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88화 (78/191)

88화

첫눈이 내린 후로 카델라로트 영지에는 눈이 차곡차곡 쌓여 저택의 지붕과 마차, 마을,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딜로스는 잉크 묻힌 펜을 움직이다가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멈췄다.

“전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엘 리우스트에 위치한 마르젠로트의 두 번째 지점에, 그가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내줬던 친우가 찾아왔다기에 맞이하러 갈 참이었다.

이딜로스는 나무처럼 가지를 뻗은 스탠드형 옷걸이에 걸어 둔 겉옷을 잡았다.

평소와 같이 남의 도움 없이 매무새를 다듬은 이딜로스는 문득 책상 한곳에 마련된 고양이의 자리에 시선이 닿았다.

‘요즘 들어 아릴이 잘 찾아오질 않는군.’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그것도 아주 잠시, 마치 자신은 아픈 곳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리듯이 이딜로스의 잘 닦아 둔 구두에 발 도장만 남기고 사라졌었다.

만나고 싶어 직접 마멜라의 방을 찾아가면 찾는 아릴은 없고 늘 아펠리아만 마주칠 뿐이고.

마멜라의 말로는 아릴이 겨울잠을 자고 있다고 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여동생의 말에 일단은 어울려 주긴 했다만…….

‘그렇게 집무실에 오기를 좋아하던 고양이가 발길을 끊으니 걱정되는군.’

그뿐이 아니다. 마멜라와 밖에서 뛰어다니며 노는 것 또한 무척 좋아하지 않았던가. 날씨가 춥기 때문인 건지, 아릴이 뛰어노는 모습도 최근 들어 보질 못했다.

분명 눈밭을 보면 신기해할 테고 기뻐할 텐데.

이딜로스는 눈밭에 찍힐 아릴의 앙증맞은 발자국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지금쯤 창가에 앉아서 새하얗게 물든 일대를 보았을까.

‘……마멜라가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을 보면 잘 지내는 것이겠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하며, 이딜로스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저택을 나가자 대문으로 나가는 길에 웬 시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아펠리아에게 붙여 준 시녀, 베로니였다.

베로니는 아래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시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눈인 줄만 알았던 무언가가 쪼그리고 앉아 꼬물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본 그는 눈을 뽀드득 밟으며 다가갔다.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며 다가갔는데, 대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건지 여자는 돌아볼 기색도 없었다. 옆에 선 시녀는 진즉에 그를 발견하곤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말이다.

수상쩍음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펠리아는 나뭇가지로 제 주먹보다 큰 눈덩이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그녀가 하는 양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그제야 아펠리아가 나뭇가지를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높이 들어 옆에 선 장신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을 본 이딜로스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비록 옷을 겹겹이 입고 털 망토까지 걸치고 있는 차림새였지만, 바깥에서 오래 있었던 건지 아펠리아의 코는 루돌프의 코처럼 발개져 있었다.

거기다 코까지 훌쩍이는 주제에, 그를 보곤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거요?”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흩어지는 입김에 이딜로스는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애써 외면하며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가 굴리고 있던 눈덩이로 옮겼다.

“……눈사람?”

“아니요!”

당차게 대답한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빨개진 코를 한 번 만진 후에 배시시 웃었다.

“귤을 얼리고 있었어요.”

“귤?”

그가 다시 내려다본 눈덩이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눈덩이였다. 저 안에 귤이 들어 있다는 건가.

얼려 먹기를 원한다면 냉동고에 넣어 두면 될 것을, 굳이 이 추운 날 눈밭에 굴려 귤을 얼리겠다니. 아펠리아의 엉뚱함에 못 이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이 한심하기는커녕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건 정말로 그가 이상해졌다는 증거일까.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상하게도 화가 났다. 자꾸만 아펠리아의 발개진 코에 시선이 닿았다.

“꽤 차가워졌어요. 보실래요?”

아펠리아가 대뜸 맨손으로 눈덩이를 집어 들더니 파묻힌 귤을 꺼내기 위해 눈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몇 걸음 떨어진 시녀가 놀라 숨을 삼켰지만, 이딜로스가 옆에 있어 눈치만 볼 뿐, 말리지 못했다.

귤을 들어 올린 손바닥이 코만큼이나 발개져 있었다. 이전에 귤을 묻을 때도 맨손으로 했던 것인지…….

이딜로스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 미간을 찡그렸다. 속에서 어떤 정제되지 않은 말이 왈칵 치밀려 하는 것을 참았다.

그는 아예 시선을 돌려 버렸다.

“됐습니다.”

왜 화가 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등을 돌렸다. 차라리 보질 않으면 이유 없이 치미는 짜증이 잠잠해질까.

아펠리아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그의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그가 멈췄다. 무심결에 나온 깊은 한숨에 입김이 길게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보지 않으니 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다시 걸음을 돌려 아펠리아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펠리아는 귤에 묻은 눈을 털어 내다 말고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갸웃거리며 하는 말이,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공작님 귤도 얼려 드릴까요?”

“……아니.”

반말? 아펠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때, 이딜로스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가 늘 품에 지니고 다니던 흰 손수건이었다.

아펠리아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이딜로스는 무릎을 굽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의 한쪽 무릎이 두껍게 쌓인 차가운 눈밭에 파묻혔다.

