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고양이 아릴
이딜로스와 내 사이가 조금 묘해졌다.
어쩌면 지난번, 첫눈이 온 날 이딜로스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을 때부터인 것 같기도 했고, 귤을 얼렸던 날 때부터인 것 같기도 했다.
이딜로스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또 하고 싶은 행동이 있는 것처럼 바라보다가도 돌아서기 일쑤였다. 거기다 내가 웃으면 때때로 멍해지는 낯까지.
타인과 있을 때면 늘 완벽을 추구하며 명료하기만 하던 이딜로스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해진 것은 이딜로스뿐만이 아니었다.
‘……입을 맞추는 행위는 인간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상대에게 하는 거라고 했어.’
나는 그가 손바닥에 묻었던 부드러운 감촉을 떠올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이 피어났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도 쉼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이 일대를 푹신하고도 새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그 하얗기만 한 일대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카델라로트의 마차였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 내 시선을 잡아끈 요인이었다.
‘이딜로스는 오늘도 어디를 가는구나.’
늘 있는 그의 출장 소식이 오늘따라 왜 이리 아쉽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손바닥을 잠시 움켜쥐다가 펴며 창틀을 붙잡았다.
나는 지금 기다리는 게 있었다.
곧이어, 이딜로스가 제 습관대로 떠나기 전 마멜라의 방 쪽을 한 번 바라봤을 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잠시 머무르다 거두어져 가려던 이딜로스의 시선이 멈췄다. 그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피어나는 미소를 머금고 소리쳤다.
“공작님!”
찰나, 이딜로스의 표정이 굳었다. 놀란 듯 크게 뜨인 그의 눈을 보며 나는 밝게 인사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래에서 마찬가지로 내 목소리를 들은 몇몇 사용인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펑펑 내리고 있는 눈처럼 내게 그들은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내 시야에 이딜로스가 들어와 있는 순간부터, 내 모든 신경은 줄곧 그에게만 향할 뿐이었다.
나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러다 너무 크게 손을 휘저어 옆 창틀에 팔꿈치를 부딪쳤다. 저릿한 충격에 끙 앓으며 팔을 감싸자, 그제야 멍하던 이딜로스의 낯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이딜로스는 심기 나빠 보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작게 입을 열었다.
“들어가.”
마치 헛짓거리는 그만하고 얌전히 있으란 것 같았다.
평범한 인간들에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그 작은 입 모양과 목소리를 나만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저리 말하는 것일까.
나는 그에 응하듯 얌전히 손을 내렸다. 그러곤 마찬가지로 그를 따라 작게 입을 열었다. 이딜로스에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빨리 오셔야 해요. 보고 싶으니까요.”
그 역시 평범한 인간이니 내 작은 목소리 같은 건 듣지 못하리란 건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딜로스는 내 말을 전해 들은 것처럼 한순간 바보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일까.
나는 단지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가볍게 웃었다.
이딜로스는 곧 안셀의 부름에 걸음을 돌렸다.
마차에 오르는 이딜로스의 모습을 바라봤다.
‘네가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어.’
이딜로스가 떠나자 할 일이 마땅치 않던 나는 평소대로 마멜라를 찾아갔다. 마멜라는 쌍수를 들고 나를 환영했다.
그러면서 아까 내가 이딜로스에게 인사하는 걸 들었다며, 은근하게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는 마멜라가 왜 이러나 싶어 마냥 웃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창 무료한 시간을 마멜라와의 수다로 채우던 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아릴, 아슐란 사제님이 찾아오셨대!”
아슐란……? 아슐란이라고?
눈을 깜빡이며 그 이름을 되뇌던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티 테이블이 흔들거렸다.
아슐란이 왔다. 드디어.
요나가 아슐란을 데리고 방으로 왔다. 나는 긴장을 머금은 채 그 인간을 맞았다.
아슐란은 나를 마주하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릴 님.”
“내가 마멜라에게 부탁해서 연락을 몇 번이나 했는데…… 왜 이제야 와?”
아슐란은 잠시 곤란한 낯으로 생각하는 듯하더니 살며시 인상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일 때문에 다시 방문해 달라는 소식을 접하고도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정이 있었다는데 탓할 수는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 인간…… 오늘은 지난번과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온갖 화려한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건 같았지만, 차림새가 내가 거북함을 느끼던 이전의 옷과 달랐다.
