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따스한 봄바람에서 무더위를 품은 바람으로. 다시 여름 바람에서 낙엽을 실은 선선한 가을바람이 되었을 때.
그것만으로 나는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밖을 나가려면 옷을 한 겹 정도는 더 껴입어야 할 정도로 바람이 차가워졌다.
나는 우수수 떨어져 내린 낙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간신히 명줄을 매달고 있는 낙엽들이 대롱대롱 보였다.
“벌써 겨울이 찾아오네.”
신발 끝으로 발치에 쌓여 든 낙엽들을 툭툭 건드렸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바람에 섞인 겨울 특유의 건조하고 차가운 냄새가 스며들었다.
잠시 다른 곳에 한눈이 팔린 사이, 마멜라가 내 팔을 쿡쿡 찔렀다. 고개를 돌리자 마멜라가 뭔가를 들이밀었다.
“아릴, 이것도 먹어 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가득 뜬 스푼이었다.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먹어야 한다는 마멜라의 말대로 이 쌀쌀한 날씨에 밖에 나와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다.
입을 벌리자 마멜라가 아이스크림 스푼을 쏙 넣어 줬다. 맛있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마멜라가 흡족하게 내 머리칼을 만지곤 떨어졌다.
맛있긴 한데 조금 춥다.
한순간 스미는 한기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면 안 되겠냐고 말하려던 때였다.
어깨 위로 묵직한 뭔가가 툭 덮였다.
“마멜라, 아펠리아 양이 몸이 허약하단 사실을 종종 잊는 모양이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상기된 마음으로 그를 불렀다.
“공작님!”
이딜로스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움에 해사하게 웃었다. 이딜로스는 그런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아펠리아 양도 여동생이 해 달라는 대로 곧이곧대로 해 주지 않길 바랍니다.”
마멜라는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이딜로스를 맞은편 자리로 이끌었다.
“오라버니, 왜 이렇게 늦게 나오셨어요. 아이스크림이 다 녹지 않아서 다행이지…….”
“미안, 마저 정리해 두고 나올 게 있었어.”
“어서 드세요.”
이딜로스가 마멜라로부터 스푼을 받았다. 나는 그가 마멜라의 성화에 못 이겨 딸기 아이스크림을 떠 입에 넣는 모습을 바라봤다.
아까 마멜라에게 이딜로스는 왜 딸기 맛이냐고 물었더니 아이스크림 중에서는 딸기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었다.
의외였다. 많이 달지 않고 깔끔한 우유 아이스크림 같은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언니, 이것도 먹어 봐요.”
마멜라가 아이스크림을 듬뿍 묻힌 초콜릿 과자를 내밀었다. 나는 아기 새처럼 받아먹곤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선은 줄곧 이딜로스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언니.”
“응?”
고개를 돌리자 묘하게 음흉한 눈길로 나를 보며 히죽거리는 마멜라가 보였다. 마멜라는 상기된 뺨으로 웃더니 갑작스레 이딜로스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언니가 딸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가 봐요.”
“마멜라……?”
“보시다시피 저랑 언니는 같이 먹고 있는데 제가 딸기 아이스크림은 안 좋아해서 안 넣었거든요.”
기쁨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마멜라가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이딜로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쪽으로 아이스크림 컵을 살짝 밀어 줬다.
“어, 먹어도 되나요?”
이딜로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얼떨결에 스푼을 쥐었다.
그런데.
“헉, 죄송해요, 언니!”
마멜라가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뜨는 척하더니 나를 옆으로 퍽 쳤다. 그 바람에 나는 스푼을 잔디밭으로 떨어트렸다.
마멜라는 못 쓰게 된 스푼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더니 말했다.
“아, 어쩌지……. 제가 새로 구해 올게요. 일단 오라버니가 스푼 좀 빌려주세요.”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한 마멜라는 사용인을 시키면 되는 것을 굳이 직접 스푼을 가지러 사라졌다. 자신의 스푼은 입에다 꼭 문 채로 말이다.
‘……뭐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게 마멜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불현듯 딸기 아이스크림의 냄새가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니 이딜로스가 제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내밀고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아이스크림 스푼을 한 번, 그를 한 번 바라봤다.
“저기, 공작님. 마멜라가 스푼을 가지고 오면…….”
“아.”
그는 내 말을 숭덩 잘라먹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벌리라 했다. 이미 떴으니 어서 받아먹으라는 눈빛이었다.
