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아옹?”
나는 당혹감이 드러날까 싶어 그의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하기를 택했다.
턱을 간지럽히던 이딜로스의 손을 붙잡아 앞발로 장난을 쳤다. 순진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앞발로 누르자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대뜸 이딜로스의 두 손이 나를 붙잡았다. 그에게 홱 붙잡혀 올라간 나는 이딜로스의 품에 안착했다.
아기를 다루듯 나를 받쳐 안은 이딜로스가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며 말했다.
“나는 괴롭혀도 좋지만, 손님께는 그러지 마.”
“…….”
굉장히 의외의 말이 들렸기에 나는 의심으로 뒤덮인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손님께는 그러지 말라니. 여태 행동으로 보면 손님을 내쫓고 와, 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지 않나.
“그 영애가 널 못살게 굴지는 않겠지.”
“아옹.”
하지만 날 안 좋게 보는 건 여전한 것 같았다. 어쩐지 저 말이 예전에 날 납치하려 했던 황후 정도의 취급인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나빴다.
나는 누구처럼 동물에게 마구잡이로 불편한 옷을 입혀 인형 놀이를 하지도 않고, 누구처럼 동물이 다가가기만 해도 기겁해서 물러나지도 않는데.
내 표정이 뚱한 걸 알아차린 건지 그가 웃음을 띤 채 느긋하게 물었다.
“그래, 그럼 너한테 잘해 주던가?”
“…….”
아펠리아에 대해서는 마멜라에게 물을 것이지, 왜 자꾸 나한테 꼬치꼬치 캐묻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대답할 길이 없어 핑계처럼 이딜로스의 보드라운 재질의 재킷을 핥아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의 옷을 핥고 나니 혓바닥에 내 털이 딸려 왔다.
내 몸을 핥은 것도 아니고, 이딜로스의 옷을 핥은 건데…….
“정리해 주는 건가?”
내가 하는 양을 신기하게 구경하던 이딜로스의 입매가 양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이내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갑작스레 나를 뭉개 버릴 기세로 끌어당겼다.
꼭 마멜라가 나를 예뻐할 때 하는 무지막지한 행동이라, 나는 놀라 굳었다. 이딜로스가 이런 안셀이나 마멜라 같은 행동을 할 줄은 몰랐던 거다.
이딜로스는 민망스러운 말을 간드러지게 내뱉었다.
“이렇게 귀여워서 어쩌지.”
“…….”
“너무 사랑스러워도 곤란한데.”
그는 내 온기를 느끼고 싶은 것처럼 내 털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등을 문질렀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겨든 털이 헝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딜로스는 잔잔한 눈길과 손길로 나에게 간지러운 애정을 쏟으며 입을 열었다.
“아릴. 난 타인이 늘면 불안해. 내 세상을 침범할까 봐.”
지금도 그래.
느릿하게 말을 덧붙인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그가 한 말의 저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딜로스는 평소처럼 고양이를 상대로 곧잘 혼잣말했다.
“마멜라가 그 영애를 내 생각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 같던데.”
“…….”
줄곧 균형을 유지하던 이딜로스의 입매가 잠시간 한쪽으로 비틀렸다.
“선생님의 따님이라니. 믿을 만한 자였다는 게 다행인지.”
……뭐야, 내가 적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네.
그럼 날 볼 때마다 인상을 찡그려 대고 시선을 피하던 건 뭐 때문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그냥 나라는 존재가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길 바라며 그를 올려다봤으나 이딜로스는 내가 원하는 말 대신, 딴소리만 실컷 늘어놓았다.
“마멜라가 너와 놀아 주지 않고 그 영애와만 놀려거든 언제든 나한테로 와, 알았지.”
“……아옹.”
“아까 같은 애교도 부리면 더 좋고.”
다시금 나를 내려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는 이딜로스를 쳐다봤다.
이딜로스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상당히 말이 많아지는 편인데, 그중에서 헛소리가 많은 걸 보면 그간 남과 있을 때는 입이 근질거려 어떻게 참았나 싶었다.
