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그 어설픈 신호를 본 순간 아펠리아는 깨달았다. 이건 분명 마멜라와 안셀이 짜고 벌이는 일이라는 걸.
아펠리아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들의 정성은 무척 고마웠지만, 지금 아펠리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딜로스의 상태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기 때문에.
‘그래도 이딜로스는 마멜라를 떨어트리려 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사실 오페라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될 거야.’
이 일에 있어선 그녀도 이딜로스와 제법 죽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으로 들려오는 낮은 대답에 아펠리아는 귀를 의심했다.
“알았어.”
아펠리아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고개를 들었다. 가짜 이딜로스인가?
아펠리아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있던 그의 옆모습으로부터 진심이 담긴 차분한 시선만 엿볼 수 있었다.
이딜로스는 안셀에게 말했다.
“마멜라를 잘 데리고 있어라. 아마 우리보다 네 일이 먼저 끝날 테니, 일을 마치면 마멜라를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우리라니. 그가 안셀에게 경고하는 것을 듣던 아펠리아는 정말로 그가 자신과 오페라를 보는 것을 선택했다는 걸 실감하곤 경악스러워졌다.
대체 왜?
온종일 그녀와의 접촉도 꺼리고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던 그였다. 이딜로스의 변덕스러운 사고를 따라가기가 어려워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을 남기기 위한 계책을 펼친 마멜라도 이딜로스가 이리도 흔쾌히 허락할 줄은 몰라 잠시 놀랐다. 그러나 곧, 횡재한 마음으로 그가 생각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오라버니! 언니도 오페라 잘 보고 와요.”
안셀과 함께, 서로 시답잖은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던 아펠리아는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줄곧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금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말없이 가만히 아펠리아를 응시하던 이딜로스가 느릿하게 팔을 내밀었다.
“가도록 하죠.”
아펠리아가 머뭇거리다 그의 팔에 손을 얹자, 이딜로스는 정말로 그녀를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그러는 새에 아펠리아는 오페라를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자고 할까, 수십 번도 넘게 고민했다. 쉽게 결정을 내리기엔 아무래도 선택지의 경쟁이 너무 쟁쟁했다.
한쪽을 고르자니 이딜로스의 상태가 걸렸고, 다른 한쪽을 고르자니 안셀과 마멜라의 노력이 걸렸다.
특히 제 직장을 걸고 상사에게 거짓말을 했을 안셀의 희생이.
생각이 종지부를 찍을 때쯤엔 어느새 박스석의 푹신한 의자에 앉고 있었다.
아펠리아가 막 마음을 정하고, 지금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던 차였다.
이딜로스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아펠리아 양.”
“네?”
그가 먼저 제 이름을 부를 줄은 몰랐던 아펠리아는 잠시 놀랐다.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른 걸까. 역시 그도 피로에 못 이겨 돌아가자고 하려는 걸까.
그러나 다음 말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이딜로스는 어려운 말이라도 하려는 건지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길 반복했다.
다행히 오페라는 아직 막이 오르기 전이었고, 아펠리아는 그를 기다리며 응시하다가 어느새 연홍색의 말랑해 보이는 그의 입술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끌지 말고 어서 말하라는 눈빛이군.”
아펠리아가 멍하니 바라보던 것을 재촉의 눈길로 받아들인 이딜로스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의도가 없던 아펠리아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었다.
이딜로스는 그런 그녀를 보다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요?”
그렇게나 망설였음에도, 결국 입 밖에 내려니 어쩔 수 없는 머뭇거림이 따라붙었다.
이딜로스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꺼내 본 적 없는 말을 꺼내었다.
“마멜라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합니다.”
이딜로스는 말하자마자 실언하기라도 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가장 아껴 마지않는 여동생을 부탁한다는 건, 정말로 이 여자를 믿고 맡긴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를 망설였던 건, 여자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던 것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여동생의 친구를 부탁할 정도로 그녀를 신뢰한다는 걸 드러내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더 컸다.
그 짧은 새에, 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여자를 이토록 신뢰하게 된 것이다.
머리 어딘가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고작 서류와 문서 쪼가리로 접한 그녀의 가정사와 배경 따위는 신뢰하고 말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설령 그래 봤다 한들, 아주 조금일까.
만약 은사의 딸이자 측근의 조카로 소개받은 자가 이 여자가 아닌, 다른 이였더라면 이런 부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모든 배경이 상관없을 정도로 그저 이 여자를. 그녀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이다.
이딜로스는 막막한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타인을 제 선에 들이기까지는 분명 긴긴 시간이 거듭되어 걸리는 그인데.
이딜로스는 줄곧 그녀의 앞에만 서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여자는 의아함을 담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곤 새하얀 눈 위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밝게 웃었다.
“전 이미 마멜라와 둘도 없는 친구인걸요.”
한순간 이딜로스의 뭔가가 덜컥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이고 어디에서 온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것이 고장 나는 소리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이상했다.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몰아치는 혼란 속에서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시선을 거두어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딜로스는 결국 그 눈부신 웃음에 넋을 빼앗겼다.
눈이 고장 나기라도 한 건가. 아니, 마음이 고장 난 것 같다.
때마침 어두워지며 시작된 웅장한 선율과 무대에서 걷혀 올라가는 붉은 암막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아마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딜로스가 잇새를 물며 무대로 시선을 돌리자 아펠리아도 따라 밝은 무대를 바라봤다.
‘이딜로스가 나를 마멜라의 친구로 인정해 주고 싶었던 거였어.’
