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이딜로스는 황당함을 숨기곤 적당한 대답을 찾았다.
“괜찮아. 조금 피로가 쌓여서.”
이만한 대답이 없었다.
비록 여동생이 약간의 미안함 정도는 갖게 되겠지만…… 사실 그는 나가기도 전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 놀아 주다가 피로하다는 걸 핑계로 다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계획은 얼마나 완벽한가.
마멜라와의 외출은 그에게 있어 몇 안 되는 기꺼워하는 것 중 하나였으나, 아펠리아 때문에 그는 오랜만의 여동생과의 외출에도 마냥 기쁘지 못했다.
“와아.”
마차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맞은편에서 창문과 하나가 될 기세로 바짝 달라붙어 눈을 반짝이는 여자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창밖이 뭐가 신기하지? 시골 촌뜨기도 저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시답잖게 시비나 걸고 싶은 옹졸한 마음이 들자 이딜로스는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옆에서 마멜라가 아펠리아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언니, 늘 신전에서만 지내다가 왔다고 했죠? 밖은 어때요?”
타이밍 좋게 그의 지난 기억을 상기시켜 주는 마멜라의 말에 이딜로스는 입 안으로 탄식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가. 안셀이 말해 준 아펠리아의 허약한 체질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사이 아펠리아는 순수하게 눈을 빛내며 바깥 이곳저곳을 손짓하고 있었다.
“너무 신기해. 아기자기한 집들이 서로 붙어 있어. 아, 꼬마도 있네. 와, 저기 사람들 싸우나 봐!”
별걸 다 신기해하는 아펠리아의 모습에 마멜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딜로스도 어느새 아펠리아의 들뜬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고 있었다.
신전에서만 지냈다니. 그렇기에 저리도 세상 물정을 모르고 명랑하게 구는 걸까.
애초에 얼마나 세상일에 눈이 어두우면, 제국민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카델라로트 공작의 일에 대해서도 순진하게 군단 말인가.
“마멜라, 저기 좀 봐. 엄청 큰 분수야.”
아펠리아의 해맑은 목소리가 마차 가득 퍼졌다. 그 새처럼 지저귀는 맑은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시끄럽다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저보다 조용한 안셀의 목소리는 몸서리 칠 정도로 따분하고 시끄럽기만 한데…….
이 목소리는 왜 이리 듣기가 좋을까.
이딜로스는 자꾸만 아펠리아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재차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
“아릴도 함께 온다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조잘대던 여동생과 아펠리아의 대화가 뚝 끊겼다.
그 부자연스러움에 의문이 들려는 찰나, 마멜라가 소리치듯 말했다.
“아릴이는 요나 옆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거예요!”
“요즘 잠이 많아진 모양이군.”
마멜라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딜로스는 그 기미를 눈치챘지만, 그저 마멜라도 아릴을 데려오지 못해 아쉬워 흘리는 웃음이라 생각했다.
그 아릴이 맞은편에 있는 여자라는 걸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이딜로스는 최근 도통 집무실을 찾아오지 않는 아릴을 떠올렸다. 늘 일할 때면 옆에 있던 아릴이 없으니 심기가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기껏 아릴을 찾아 마멜라에게 가면, 여동생은 늘 아릴이 낮잠을 자고 있다고 했다.
한 번은 햇볕이 드는 창가에서, 또 어떤 날은 폭신한 쿠션 위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어두운 침대 밑에서.
가을이 끝나면 겨울이 찾아오기 마련이다만, 고양이도 겨울잠을 자나?
꼭 그 준비 과정처럼 부쩍 잠이 많아진 아릴을 떠올리면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에서 잠드는 걸 그렇게나 좋아하더니 이젠 자주 오지도 않는다는 섭섭함도 들었다.
이딜로스가 고양이를 생각하며 입을 다문 사이, 아펠리아와 마멜라는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아펠리아는 어색해진 이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말을 끌어냈다.
“그런데 마멜라.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파르페를 먹으러 갈 거예요.”
마멜라가 기쁘게 화답했다. 아펠리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파르페가 뭐지?
이름만 들으면 로열 궁전이나 공작새의 깃털이 꽂힌 화려한 모자 이름 같았다. 그런데 먹는다니, 파르페라는 건 음식의 이름인 듯했다.
그런 아펠리아의 반응을 잘도 눈치챈 마멜라가 설명했다.
“유리컵에 담은 아이스크림 위에 시럽이나 과자, 과일 같은 걸 곁들인 디저트예요.”
아이스크림?
아펠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건 한 번도 먹어 보지 않아 어떤 맛인지 몰랐지만, 책 속의 주인공인 꼬마 루루가 먹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기대와 설렘으로 부푼 상상을 하는 아펠리아에게 이딜로스는 대뜸 찬물을 부었다.
