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네?”
내 어리바리한 되물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이딜로스가 잘생긴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내가 남의 손을 잡을 일이 뭐 있나? 그 상대도 두 사람 말고는 없는데.
“전 마멜라와 공작님이 아니면 손은 잡지 않는데요?”
“……나는 왜 또 그 축에 들어가는 겁니까?”
그가 마뜩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정작 표정은 이전보다 누그러진 상태였다.
나는 최대한 성의껏 대답해 주기 위해 잠시간 생각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야 공작님과 손을 잡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계속 잡고 있고 싶어요.”
이딜로스는 한순간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그의 그러한 반응이 유쾌했던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잡아 주실래요?”
이딜로스의 눈썹 끝이 움찔했다. 그의 얼굴에 알아채기 힘든 묘한 빛이 어리는 것을 막 발견했을 때, 이딜로스는 나직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는 막 완성된 묵직한 퍼즐 판을 들어 올려 내게 떠넘기듯 안겨 주었다.
“퍼즐도 완성되었으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바다는요? 가는 거 맞는 거죠?”
나는 이딜로스의 떠밀림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방실방실 물었다. 이딜로스는 그런 나를 아주 성가시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무성의한 대답과 함께 나를 내쫓아 버렸다.
“그러시던지.”
나는 그의 허락에 기쁨을 만개했다. 매정하게 닫히려는 문을 향해 해맑게 소리쳤다.
“약속이에요, 꼭!”
이딜로스의 막막한 한숨이 들리는 듯했지만 나는 헤실헤실 웃었다.
언젠가 찾아올 이딜로스의 우울함을, 그리고 내 쓸쓸함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서로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 * *
공작저에도 겨울을 알리는 한파가 내려앉았다.
이로써 언젠가 아펠리아가 이딜로스에게 한 적이 있던, 사계절 모두 서로를 마주치게 되겠다는 말이 정말로 사실이 되었다.
봄여름까지만 해도 경계의 대상이자 무단 침입자에 불과하던 여자가 가을과 겨울을 거치자 어느새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새삼 사람과의 관계는 어찌 될지 모르는 거였다.
1층의 복도를 거닐던 이딜로스는 불현듯 창밖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눈에 띄는 새하얀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펠리아 로제트…….’
창문 쪽으로 다가간 그는 창밖을 눈에 담으며 느릿하게 걸었다.
줄곧 마멜라가 없어도 저택 이곳저곳을 잘 쏘다니던 아펠리아가 이딜로스보다 조금 앞서 밖을 거닐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천천히 그녀를 뒤따라 걸으며 뒷모습조차도 해맑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타인이 제집을 멋대로 돌아다니는데 이토록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왜일까.
제한을 두고 싶다기보다 오히려 풀어놓고 여기저기를 샅샅이 다녀 주길 바랐다. 흔적이 남지 않은 곳조차 없게.
앞서가던 아펠리아의 모습이 어느새 큰 창문을 지나쳐 복도의 벽에 가려졌다. 잠시 모습이 사라졌지만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옮기는 아펠리아의 모습은 어째선지 여전히 생생했다.
하지만 눈앞에 그 모습이 분명히 아른거리는데도, 그와는 별개로 이딜로스는 아펠리아의 온전한 모습을 다시 눈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걸음을 조금 더 옮겨 다음 창문으로 뒤따라갔다. 다시금 아펠리아의 뒷모습이 비쳤다.
그러다 또 그녀의 모습이 벽에 가로막히면 이딜로스는 그다음 창문으로 느지막한 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이따금 아펠리아가 옆에 있는 꽃나무를 바라보느라 멈출 때도 이딜로스는 뒤따라 멈추었다.
잔잔한 파장을 몰고 있는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는 새에 아펠리아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어 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꽃나무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를, 이딜로스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아펠리아.
입 안으로 조용히 발음해 보는 그 이름이 달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내게 친구가 되자니…….’
순수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하는 수두룩한 사람들 속에서, 아펠리아는 유일하게 그러한 목적을 쥐지 않은 존재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녀를 뒤쫓고 있는 지금.
멀어지는 뒷모습조차 시야에서 놓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를 친구라고 받아들이게 된 걸까.