망설이다가 입을 벌리자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에 들어왔다. 다시 금세 스푼이 쏙 빠져나갔다. 동시에 심장도 쏙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염치없이 한 번 더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달콤했다.
“어떻습니까?”
“……맛있어요.”
“다음번엔 여동생과 따로 드시지요. 마멜라는 바닐라와 초코는 섞이더라도 딸기는 절대 섞이면 안 되는 아이라서.”
“네…….”
어색하게 대답하며 그를 흘끔댔다.
그냥 이딜로스의 스푼을 내가 잠시 빌려 쓴 것뿐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 걸까. 마멜라가 떠 주던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더 드시고 싶습니까?”
내가 물끄러미 바라본 것을 다르게 받아들인 그가 물었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스푼으로 떠서 입에 넣어 준다면…….
“새 딸기 아이스크림을 내오라 하겠습니다.”
“아…… 네?”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당혹스레 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사용인이 왜 한 명도 없냐며 미간을 살짝 찡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서둘러 이딜로스를 붙잡았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양하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달아서 더는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러지 말고 저랑 계속 같이 있어 주세요, 네?”
“…….”
순간 그의 표정이 이상해지는 걸 본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이딜로스는 묘해진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미간을 설핏 찌푸린 채로 소심하게 말했다.
“타인에게 오해를 줄 법한 말은 조금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오해요?”
“…….”
내가 되물었지만 이딜로스는 딱히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듯 고개만 돌렸다.
나는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에 말을 꺼냈다.
“저, 공작님.”
이딜로스가 대답 없이 나를 쳐다봤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말 대신 눈빛에 왜 부르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들었어요. 마멜라가 이번 겨울에 학교에 입학한다는 거요.”
“……마멜라가 이야기했습니까?”
“네.”
실은 이딜로스의 집무실에서 알게 된 사실이 더 빠르긴 하지만. 돌아가 마멜라에게 캐물은 것도 있으니 거짓 대답은 아니었다.
이딜로스는 아이스크림 스푼을 만지작대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그는 자신이 어떤 무게의 한숨을 내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딜로스의 시선을 따라 서서히 녹고 있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바라봤다.
곧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펠리아 양은 늘 여동생과 시간을 보내었으니 적적하시겠군요.”
“……그래도 공작님만큼은 아닌걸요.”
이딜로스의 시선이 아이스크림에서부터 내게로 올라왔다.
나는 마주친 시선에 엷게 웃으며 그를 위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공작님이야말로 많이 적적하실 것 같아요.”
그의 표정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살며시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좋은 오빠이시잖아요. 이렇게 여동생이 부르면 무슨 일이든지 찾아와 주실 정도로. 공작님이 바쁘신 거 알아요. 바쁜 시간을 나눠 주는 것만큼 다정한 게 없다는 것도 알고요.”
“……다정하다니.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 보는군요.”
이딜로스의 얼떨떨한 말에 나는 선선한 겨울바람만큼이나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아릴이 그러던걸요. 이딜로스는 무척이나 다정하다고. 이미 아릴이 공작님께 많이 말해 주었을 텐데요.”
“…….”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신다면 제가 말해 드릴게요. 공작님은 무척 다정하세요. 제 눈에 공작님은 언제나 햇살 같으신걸요.”
이딜로스는 짧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이딜로스는 말을 마치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손이 곧이어 아이스크림이 담긴 둥그런 컵을 찾아갔다. 그는 손을 식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컵의 옆면에 계속해서 한 손을 대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을 바라봤다.
“……그런데 마멜라는 언제 오는 걸까요?”
“오다가 한눈이 팔렸는지도 모르겠군요. 아릴과 놀고 있거나.”
이딜로스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짧게 움찔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딜로스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차가운 기색을 띠나 햇살 같기만 한 그의 눈은 한차례 내 옷차림에 향했다가 다시금 내 얼굴로 돌아왔다. 곧이어 그가 물었다.
“추워 보이는데, 이만 들어가시겠습니까?”
“네? 하지만 마멜라가…….”
나는 말끝을 흐렸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선 이딜로스가 내게 팔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팔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김없이 반듯한 미모의 그가 나를 잔잔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눈빛은 묘하게 다정했다.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돌아와 우리를 찾을지도 모를 마멜라 대신 나를 데려다주기를 선택하는 것은 왜일까.