‘내가 어울려 줘야지 뭐.’
생각해 보면 이 인간도 은근 짠하단 말이지. 말 상대가 얼마나 없었으면 나한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해 대겠는가.
나는 이딜로스를 애잔하게 바라보며 털을 간지럽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뭔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댄 순간 집무실의 문이 쾅 열렸다. 찰나에 내 등을 받친 팔에 움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이딜로스도 놀라 흠칫한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집무실의 잔잔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오라버니!”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해맑게 다가왔다.
나는 마멜라를 알아보자마자 이딜로스의 손을 쳐 내고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아옹!”
반가움에 몸을 배배 꼬듯 마멜라의 다리를 감싸 머리를 문질렀다. 마멜라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릴이 오라버니랑 놀고 있었어?”
마멜라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나는 그녀의 품에서 한껏 기분 좋게 가르릉대다가 뒤늦게 덩그러니 남은 이딜로스를 발견했다.
이딜로스는 내가 쳐 낸 손을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별안간 드는 생각에 이딜로스의 낯빛을 살폈다.
‘설마 내가 갑자기 때려서 놀란 건가? 겁먹어서 굳은 건 아니겠지?’
이상하게도 가라앉은 그의 표정 탓에 걱정이 들었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리곤 우리를 바라봤다.
“마멜라. 노크도 없이 이렇게 벌컥 문을 열어선 안 되지.”
그의 목소리가 왠지 퉁명스럽게 느껴졌다. 꼭 삐진 사람처럼 이딜로스는 마멜라를 바라보다가 나를 슬쩍 째려봤다.
하지만 그건 다 착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표정은 금세 다정하게 뒤바뀌어 마멜라에게 향했다.
‘마멜라가 오니까 난 안중에도 없는 것 좀 봐.’
그런데…… 아직 이딜로스와 제대로 화해도 안 한 마멜라가 직접 그의 집무실에 찾아오다니, 의외였다.
지난번 식사 때부터 줄곧 나를 대화 소재 삼아 이딜로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더니, 다시 서서히 사이를 회복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딜로스도 그런 마멜라를 조금 의아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서먹한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지 자연스레 그녀에게 맞추어 주었다.
‘다행이야. 이제 서로 사이가 예전 같아지면 나까지 합세해서 완벽한 가족이 될 수 있겠다!’
나는 언제 어색했냐는 듯 평소처럼 대하기 시작하는 그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마멜라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아릴이도 데려갈 겸 오라버니께 허락을 구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왔어요.”
“허락?”
이딜로스가 느릿한 어조로 되물었다.
마멜라는 내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펠리아 언니한테 저희 영지를 구경시켜 주고 싶어요. 나가게 해 주세요.”
마멜라의 입에서 내 인간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영지 구경이라니. 저택 밖을 제대로 구경해 본 적도 없으니 그래 준다면 나야 즐겁고 고맙지만…….
‘그런 걸 이딜로스가 허락해 줄 리가.’
우리 둘이서 밖을 나가다니. 이딜로스는 마멜라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친구 한 명 붙여 주지 않는 것 같던데. 그런 깐깐한 이딜로스가 허락을 해 준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해가 반대편에서 뜬 것일 터다.
“안 돼.”
역시나 칼같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단호박을 오백 개 정도 먹은 것 같은 목소리에 나는 의아하게 마멜라를 올려다봤다.
‘거절당할 거란 걸 똑똑한 마멜라가 모를 리가 없는데, 왜 무리한 요구를 한 거야?’
그러나 잠시 후, 이딜로스는 자기가 무심코 내뱉은 단호한 거절에 위화감을 느낀 건지 당황한 투로 덧붙여 말했다.
“마멜라, 내가 왜 안 된다고 하냐면 일단 넌 아직 학교에 입학할 나이도 안 된 열두 살인 데다…….”
이딜로스가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안셀이 조카 이야기를 했을 때 거절하고 마멜라에게 쓴소리를 들었던 것에 대한 후유증이 남은 모양이었다.
