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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77화 (67/191)

77화

옆에서 이딜로스의 시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환청처럼 한숨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딜로스가 핀잔을 주기 전에 서둘러 손을 내리고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갑자기 손에 힘이 빠져서요…….”

이럴 때면 아펠리아의 허약하다는 배경이 써먹기 좋았다.

손에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가련한 표정을 짓자 마멜라가 잘하고 있다며 긍정의 눈빛을 보내어 왔다.

다만 이딜로스는 아무런 반응 없이 내 손을 바라봤다. 부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길 바랐지만, 그는 곧 내 기대를 무참히 박살 냈다.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네?”

이딜로스가 뭐라고 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손을 뻗어 내 접시를 끌고 갔다. 이내 그는 아주 손쉽게 내 고기를 썰어 주기 시작했다.

줄곧 이딜로스 쪽을 보지도 않고 있던 마멜라는 흥미로 점철된 시선으로 나와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마멜라의 눈빛이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서서히 반짝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이딜로스의 배려에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공작님, 전 괜찮아요…….”

“내가 시끄러운 게 싫어 그렇습니다. 또 무슨 요란을 부릴 줄 알고.”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이도 저도 못 한 채 그의 나이프에 잘 익은 고기가 부드럽게 썰려 나가는 것을 바라봤다.

잠깐 새에 다시금 그릇이 내 앞으로 돌아왔다. 나는 잘린 고기가 자로 잰 듯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믿기 힘든 광경을 보면서 얼떨떨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이딜로스의 배려로 수월하게 식사를 마친 나는 식후 차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딜로스와 마멜라의 앞에 있는 건 홍차인데, 어째선지 내 찻잔에만 갈색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색의 차에, 경계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달콤한 향기가 올라와 나도 모르게 탐색하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킁킁대었더니 양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들자 맞은편에는 나를 보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키득키득 짓고 있는 마멜라가, 옆에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이딜로스가 있었다.

‘안 돼, 굉장히 없어 보였을 거야.’

나는 인간들의 문물에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최대한 담담한 척 굴었다.

평소 누구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분명 생소한 차인 거겠지.

“이게 뭔가요?”

“……코코아입니다.”

“아하, 코코아. 이름이 되게 독특하네요. 공작저에는 이런 특이한 차도 있고, 정말 신기한 게 많은 것 같아요.”

내가 해맑게 웃음 지으며 말하자 이딜로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미소 지은 채로 갸웃했더니 이딜로스는 시선을 비끼듯 피해 버렸다.

옆으로 보이는 그의 턱선에서 내게 시선을 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여 의문만 피어났다.

‘……아까부터 왜 저래. 내가 꼴 보기 싫다는 건가?’

그때 마멜라가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살며시 깨물다가 말했다.

“언니, 어서 한번 마셔 봐요. 초콜릿을 녹여서 우유와 섞어 만든 건데 굉장히 달콤하고 부드러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따끈한 온기가 느껴지는 차를 호호 불다가 천천히 마셨다.

코코아가 혀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와아 하는 감탄을 흘렸다.

‘맛있어…….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나는 황홀한 달콤함에 감동하며 고개를 들었다. 입 안에 초콜릿의 달콤한 여운이 감돌아 온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걸 놔두고 왜 이딜로스는 늘 그 쓰기만 한 홍차를 마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코코아를 마시고는 물었다.

“그런데 왜 저만 코코아인가요?”

이딜로스는 여전히 나로부터 시선을 모로 비끼며 말했다.

“지난번 홍차가 그다지 입에 맞지 않으신 것 같아 이번엔 달콤한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나는 찻잔을 들며 배시시 웃었다.

“공작님이 저를 신경 써 주신 거네요?”

줄곧 다른 곳을 향하던 이딜로스의 시선이 드디어 내게로 미끄러져 왔다.

그는 내가 유순한 웃음을 머금고 눈을 깜빡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냥 손님이기에 예의를 차린 것뿐입니다.”

그러곤 이번엔 미간까지 좁히며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

나는 이딜로스의 매정한 반응에 조금 마음이 상했다.

‘분명 마멜라의 방에서 본 책에서는 인간들이 활짝 웃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했는데. 왜 오히려 악효과만 나는 것 같지…….’

마멜라는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선지 마멜라의 호감만 더 끌어올린 것 같아 시무룩하게 차를 홀짝였다.

“언니, 이것도 먹어 봐요.”