“몸도 허약하다면서,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겁니까.”

이딜로스가 눈덩이를 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손수건으로 귤을 털기 시작했다. 아펠리아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의 머리칼보다 진한 오렌지 빛깔이 눈덩이 틈에서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딜로스는 아펠리아의 손에서 귤을 완전히 가져가 손수건으로 꼼꼼하게 눈을 털어 냈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까?”

“네…….”

멀끔해진 귤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그에게 아펠리아는 홀린 듯 대답했다.

그러한 그녀의 멍한 반응은 이딜로스의 기분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발개진 코와 뺨도 그렇고, 멍하니 벌어진 입술이나 귓가도 그렇고. 오래도록 눈을 맞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너무 발갛기만 했다.

이딜로스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곤 손수건에 싸인 귤을 잠시 눈밭에 내려 두었다.

“아, 내 귤…….”

아펠리아의 시선이 귤을 따라 내려갈 때, 그의 양손이 그녀의 두 뺨을 감쌌다. 내려가던 아펠리아의 고개가 끌려 올라갔다.

그녀의 동그랗게 뜨인 눈이 금색의 눈과 마주쳤다. 아펠리아는 한순간 코끝을 시리게 하던 겨울바람이 미적지근한 봄바람처럼 느껴졌다.

“얼음장 같은데, 괜찮은 겁니까?”

“…….”

“나보다 체온이 낮기도 힘든데 손이 많이도 가는군요.”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성가시다는 듯이 말하는 투였지만, 그의 행동은 달랐다. 착실하게 아펠리아의 뺨을 데우고자 제 손바닥의 온기가 식었다고 느껴질 때쯤엔 손등으로 돌려 아펠리아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아펠리아는 두근거리는 낯선 감정이 이상할 정도로 올라오는 것을 느끼자 당혹감에 입을 열었다.

“고, 공작님. 이러지 않으셔도…….”

“코까지 빨개진 채로 그렇게 말해 봤자 들어주고 싶지 않단 걸 모르나 봅니다.”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에요…….”

“추워서 그런 게 아닙니까. 대체 뭐가 어떻게 이상하단 건지.”

이딜로스가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길로 째려봤다.

제 손에 온기를 다 빼앗아 가, 뺨은 그럭저럭 미지근해졌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이 발개진 코는 또 어떻게 데워 줘야 할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손으로 문질러 줄 수도 없고.

‘어서 이 눈덩이 같은 여자를 저택 안으로 돌려보내는 게…….’

그때, 아펠리아가 못 견디겠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기어가듯이 말했다.

“너무 간지러워요…….”

“…….”

“너무 간질거려서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단 말이에요…….”

아펠리아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시금 소심하게 들어 올렸다. 그렇게 마주한 이딜로스의 얼굴은 어째선지 넋이 나간 듯 멍해져 있었다.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라보던 그의 귓가에 점차 엷은 빛깔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아펠리아는 이딜로스의 이상한 반응에 제 감정을 한차례 침과 함께 삼켜 버리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

그러곤 제 뺨을 붙잡은 이딜로스의 오른쪽 손을 살며시 건드렸더니, 갑작스레 이딜로스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재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아펠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하여 이딜로스가 제대로 보게 된 아펠리아의 양 뺨은 온기가 스며 추위가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붉었다. 그녀 특유의 무해한 얼굴이 유독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한순간 치미는 요란한 감정에 이딜로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 봐야겠습니다. 아펠리아 양도 추우니 이만 들어가 보시지요.”

아펠리아가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이딜로스는 등을 돌렸다. 아펠리아는 멍하니 멀어지는 이딜로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손을 들어 제 뺨을 살짝 문질렀다.

……왜 이러지?

꼭 뭔가가 고장 나고 제어가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는 멎을 줄을 몰랐다.

아펠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풀며, 손을 뻗어 눈밭 위의 귤을 끌고 왔다.

이딜로스는 갈수록 예측할 수 없는 호의를 툭툭 내보였다. 분명히 일전의 그라면 무시하고, 한심하게 여기고 넘어갔을지도 모를 상황인데.

그가 더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

이제는 이딜로스도 자신을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고, 그렇게 여겨도 되는 것일까.

얼음장 같은 귤을 가만히 들고만 있던 그녀를 보다 못한 베로니가 다가와 말했다.

“아펠리아 아가씨, 귤이 차가워졌으면 어서 돌아가요. 날이 춥잖아요.”

“……안 돼.”

아펠리아는 차가운 귤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을 살며시 깨물다가 놓은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귤이 다 녹은 것 같아서 안 돼…….”

귤을 쥐고 있던 손을 기분 좋게 두근거리고 있는 가슴 위로 옮겨 갔다. 낯선 떨림과 맹렬한 두근거림이 손으로 전해졌다. 혼자 앓기엔 너무나 답답한 감정이었다.

‘이상해…….’

아펠리아는 시선을 내리고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지난번 제 손 위로 내려앉았던 부드러운 온기가 떠올랐다. 그 감촉과 눈빛이 그녀를 며칠간 잠 못 들게 했던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래. 아무래도 우린 둘 다 어딘가 이상해져 버렸나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