마멜라는 이딜로스의 꼬리에 꼬리를 문 긴긴 설득을 듣더니 그의 긴말을 단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위험해서 안 된다는 거죠?”
“그래, 호위를 열을 붙이고 스무 명을 붙여도 내가 불안해서 안 돼.”
눈썹을 까딱인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린 순간, 마멜라의 표정이 음울하게 변했다.
애가 이렇게까지 원하는데 끝까지 허락 한 번 해 주지 않는 이딜로스가 매정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딜로스를 살짝 째려보곤, 풀 죽은 마멜라를 다독이듯 팔을 토닥였다.
그러다 나를 내려다보는 마멜라의 눈이 묘하게 웃음 짓고 있는 걸 발견했다.
……뭐지?
마멜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전 아펠리아 언니랑 같이 나가고 싶어요…….”
“마멜라, 그러지 말고 둘이서 화원을 구경하는 건 어때? 아직 3호 화원은 다 못 보여 줬을 거 같은데.”
이딜로스가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마멜라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채 나만 보이도록 악동 같은 웃음기를 걸치고 있던 마멜라가 다시금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표정과 달리 유독 또랑또랑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되는 거라면 오라버니도 함께 가면 되잖아요.”
“……나도 같이?”
이딜로스는 순간 상대가 마멜라라는 것도 잊은 듯 미간을 좁혔다.
아마 제 귀를 의심하는 것이리라. 나도 순간 마멜라의 말에 내 귀가 잘못됐나 싶었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불현듯 지난번 마멜라가 나와 이딜로스가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한 것이 떠올랐다.
‘설마…….’
마멜라는 묘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네. 오라버니도 같이. 셋이서요.”
* * *
“……아,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 아펠리아는 챙 모자의 끄트머리에 들어온 공작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곧 미간을 풀곤 마주 인사를 해 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필 단둘이라니.
아펠리아는 자신을 싫어하는 이 남자와 대화도 없이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마멜라는 언제 내려오는 걸까. 그녀의 울상 섞인 눈빛이 하염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말을 걸어 볼까?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게 호감을 얻기에 좋다고 했는데.’
아펠리아는 여전히 계단에 시선을 둔 채 그간 마멜라의 책에서 읽었던 것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떠올렸다.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방법, 세 가지를 말이다.
그러나 흘긋 옆을 바라본 순간, 냉소적인 시선과 눈이 마주쳐 곧바로 고개를 정면으로 복귀해 버렸다.
저렇게 노려보고 있었다니, 등골이 섬찟했다.
‘……기분이 안 좋은가 봐. 이따가 해 보자.’
지금은 이 자리를 만든 마멜라가 빨리 내려오길 바라며 조용히 있는 게 가장 미움을 사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이딜로스는 여동생을 기다리며 아펠리아를 신경 쓰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긴장을 늦출 때마다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문득 이렇게까지 안간힘 써 가며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뭔가 싶었다.
그래서 그냥 대놓고 보기로 했다.
대체 뭐 때문에 시선이 향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필요한 만큼 보고 나면 질려서 더는 찾아보지도 않겠거니 싶었다.
그 못지않게 불편한 것인지 계단만 뚫어지게 보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푸른 천으로 리본이 묶인 하얀 챙 모자. 늘 그렇듯 한 번쯤 손끝에 감아 보고 싶은 백합 같은 머리칼.
카라 밑 짙푸른 리본이 달린 흰색 셔링 블라우스. 아래로 단정하게 주름 잡혀 떨어지는, 마찬가지로 짙푸른 치마.
평소라면 명랑함으로 그쳤을 텐데, 오늘은 또 묘하게 차분한 분위기가 들어 그 원인을 찾아 다시금 천천히 눈에 담았다.
불현듯 제 팔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놀라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언제 온 것인지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는 마멜라의 얼굴이 보였다.
놀라기도 잠시, 그는 조금 황당함에 휩싸였다.
여동생을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온 줄조차 몰랐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