“루나뜨로트의 케이크가 더 맛있을 텐데.”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지만, 눈빛과 말투는 어쩐지 퉁명스러웠다. 마멜라는 시종일관 관심 없는 척하는 이딜로스를 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루나뜨의 디저트는 너무 자주 먹어요. 디저트 중에서 맛에 견줄 데가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자주 먹으면 아무리 훌륭해도 질리게 되어 있다고요.”
이딜로스는 황당한 마음에 창가에서 시선을 뗐다. 마멜라는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멜라의 말에 어디 하나 틀린 게 없기는 했다.
세계적인 디저트 브랜드 주인의 여동생이니만큼 매번 수백 가지 종류의 디저트를 돌아가며 먹는 마멜라였다. 그러니 그만큼 다양한 맛을 맛보는데, 그게 질려?
이딜로스의 황당한 속도 모르고 마멜라는 그를 따라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루나뜨엔 파르페를 팔지 않잖아요.”
“……파르페 맛있는 곳은 알고?”
“당연하죠. 신문에서 봤는걸요. 엘 리우스트의 콘스프로드에 커다란 파르페 가게가 생겼는데, 맛이 구름을 걷는 것 같다고 했어요.”
이딜로스는 여동생의 고집 가득한 얼굴을 보다가 별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의 손이 마멜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알았어, 가자.”
마음이 절로 따뜻해지는 훈훈한 남매의 모습을 보던 아펠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드는 이딜로스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이딜로스는 해사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일렁거리는데, 여자는 시선이 마주치자 좀 더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혼을 잡아 빼기라도 할 것처럼.
곧바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계속 봤다간 꼭 홀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일부러 피로에 지친 척 눈을 감았다.
아직 파르페는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멜라가 말한 그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대체 뭐지, 이건.
‘효과가 없는데…….’
한편, 이딜로스가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고 눈까지 감아 버리는 것을 본 아펠리아는 허망해졌다.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법, 그 첫 번째가 바로 웃어 주기였다. 그러나 그의 반응을 보니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 도리어 꼴불견으로 찍힌 것 같았다.
‘철판 같은 인간…….’
아펠리아는 이딜로스의 눈이 굳게 닫혀 있는 틈을 타 그를 앙칼지게 째려봤다. 새삼 자신이 고양이일 때 그를 함락시켰던 것이 신기해졌다.
마멜라가 말한 엘 리우스트의 콘스프로드에 마차가 서자 아펠리아에겐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먼저 내린 이딜로스가 마멜라를 내려 주고 아펠리아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호감을 사는 법 두 번째가 바로 가벼운 스킨십이었다. 살짝의 터치로 온기를 공유하면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지고 호감이 올라간다고 했었다.
아펠리아는 기대 가득한 눈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며 제 손을 건넸다.
그리고 곧, 아펠리아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 왔다.
이딜로스가 아펠리아의 손 끄트머리만 슬쩍 잡고는 대충 내팽개치듯이 그녀를 내려 준 것이다.
황궁에서 받았던 에스코트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아펠리아는 마멜라를 데리고 먼저 걸어가 버리는 이딜로스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왜 저렇게 태도가 바뀐 거지?’
분명 황궁에서는 지금보다 까칠하고 무례하긴 했어도 그녀를 붙잡는 데 있어선 놓치지 않을 기세로 꽉 움켜쥐었었다.
그뿐인가, 아주 떨어지지 않을 작정으로 바짝 밀착해 오기까지. 지금과는 딴판인 태도가 아니었던가.
그들을 따라가던 아펠리아의 불만은 곧 다른 곳으로 관심이 쏠리면서 흩어졌다.
아펠리아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날아들었다. 공기 중의 냄새를 맡던 아펠리아가 제 손을 붙잡은 마멜라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콘 수프냄새예요.”
“콘 수프……?”
아펠리아가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마멜라가 웃으며 재밌는 걸 알려 주겠다 했다.
여긴 카델라로트령의 최대 상업 중심지, 엘 리우스트.
이 거리는 콘 수프가 맛있기로 유명해 곳곳에 콘 수프와 빠네를 파는 곳이 많았고, 그 탓에 거리 이름도 콘스프로드가 되었다고 한다.
이딜로스는 이런 잔 지식에 빠삭한 마멜라의 말을 들으며 지금 들어도 어이없게 지어진 명칭이라고 감흥 없이 생각했다.
아펠리아는 마멜라의 말 하나하나를 메모지에 받아 적을 기세로 열심히 들었다. 주인의 말에 꼬리를 흔들며 귀 기울이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이따가 먹어 볼까요?”
“응, 응!”
“오라버니, 괜찮죠?”
이딜로스는 눈을 빛내는 아펠리아를 흘깃 보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실은 마차에서 파르페를 먹으러 간다길래, 그것만 먹고 돌아가자고 할 셈이었다.
그가 정리한 계획에 틀어지게 되었지만…….
이딜로스의 시선이 아펠리아의 활짝 핀 얼굴에 닿았다.
계획이 조금 바뀐다 해서 그다지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파르페와 콘 수프만 먹고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는 다시 한번 머릿속의 계획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