다.

“용기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슐란은 나를 데리고서 인적이 드문 커다란 가제보의 밑으로 들어가 앉았다. 나부끼는 선선한 바람이 가제보 아래의 공간에 평온을 한 겹 감싸 씌운 것 같았다.

이곳만큼은. 아슐란과 함께 오는 이 가제보 밑만큼은…… 나를 괴롭히던 인간들의 손가락 하나 닿지 못할 것처럼 바깥과 내부의 경계가 선명했다.

나를 옆자리에 내려 둔 아슐란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뜻 보이는 아슐란의 올라간 입꼬리에 묘한 승리감 같은 것이 비쳤다.

나는 나를 곁에 두고서 괴롭히지도 욕하지도 않는 낯선 그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매를 살포시 끌어 올렸다.

“여긴 제게 위로가 되는 공간입니다. 이곳에 있으면 복잡한 생각이 모두 날아갈 것처럼 평온하거든요. 부디 당신에게도 그러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끔찍하도록 잔인한 인간들이 있는 이곳에서 내가 위로와 평온을 느낄 공간이라니. 그런 게 생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구태여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내 음울한 눈빛을 읽은 건지 아슐란이 나를 위로하듯 말했다.

“이곳 대신전의 사람들은 생각보다도 박하고 매정하더군요. 모두 아천타의 검에 홀려 버린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당신을 미워하겠습니까.”

난 지금으로선 인간들의 미움을 받기 위한 존재인데, 이 인간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오히려 당신은 사랑받아 마땅하신 분인데……. 분명 저들이 이상한 겁니다.”

“……아옹.”

“정말입니다. 저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로 온 것을요.”

아슐란은 수려한 인상으로 그에 조금 못 미치는 수수한 웃음을 피워 냈다.

“당신은 제게 희망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나는 그리 말하는 아슐란을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줄곧 내가 봐 온 인간들 모두가 나를 미워했으니까…… 이것이 오히려 맞는 것인데도, 내겐 아슐란이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아슐란이 내 이름을 물은 것은 그와 내가 아는 사이가 된 지 열흘은 지나서였다.

얼마 전부터 아슐란은 내게 꼭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더니, 그날이 돼서야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제가 감히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곳저곳에 물어봐도 누구도 알려 주지 않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없기에…….”

나는 아슐란의 요청에 우울하게 고개만 내저었다. 그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아직 이름을 하사받지 못하신 겁니까?”

“…….”

“신께서도 무정하십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방관만 하시다니.”

아슐란의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앞발로 찰싹찰싹 때렸다.

그런 말을 했다간 천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대신관이라는 작자가 어떻게 겁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

아슐란은 내 말을 벙벙한 표정으로 듣더니 곧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에 저렇게 크게 웃음을 터트리다니. 본인도 무례라는 것을 아는지 입가를 가리면서도 어깨를 한껏 떠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한참이나 웃음을 흘린 아슐란이 그제야 웃음을 그치곤 나를 바라봤다. 입가에 남아 있는 잔웃음이 여전히 눈에 띄었다.

“죄송합니다. 무척 귀여우셔서…….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옹.”

그의 말이 안 되는 변명에 아슐란을 한 번 노려보곤, 대충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답했다. 어차피, 나를 부를 명칭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불러 줄 사람은 이 인간밖에 없을 테니.

어쩌면 아슐란에게도 한 번 불리고 말 이름일지도 모르지.

“당장에 아무렇게나 부르라 하시니, 떠오르는 이름이…….”

아슐란은 이게 뭐라고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대충 ‘수인 님’ 정도로 부르면 될 텐데.

그는 한참의 고민 끝에 뭔가가 떠오른 듯 입을 벌렸다. 짧은 탄식 같은 침잠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펠리아…….”

“아옹?”

“……방금 제가 소리 내어 말했습니까?”

내 갸웃거림에 아슐란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물었다. 나는 갸우뚱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생각나는 이름이 이것밖에 없어…….”

나는 곤란한 듯이 시선을 피하는 아슐란의 반응에 왜 그러냐는 듯 앞발로 그의 다리를 건드렸다.

아슐란은 몇 차례 입을 달싹이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송구스럽지만, 전 연인의 이름입니다. 갑자기 생각하려니 이 이름밖에 떠오르지 않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신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마땅할 대신관이 연인?

내 미심쩍은 눈빛을 읽은 것인지 아슐란이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맹세를 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다급히 말했다.

“아주 어릴 적의 인연이었을 뿐입니다. 당연히 이곳에 발을 들이기 오래전부터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금욕했습니다.”

나는 아슐란을 흘겨보다가 낮게 울었다.

“……아옹.”

“……네? 정말로 그리 부르라는 것입니까?”

어차피 뭐로 불리든, 나는 언젠가 잊힐 존재인데.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 아펠리아 님.”

“…….”

“제게 이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불미의 사건으로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곤 희미하게 안도의 웃음을 띤 그 슬픈 눈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다.

아펠리아라는 이름을 속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여러 번 불러왔던 것일지, 아슐란의 눈빛만으로 그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꼬리를 살짝 내려 그의 손등을 덮듯이 감쌌다. 내가 건네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본래 나는 인간을 위해야 하는 존재이고, 어차피 내겐 이름 같은 것도 없었으니…….

내게 아늑한 보금자리를 내어 준 인간에게 그 정도의 자비는 허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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