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공작님, 저긴 왜 저렇게 환한 건가요?”
오페라 하우스를 나와 마차를 타고 가던 길, 이딜로스는 아펠리아가 가리킨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성대한 불빛과 시끌벅적한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줄곧 혼자 종알대던 아펠리아도 이번만큼은 정말 궁금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어쩐지 마주하기가 힘들어, 이딜로스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한창 단풍이 물들 때이니 마을 곳곳에서 풍요를 반기는 축제가 열릴 시기로군요.”
“와아…….”
“아마 수도에 가면 이보다 더…….”
무심코 시선을 돌린 이딜로스는 기대로 반짝이는 한 쌍의 눈을 마주하곤 말을 멈췄다.
바다의 윤슬처럼 빛나는 눈이 말하고 있는 바는 명확했다. 결국 이딜로스는 가던 길을 멈추고 마차를 세웠다.
“사람이 아까보다 더 많아졌어요.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가 곳곳에 불빛도 많고…….”
아펠리아는 인파가 몰린 광장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기웃대었다.
그러다 혼자 신난 걸음으로 인파를 파헤쳐 들어가려고 하기에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곤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길 잃으려고?”
짧게 말을 툭 던진 이딜로스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아펠리아는 입을 다물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잘 붙잡으시죠.”
이딜로스는 붙잡고 있던 아펠리아의 손목에서 내려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몸도 허약하다는 여자가 이곳에서 길을 잃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 물정에 어두운데, 길을 잃으면 홀로 마을 사무소에 찾아가 미아 신고라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주소를 적은 목걸이라도 매달아 줘야 하나.
맞잡은 손을 바라보던 아펠리아가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작님이야말로 놓지 마세요.”
“난 딱히 사서 피곤한 일을 만드는 재주는 없습니다.”
아펠리아는 이딜로스를 슬쩍 째려보다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그러자 옆에서 픽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 소리가 시끄러워 그게 착각인지 아닌지 아펠리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펠리아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으려는 이딜로스를 끌고 빠른 걸음을 옮겼다.
그 탓에 이딜로스가 고집하는 자로 잰 듯한 정갈한 걸음걸이가 흐트러지겠지만,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놓지 말라던 건 이딜로스인걸.
그에 대한 괘씸함 하나로 척척 빠른 걸음을 옮기던 중, 끌려가던 이딜로스가 말했다.
“구경하고 싶다더니, 조깅이 목적이었습니까?”
“구경하고 있어요.”
“아닌 것 같은데.”
“시야가 넓어서 대충 둘러봐도 보이거든요.”
“그다지 신빙성이 없군요. 나처럼 눈높이가 높으면 모를까.”
아펠리아는 걸음을 멈췄다. 방금 분명 작다고 모욕한 것이 분명했다. 고양이일 때의 설움을 인간이 되어서도 느끼다니……!
아까부터 황궁에서 만났을 때처럼 말도 잘만 해 대는 걸 보니, 마멜라와 셋이 있을 때 그가 유독 말이 없던 건 다 고상한 척이었던 모양이다.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고 앙칼지게 뒤돌았다. 제 눈높이도 낮지 않다고 따지려 했다.
그러나, 마주한 이딜로스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본 아펠리아는 순간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이딜로스는 멈춰 선 그녀를 느릿하게 이끌었다. 그러곤 타이르는 투로 말을 덧붙였다.
“1년에 고작 며칠 열리는 축제입니다. 그러니 온 김에 질릴 때까지 눈에 담다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멜라에게나 들려줄 법한 목소리로 말하다니.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에게 걸음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친절해진 것 같잖아…….’
그 변화가 낯설어 적응하지 못했다. 서로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어쩌면 그녀의 정신뿐 아니라, 이딜로스의 정신까지도 헤집은 것일까. 그래서 그가 조금 이상해진 걸까.
정말 그런 거라면, 평생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맛있습니까?”
“네.”
한참 마을을 돌아다닌 아펠리아의 손에는 어느새 설탕 시럽을 묻힌 커다란 딸기 사탕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 어떤 꼬마가 먹으면서 가는 것을 빤히 바라봤더니 이딜로스가 사서 손에 쥐여 주었다. 아이가 먹던 걸 빼앗아 먹기라도 할 기세라며.
아펠리아는 이딜로스와 신기한 것투성이인 축제를 둘러보다 마을 모퉁이에 있는 벤치에 함께 앉았다. 그녀가 딸기 사탕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설탕 시럽이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진 것이 이유였다.
옆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이딜로스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아펠리아를 바라봤다.
“벌써 옷에 묻었습니다.”
“……제 의지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갑자기 다 망가진 걸 어떡해요. 딸기가 너무 큰 것도 문제예요. 제 주먹만 하다고요.”
아펠리아는 억울하게 제 주먹을 보였다. 그 손에는 이딜로스가 쥐여 준 손수건이 있었다. 새하얗던 손수건은 진작에 붉은색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이딜로스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동생보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아펠리아는 울컥했다. 자기도 이렇게 큰 딸기 사탕을 걸어가면서 먹으면 우르르 다 떨어트릴 거면서.
그녀는 먹고 있던 걸로 이딜로스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나저나 공작님이 이런 축제를 즐기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즐겼다기보단, 당신이 즐겼다고 하는 게 맞겠지.”