마멜라가 내게 자몽 타르트 조각을 건넸다. 나는 시무룩하게 내려갔던 입꼬리를 애써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고마워.”

자몽의 상큼한 향기가 우울한 기분을 조금 녹여 주었다.

나는 크림과 자몽이 올라간 타르트를 아래 깔린 받침 종이 째 들어 올려 한입 가득 넣어 우물거렸다. 톡 터지는 자몽의 맛과 부드럽고 달콤한 생크림의 조화가 절묘했다.

마멜라가 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차를 홀짝였다.

‘그런데 마멜라랑 이딜로스는 왜 이렇게 대화를 안 하는 거지?’

설마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을 정도로 서먹해진 건가…….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지.

고민하며 자몽 타르트를 모조리 입에 넣었을 때였다. 목이 메어 차를 홀짝대는데, 마멜라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앗, 언니. 뺨에 부스러기가 묻었어요.”

“응? 여기……?”

“아니요, 거기 말고. 좀 더 위에요.”

나는 손으로 마멜라가 말하는 곳을 찾아 열심히 더듬거렸다. 어디 있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어 엄한 곳만 문질러 대는데, 마멜라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거기가 아닌데……. 아무래도 언니가 못 찾는 것 같으니까 오라버니가 닦아 주시는 게 어때요?”

“……?”

이딜로스가 차를 마시다 말고 마멜라를 바라봤다. 오늘 처음으로 마멜라가 이딜로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자몽 타르트를 얼굴에 묻히고 먹은 덕분이구나. 나도 나름의 쓸모가 있나 봐.

지저분하게 묻히고 먹은 것이 뿌듯해졌다.

마멜라는 묘한 눈빛으로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펠리아 언니한테 손이 안 닿아서요. 오라버니가 바로 옆이잖아요.”

“……그래.”

이딜로스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이내 내게로 향한 그의 눈빛이 살짝 굳었다.

그의 표정 변화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아무렴 날 볼 때마다 인상을 쓰는 그였기에 그러려니 했다.

나는 이딜로스가 빨리 부스러기를 털어 주길 바라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런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일까.

언젠 나한테 잘만 다가오더니 막상 닿으려니 싫다, 이건가.

자꾸만 머뭇거리는 그를 보자 슬슬 성이 나려 해 눈가를 살짝 찡그리는데, 돌연 그가 손을 뻗었다.

이딜로스의 손가락이 입술 바로 밑을 깃털처럼 문지르곤 떨어졌다.

불에 덴 듯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 간 이딜로스는 혀로 입술을 살짝 적시더니 곧바로 찻잔을 들었다.

마멜라가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제 깔끔해졌어요.”

“그래?”

나는 이딜로스가 엄지로 문질렀던 곳을 다시 한번 손등으로 문질렀다.

마멜라는 즐거움이 만면에 핀 얼굴로 나에게 눈길을 보냈다. 마멜라도 냉전 중인 이딜로스와 한마디라도 나눈 것이 기쁜 듯했다.

“언니도 같이 먹으니 식사가 더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쭉 셋이서 먹어요!”

“응.”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자, 마멜라는 평소보다 신나서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마멜라가 은근한 눈빛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라버니는 어때요?”

“……여동생이 좋아하니 다음에도 같이 식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딜로스는 마멜라에게 응하듯 내게 정중히 부탁해 왔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때였다.

옆에서 마멜라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좋지 않았던 거예요? 그럼 오라버니는 불편한데 저 때문에 괜히…….”

“아니야, 나도 좋았어.”

이딜로스가 황급히 대답했다. 마멜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응.”

이딜로스는 나를 살며시 바라봤다. 줄곧 그를 쳐다보고 있던 나였기에 시선은 허공에서 얽혔고, 으레 그랬듯 나는 미소 지었다.

그러자 정해진 절차처럼 이딜로스가 눈길을 피했다. 이번엔 아주 성가시다는 표정도 함께였다.

저렇게 싫은데 좋다고 해 줄 정도로 마멜라를 아끼는 건가……. 역시 여동생 바보다웠다.

마멜라가 내 손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그럼 같이 올라가요.”

“응.”

아까부터 마멜라가 이딜로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이 재미난 걸 발견한 아이처럼 짓궂고 음흉하게 웃고 있다는 점이 조금 이상했지만.

“오라버니, 일 힘내세요.”