아펠리아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마멜라와 대화할 때부터인가 표정이 좋지 못하기에 신경 쓰였던 것인데, 어서 마멜라에게 달려가 알려 주고 싶었다.
오페라가 시작되자 아펠리아는 입까지 벌리고 노래하며 연기하는 인간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중후반부에 치달아서는 남녀가 갑자기 부둥켜안고 입을 맞대었다.
아펠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 옆에 앉은 이딜로스에게는 상세히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아마 그라면 보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아펠리아의 월등한 시력으로는 맞붙은 남녀의 입술이 문대어 비벼지는 것까지 똑똑히 보였다.
아펠리아는 슬그머니 눈가를 찡그렸다.
조금 전까지 친근해 보이던 인간 두 명이 갑자기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문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종끼리 먹으려 들다니.
‘잔인해…….’
무서워서 움츠리던 아펠리아는 흘긋 옆을 바라봤다. 반대쪽 팔걸이에 비스듬히 턱을 괸 이딜로스의 눈에는 대놓고 흥미가 없는 것이 드러났다.
아펠리아는 그를 힐끔댔다. 한 번 그에게 신경을 기울였더니 오페라는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되었다.
아펠리아의 머릿속에 자꾸만, 지금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방법, 두 번째. 가벼운 스킨십.
‘어떻게 접촉하지?’
고민하던 중, 이딜로스가 제 쪽의 팔걸이에 가지런히 올려 둔 손이 보였다.
순간 아펠리아는 오늘 마차에서 내릴 때 이딜로스가 손을 대충 잡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잠시 망설였으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펠리아는 당당하게 팔을 들어 이딜로스의 팔 옆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딜로스가 뭐냐는 듯 아펠리아를 바라봤다.
아펠리아는 태연한 척 오페라에 열중하는 것처럼 시선을 한시도 무대에서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딜로스도 옆으로 팔만 조금 옮겨 자리를 살짝 내어 주곤 다시 감흥 없는 표정으로 오페라를 관람했다.
‘별다른 반응이 없네?’
아펠리아는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이딜로스가 스킨십 조금 성공했다고 갑자기 뿌리부터 바뀐다면 그거야말로 신기함을 넘어 이상한 일이겠지만.
별 소득 없이 다시금 팔을 내리려는데, 불현듯 아펠리아의 시선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그의 무방비한 손에 닿았다.
‘더 과감히 접촉해야 하는 걸까?’
아펠리아는 몸을 등받이에 푹 기댄 상태로 손을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닿는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이게 뭐라고 긴장까지 되어 오페라의 음악조차 귀에 들리지 않았다.
“…….”
마침내 이딜로스의 손등에 제 손등이 스치듯 맞닿았다. 아펠리아는 부리나케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살갗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이 간질거리듯이 전해져 왔다. 분명 그와 맞닿는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이딜로스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펠리아는 조금 더 용기 내어 그의 손등에 제 손등을 맞붙였다. 전기가 닿은 것처럼 저릿했다.
어느새 그녀의 심장은 오페라 극장을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뛰고 있었다.
그에게 조금 더 손등을 기울였다.
이딜로스는 오페라 무대에서 시선만 옆으로 흘겨 맞닿은 손등을 바라봤다.
손을 살짝 옆으로 피했더니 쫓아온다.
이 여자는 분명 오페라에 눈이 팔린 것 같은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 욕심이라도 있는 건가.
맞닿은 곳이 신경 쓰여 오페라에서 뭘 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이딜로스가 손을 움직였다.
“……?”
아펠리아는 갑작스레 팔걸이에서 내려간 그의 팔을 바라봤다. 다시 올리지 않겠다는 의지인 건지 그는 두 팔 모두 내리고 아래에서 손깍지까지 끼고 있었다.
……계획에 실패했다.
호감은커녕 비호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펠리아는 허탈했다.
차라리 처음 실패했을 때 떨어질걸. 괜히 더 문질러선 완곡한 거절의 의사까지 보고 말았다.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방법은 무슨…….
도리어 그녀가 그에게 느끼는 호감만 높이는 방법이었다. 아펠리아는 집으로 돌아가면 노트에 메모해 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방법’의 두 번째 항목은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재미있었어요.”
아펠리아는 웃으면서 극장을 나오자마자 이딜로스에게 조잘거렸다. 두 번째 방법은 포기했지만, 아직 나머지 방법이 있지 않던가.
그중 첫 번째와 세 번째. 웃어 주기와 먼저 말 걸기였다.
“다행이군요.”
의례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오페라를 관람하기 전보다 더 딱딱한 어투였지만 아펠리아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특히 서로 잡아먹으려 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어요. 분명 화목해 보였는데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다시 사이가 좋아진 걸 보면 싸우면서 정든다는 게 맞나 봐요.”
……서로 잡아먹으려 했다고?
이딜로스가 따분한 공연을 꾹꾹 참아 가며 보았지만 그런 장면은 없었다.
혹시 맞닿은 손등에 정신이 쏠린 새에 그런 장면이 나오기라도 했던 건가. 모르는 장면이라 뭐라 맞받아쳐 줘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아펠리아가 이번엔 다른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눈빛은 분명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는데, 정작 이딜로스가 대답을 생각하는 동안 아펠리아는 계속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버렸다.
대답을 생각 중이니 잠시 기다려 달라 할 수도 없고…….
마멜라보다 말이 많은 사람은 처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