이딜로스를 째려본 아펠리아는 다시금 말을 정리해서 내뱉었다.
“공작님처럼 대단하신 분이 이런 서민적인 문화에 발을 들이실 줄은 몰랐다는 말이에요.”
최근 아펠리아는 인간들의 문물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마멜라의 방뿐만 아니라 저택의 서재까지 들려 온갖 서적을 정독하고 신문까지 살폈다.
그렇기에 인간들의 신분제와 그가 나라의 국고보다 더 막대한 자산을 지닌 대단한 인간이란 것 또한 알았다.
‘다 같은 인간이 신분이란 것을 두고 귀천을 가르는 것은 조금 이해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황위 계승권을 쥐고 있는 자이자 제국의 경제력을 책임진다고도 볼 수 있는 대귀족인 이딜로스가 천하다고 여겨질 법한 평민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의아했다.
이딜로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마을의 불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당신은 뭘 몰라도 너무 몰라.”
그가 날 때부터 서민층과 거리낌 없이 섞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을 리는 없었다.
뼛속까지 오만하고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자가 본래라면 내려다보지도 않을 평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전무했다.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불행히도 이딜로스는 예외에 해당했다.
그 예외란, 추락을 겪어 본 자를 의미했다.
날개가 뜯겨 추락한 자들은 별수 없이 천하다 여겼던 것에 섞여야 했고,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니 그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다시 우뚝 선 자는 혈통이 고귀하더라도 몸에 밴 성질이 남을 수밖에.
“앗.”
“……또 흘렸습니까?”
멍하니 이딜로스를 바라보던 아펠리아가 굳은 설탕 시럽 조각을 떨어트렸다. 어느새 딸기의 과즙이 막대를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다.
‘빨리 먹어 없애야지.’
아펠리아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이딜로스의 눈빛이 신경 쓰여 손수건을 들고 딸기를 빠르게 베어 먹었다. 그걸 지켜보는 이딜로스는 다람쥐가 도토리를 양 볼 가득 욱여넣는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후, 힘겹게 대왕 딸기를 다 먹은 아펠리아가 울긋불긋하게 물든 손수건을 내밀었다.
“저기…… 다시 돌려줘도 돼요?”
“…….”
이딜로스는 못 쓰게 되어 버린 손수건을 보곤 할 말을 잃었다. 이 꼴이 된 손수건을 돌려주고 싶나?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버리시던지.”
“네? 이걸 왜 버려요? 빨아서 쓰면 되잖아요.”
아펠리아는 더러워진 손수건을 고이 접어 챙겼다. 그 모습을 본 이딜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된 걸 빨아 쓴단 겁니까?”
“네. 아낄 줄 모르시네요.”
아펠리아는 말이 나온 김에 그의 못된 습관 이것저것을 불만처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까 콘 수프를 먹었을 때나 평소 식사할 때 그가 절반 이상을 남길 때가 있고, 한 번 쓴 손수건을 버린다거나 잉크도 다 쓰지 않았는데 그대로 버린다느니 평소 그가 아끼지 않는 것들을 똑똑히 이야기했다.
이딜로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지만, 둑처럼 터진 아펠리아의 말은 멈출 줄 몰랐다. 그녀는 버려지는 게 아까워 그 맛없던 사료도 꾸역꾸역 먹었는데 말이다.
말을 멈출 때가 되어서야 아펠리아는 이딜로스의 딱딱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끝났습니까?”
“제가 꼭 비난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간 낭비한 것은 사실이니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딜로스의 눈가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내가 집무실에서 잉크를 다 쓰지도 않고 버리는 건 어떻게 알지?”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아펠리아는 굳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그의 집무실을 방문한 적이 없으니 고양이로 본 게 다였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설명하지?
이딜로스는 의심이 담긴 눈초리로 그녀를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셀이 그런 것까지 이야기합니까? 내가 잉크도 낭비하는 놈이라고?”
“아…….”
하마터면 안도의 숨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녀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데 이딜로스가 입매를 비틀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내 사생활까지 줄줄 발설하고 다니다니. 정말 잘려야 정신을 차릴 셈인가 보군.”
아펠리아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 쳤다.
“아니, 아니에요!”
“뭐가 아니란 겁니까.”
“삼촌이 말해 주신 게 아니라……. 사실 제가 고양이랑 대, 대화를 할 수 있거든요!”
“…….”
“그래서, 아릴한테 들은 거예요…….”
자신이 말했지만 너무나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아펠리아의 시선이 점점 그의 시선을 피해 옆으로 이동했다. 이딜로스는 분명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녀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던 이딜로스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아릴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네…….”
“그럼 말해 보시죠. 아릴이 나에 대해 한 말은 더 없는지.”
어디까지 헛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겠다는 투였다. 죄목을 캐묻는 듯한 취조 분위기에 아펠리아는 금세 기가 죽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었어요.”
“뭐라고.”
“……이딜로스가 좋다고.”
그녀가 힘겹게 꺼낸 말에 어째선지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아펠리아가 흘끔 시선을 들어 올리자, 당혹감이 섞여 든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딜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곧 그가 희미하게 끌어 올린 입꼬리로 웃음을 짤막하게 흘렸다. 그 역시 당혹감이 역력하게 묻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