평범한 사제복이었던 그 옷과는 달리, 지금 그는 꼭 제복처럼 생긴 흰색의 각 잡힌 옷을 입고 있었다. 복잡한 무늬가 뒤섞인 금색의 넓은 띠를 한쪽 어깨에 흐르듯이 두르고, 목에서부터 내려오는 깃에는 금으로 된 일곱 개의 별이 박혀 있었다.
밤하늘보다 짙은 아슐란의 칠흑색 머리칼은 금실과 함께 꼬아 만든 머리끈으로 높게 올려 묶은 상태였다.
그의 낯선 차림새를 보곤, 나는 이딜로스가 하던 것처럼 한쪽 눈썹을 추켜올려 봤다.
아슐란을 안내해 준 요나나 나와 같이 그를 맞이한 마멜라는 믿기 힘든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 역시 아슐란의 차림새가 과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차려입고 온 거야? 마멜라가 눈이 아프다잖아.”
쓸데없이 화려하게 온 아슐란을 나무랐더니 마멜라가 놀라 숨을 삼켰다. 이내 그녀는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경외가 섞인 눈으로 속삭였다.
“아릴…… 저 복장은 신전에서도 칠성에 해당하는 분들만 입을 수 있는 거야.”
“그게 뭔데?”
“칠성은 신전에서 가장 높은 세 사람을 말해. 난 저분이 그렇게 높은 분이실 줄 몰랐어……!”
마멜라가 안절부절못하며 속삭이는 말에 아슐란이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 그저 신앙심이 커 이름이 거창해졌을 뿐, 제가 대단한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한 존재이니 지금 이곳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은 아릴 님뿐이십니다.”
“너 말 진짜 많다.”
번드르르한 말을 길게 뽑아내는 아슐란에게 순진한 목소리로 말하자 마멜라는 또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더 고귀하다는데 마멜라는 내게 익숙해진 건지 나보다 덜 고귀한 아슐란을 더 경외했다.
내색 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인간에게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지난번에 나한테 고양이로 돌아가는 법은 안 알려 주고 갔어. 방법을 아는 것 같던데, 그렇게 떠나는 게 어딨어? 지금이라도 알려 줘.”
내 당당한 요구에 아슐란은 눈매를 살짝 좁혔다. 내가 고귀하다길래 일부러 더 고개를 쳐든 것인데, 불편했던 건가.
나는 아슐란이 도움을 주지 않을까 봐 거만한 표정을 서둘러 지웠다.
아슐란은 심각한 낯으로 제 턱을 짚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숱 많고 긴 머리칼이 옆으로 살짝 치우쳤다.
그가 보인 반응이 순전히 내 무례 때문만은 아니었는지, 아슐란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말했다.
“지난번엔 무례를 끼쳐 죄송했습니다. 그저 신성력을 급한 대로 밀어 넣었을 뿐인데 정말로 고양이로 돌아갈 수 있으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정말이야?”
“네. 그리고 저 역시 돌아가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조금 이상합니다.”
“뭐가?”
“보통 인간이 되는 법을 깨우친다면 본체로 돌아가는 법은 정해진 순리처럼 자연스레 몸에 배게 됩니다. 거기다 아릴 님은 아마 지금쯤 성체이실 텐데…….”
“나 수백 번도 넘게 시도했는데 안 됐어.”
시무룩하게 말하자 아슐란은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 그 영향 때문인 건지…….”
“무슨 영향?”
아슐란은 눈을 지그시 내리깔며 침잠한 낯으로 말했다.
“……제가 감히 짐작하건대, 아릴 님이 고양이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은 잊으신 그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파에 자리한 우리에게 요나가 차를 내왔다. 마멜라는 피해야 하나 눈치를 봤지만 아슐란이 있어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심쩍음에 그를 바라봤다.
“난 때가 아니라서 기억하면 안 된다며.”
아슐란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두 팔의 소매를 조금씩 걷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합니다. 아릴 님께 이러한 문제가 생길 줄 모르고 한 말이었습니다. 본래는 자연히 돌아오길 바라야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최소한의 기억이 돌아와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아릴 님의 기억의 일부를 복구시켜 드리겠습니다. 강제로 끄집어내는 것이니 조금 아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