계단에서 헤어질 때가 오자 마멜라가 이딜로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딜로스는 그런 마멜라를 조금 낯설다는 듯 바라보다 인사했다.

“이따가 보자.”

“네.”

“……아펠리아 양도 나중에 뵙지요.”

그가 내게 고개를 살짝 까딱이기에 나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칠 틈을 기다렸지만, 이딜로스는 끝까지 내 시선을 모조리 피하곤 등을 보였다.

위층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마멜라가 나를 잡아끌었다. 마멜라는 평소보다 신난 걸음걸이로 나를 끌고 콩콩 달려갔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마멜라는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소리쳤다.

“아릴, 내가 도와줄게. 오라버니랑 친해지도록!”

“……갑자기?”

“응!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역시 손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어. 내가 꼭 친해지게 해 줄게.”

마멜라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내 손을 강제로 끌어와 잡았다.

정말로 친해지게 도와주고 싶은가 보다. 날 위해 열의를 태우는 마멜라의 모습에 감동했다.

“고마워, 마멜라! 하지만 쉽진 않을 텐데…….”

“걱정 마.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마멜라가 의기양양하게 눈웃음 지었다.

* * *

사각사각. 힘줄이 옅게 불거진 크고 매끄러운 손 아래에서 잉크 펜의 글자가 번졌다.

마멜라의 방에서 늘 듣던 소리이지만 두 사람이 글자를 쓰는 속도는 완연히 달랐다.

마멜라는 늘 어딘가에 쫓기듯이 부랴부랴 글을 쓰는 소리가 났다면, 이딜로스의 글씨 소리는 나긋한 봄나들이를 즐기는 것처럼 여유롭고 절도 있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어떻게 저렇게 쉬지도 않고 일을 하는 거야.’

펜으로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이딜로스는 여전히 같은 자세와 같은 표정으로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달라진 거라곤 그의 옆에 쌓인 종이 탑의 높이뿐이었다.

‘좀 쉬면서 해, 응?’

그의 집무실에서 이렇듯 그를 보고 있으면 걱정스러운 마음만 들었다. 정작 그는 담담하기만 한 데 말이다.

“아옹!”

“응?”

마침내 그의 손이 멈췄다.

아니, 멈춘 줄 알았으나 이딜로스는 마저 손을 움직여 종이에 온점을 콕 찍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줄곧 종이만 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왜 그래, 심심해?”

꼭 마멜라를 대하는 듯한 자상한 목소리였다.

나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천재 고양이를 자처해서라도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고 싶었다. 걸신들린 듯 온종일 일거리를 해치우고 있는 그의 모습에 뒷골이 당겨 왔다.

‘마멜라가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걱정하겠어?’

타들어 가는 고양이 속도 모르고, 이 인간은 머뭇거리다 손을 뻗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저 손이 닿으면 열심히 맑은 기운을 넣어 그의 기력을 보충시켜 주는 것밖에 없었다.

이딜로스는 내 앞발을 조심스레 잡아 만지작댔다. 그것도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면서.

아직까지도 이 소심한 인간은 나에게 손을 뻗을 때마다 경계한다.

‘무서우면 만지지를 말든가.’

제법 상기된 얼굴로 내 말랑한 발바닥을 만지고 있는 그를 쳐다봤다.

문득 샘솟는 장난기에 입을 크게 벌려 이딜로스를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 이딜로스가 경기를 일으키고 기절이라도 하면 내가 곤란했으니.

“아옹.”

겁 많은 인간.

“모래 가져와 달라고?”

……말을 말아야지.

나는 귀찮다는 태도로 앞발을 빼내며 이딜로스의 손을 꼬리로 쳐 냈다.

부드러운 꼬리가 이딜로스의 손등에 스치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아까까지 내 앞발을 만지던 손이 이번엔 내 등을 덮었다.

나지막해 간질거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조그만 게 성질도 있고.”

나처럼 착하고 애교 많은 고양이도 없을 텐데.

이딜로스가 손을 옮겨 내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그의 손길을 받고 있자니 역시 눈이 절로 감겨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낮은 웃음을 흘린 그가 물었다.

“좋아?”

“아옹…….”

“아릴, 손님은 만나 봤어?”

노곤함에 굴복하듯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손님? 누구, 설마 나?

다음으로, 내게 확신을 심어 주는 익숙한 이름이 봄날의 햇살 같은 나른한 목소리를 타고 왔다.

“아펠리아 로제트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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