그라면 여기에 남아 마멜라를 기다리기를 택하고, 나더러 추워 보이니 혼자 들어가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내가 다정하다고 말해 준 것이 이딜로스를 정말로 다정하게 만들어 버리기라도 한 걸까.
“감사해요.”
낯선 그의 행동에 망설이기도 잠시, 나는 수줍은 웃음을 흘리곤 이딜로스의 팔을 잡았다.
이내 그가 평소보다 느린 걸음걸이로 나를 저택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맞닿은 온기가 평소보다 따뜻한 나머지 나는 저택의 입구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나타나 주길 마음속으로 바랐다.
* * *
“와아. 아릴, 멋지다! 이걸 용케 다 맞췄네.”
“심심할 때마다 끼워 맞췄거든. 며칠 전부터는 밤까지 새웠어.”
나는 마멜라의 물개 박수에 어깨를 으쓱했다. 테이블 위에는 내가 인간으로서 막 공작저에 왔을 무렵 안셀이 선물했던 1만 피스의 퍼즐이 있었다.
기개 있는 호랑이의 모습이 튀어나올 것처럼 그려진 퍼즐을 완성한 나는 흐뭇하게 그걸 내려다봤다.
퍼즐이란 거, 생각보다 재미도 있었고 오기도 생겼다.
‘인간들의 문물 중엔 재미있는 게 많다니까.’
마멜라에게 한껏 자랑을 마친 나는 묵직하고 거대한 퍼즐을 낑낑대며 들어 올렸다.
“이딜로스한테도 자랑하고 올 거야. 안셀도 있겠지?”
나는 그 두 인간이 내가 맞춘 퍼즐을 보곤 감탄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절로 기분이 즐거워져 흡족하게 웃었다.
그런데 마멜라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안셀은 지금 없을걸?”
“뭐라고?”
웃음을 뚝 멈췄다. 내 퍼즐을 보고 박수를 쳐 줄 관객 한 명이 사라지는 건가?
나는 내 노고를 알아줄 인간 한 명이 줄었다는 생각에 울상을 짓곤 마멜라를 바라봤다.
마멜라는 곤란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안셀은 잠시 고향에 간다고 했는데……. 아마 모레쯤 돌아올 거야. 그때 자랑하면 되지.”
“…….”
“우선 오라버니한테 보여 드리고 와. 오라버니도 대단하다고 해 주실 거야.”
마멜라는 시무룩한 나를 토닥였다. 나는 음울하게 그녀의 다독임을 받다가 말했다.
“마멜라는 같이 안 가?”
“으응? 아, 나는 바빠서……. 아릴이 혼자 다녀와!”
내게 그리 말한 마멜라는 곧장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갑작스레 마멜라가 뭔가를 부랴부랴 적어 대기 시작했다. 바쁘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알았어, 다녀올게.”
나는 커다란 퍼즐을 들고 낑낑대며 이딜로스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이젠 제법 친해졌다는 믿음이 있었으니, 집무실에 방문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퍼즐을 힘겹게 한 손으로 받쳐 든 나는 집무실의 문에 노크했다.
“공작님.”
“…….”
“저 아펠리아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다시 노크하자, 문 너머에서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이딜로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화색을 띠며 서둘러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한 손에 받쳐 든 거대한 퍼즐이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이딜로스를 본다는 생각에 들떠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활짝 열린 집무실의 문으로 나는 퍼즐을 짊어지고 들어갔다. 그러곤 해맑게 말했다.
“공작님, 안녕하세요! 이것 좀 봐 주세요. 제가 뭘 가져왔냐면요……!”
신이 나 조잘거리며 그에게 커다란 퍼즐을 짜잔 보였다. 이딜로스는 내 손에 들린 퍼즐을 확인하더니 기가 찬 얼굴을 했다.
“내 집무실에 찾아온 이유가 그겁니까?”
“네! 삼촌이 주신 퍼즐이거든요. 공작저에 처음 온 날 선물 받은 거니 기념비적인 거예요.”
나는 이딜로스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며 퍼즐에 대해 떠들었다. 그에게 자랑을 하려니 신이 나 기분이 주체 되지가 않았다.
“사실 이건 제가 얼마 전부터 밤새워 가면서……!”
그때, 갑자기 발이 꼬였다.
하필 아래 시야가 퍼즐에 가려 확보되지 않았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철퍼덕.
얼마 전부터 밤새워 맞춘 그 퍼즐을 들고 그대로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