아니면 이전보다 더욱 눈길을 끌게 된 그녀를 여전히 집요하게 파헤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걸까.
바람이 불자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나뭇잎들이 툭툭 떨어져 휘날렸다. 뒤따라 구름처럼 새하얀 머리칼도 보드라운 깃털처럼 흩날렸다.
그 모습이 꼭 요정 같다고 할까. 평범히 거니는 모습조차 사뿐히 사랑스럽기도 했다.
이런 마음을 느끼는 게 단지 허물어진 경계심 때문일 리 없었다. 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귓가를 간지럽히는 심장 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도 뭐도 아니었다.
이건 마치…….
“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뒤돌아본 아펠리아가 창 너머의 그를 발견했다.
한순간에 표정을 활짝 핀 그녀가 이딜로스가 선 창문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뒤따른 머리칼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나풀거렸다.
어느새 창밖에 마주 선 아펠리아가 뭔가를 말했다. 제대로 들리지 않아 이딜로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아펠리아는 좀 더 우렁차게 말했다.
“공작님, 좋은 아침이에요!”
이딜로스는 크게 입을 벌려 말하곤 방싯 웃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행동과 표정이 고요할수록, 마음이 술렁이는 것이 크게 느껴졌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창문을 열려다 멈췄다. 지금 이 창문을 열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울렸다.
이 창문만 열면, 닿을 수 있는데…….
하지만 이성을 붙잡은 그는 다시금 손을 말아 쥐었다. 이딜로스는 아펠리아에게 가벼운 눈인사만 남기고 걸음을 돌렸다.
아펠리아 로제트에게 휩쓸려선 안 되었다. 이 이상한 두근거림에 귀 기울여서는 안 되었다.
이딜로스는 그러한 이성의 소리침에 응하듯 단호히 옆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대로 지나쳐 가기만 한다면, 이런 낯선 마음 따위 점차 사그라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서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중에 걸음을 멈추었다.
겨우겨우 이성을 붙잡은 것이 무색하게, 이딜로스의 고개는 손쉽게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그를 뒤따라온 듯한 아펠리아가 잔뜩 들뜬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펠리아가 밖에서 뭔가를 열심히 떠들어 댔다. 그러다 곧, 창문을 사이에 두고는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단 걸 깨달은 건지 입을 살짝 벌리더니 겸연스레 웃었다.
이윽고 한 걸음 한 걸음 창문 쪽으로 다가온 아펠리아가 밖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딜로스가 차마 열지 못했던 그 창문을 말이다.
줄곧 막혀 웅웅 대는 듯하던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한순간 터지듯이 시원스레 밀려왔다.
“공작님, 눈이 와요!”
올해의 첫눈이었다.
이딜로스는 펑펑 날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신기하다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자를 응시했다.
두 손 모아 떨어지는 눈을 받던 아펠리아가 그에게 눈 좀 보라며 손바닥을 보였다. 그래 봤자 이미 체온에 녹아 사라진 후인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그녀를 멍하니 눈에 담았다. 꼭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딜로스는 나지막한 탄식을 터트렸다. 낮은 소리와 함께, 나타나선 안 될 것이 함께 밖으로 끌려 올라왔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이제는 가로막을 창조차 없는 공간을 지나쳐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머릿속에서는 감히 벽을 허물려고 하는 그에게 경고의 일침을 날렸지만, 이딜로스는 책임을 눈앞의 여자에게로 떠넘겼다.
당신이 이걸 연 거야.
나는 돌아서려 했던 걸, 당신이 막아선 거고. 그러니 내가 충동에 져 버린 건 모두 당신 탓인 거야.
덜컥 끌려간 아펠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딜로스는 눈이 묻어 습한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조금 전 꽃나무에 손을 뻗던 그녀의 손에서 동백의 풀 향이 묻어났다.
손바닥 위로 입술과 코를 묻고 여트막한 한숨을 쏟아 내자 아펠리아가 흠칫 손을 움츠리려 했다. 하지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이딜로스는 입술을 떼고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곤 조금 전의 무례를 사과하듯 이번엔 정중히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그의 금안이 속눈썹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느새 제게 특별함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