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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76화 (66/191)

76화

이딜로스가 내 어깨에 걸쳐진 옷과 손에 감싸인 손수건을 눈짓했다.

아니, 나 하라고 준 것 아니었나? 굳이 돌아가서 바로 받아 내겠다는 이딜로스의 쪼잔함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눈에 띄지 말라기에 오늘만은 사라져 주려고 했더니…….’

내일부터는 제발 눈앞에서 사라져 달라고 해도 그러지 않을 건데.

나는 바보같이 기회를 걷어찬 이딜로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딜로스와 발맞춰 걷기 시작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산의 둘레 길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가는 말 하나 없이 저택으로 향했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단풍이 이따금 밟혀 바스락 소리를 냈다. 정원을 밝히는 은은한 조명에 비추어진 풍경은 바닥에 노을이 한 겹 깔린 것처럼 붉었다.

갈 길은 먼데, 대화는 없어 불편하기만 했다.

나는 어색한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공작님을 봤던 때는 늦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네요.”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

“네. 그다음으로 만났을 적이 여름이었고…….”

“그걸 다 기억하는 겁니까?”

“제 생에 잊지 못할 일로 손꼽히는걸요. 공작님은 그런 일들 이미 잊으셨겠죠?”

이딜로스는 대답 없이 여트막한 웃음을 툭 흘릴 뿐이었다.

가라앉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쩌다 보니 올해는 사계절 모두 서로 마주치게 되었네요.”

“아직 겨울은 멀었는데, 그걸 어떻게 확언하는 겁니까?”

난 이 집의 고양이니까 아직 오지 않은 겨울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의 곁을 쭉 지킬 텐데.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조금 다르게 말했다.

“설령 제가 떠나게 되더라도 다시 공작님 눈앞에 나타날 거라서요.”

“또다시 무단 침입을 하겠단 말을 아주 당당히 하는군요.”

“그것도 그렇네요. 그래도, 다음에 갑자기 나타날 땐 공작님이 놀라시지 않도록 제가 올 거라고 미리 알려 드릴게요. 그러면 되겠죠?”

이딜로스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사박, 낙엽에 파묻힌 그의 구두가 소리를 냈다.

“우리가 꼭 친구라도 되는 양 굴고 있군요.”

뒤따라 멈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봤다.

“친구 아닌가요?”

사람의 몸으로는 그와 가족이 아니란 걸 알지만, 친구도 아닌 건가?

일면식도 있고, 나름 화해도 했으니 가족은 아니더라도 친구 정도에 해당될 거라 생각했다. 설마 이딜로스는 날 여전히 적으로 여기는 걸까?

이딜로스의 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빛을 띠었다. 그가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난 당신과 친구 하겠다 한 적 없는데.”

“친구도 아닌데 이렇게 물건을 빌려 주세요?”

나는 손에 묶인 손수건과 몸을 덮고 있는 큰 재킷을 바라봤다. 다시금 고개를 들자 이딜로스는 당혹스러운 낯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건 그저 손님에 대한 예우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그쪽은 몸이 허약하다고 하니 감기라도 걸렸다간 내 입장이 곤란해지기에…….”

답지 않게 그의 말이 길어졌다. 이게 뭐라고 그리 당황하는 거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전 공작님이랑 친구가 되고 싶어요.”

가벼운 말, 가벼운 웃음.

최대한 이딜로스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노력한 거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딜로스의 표정은 굳어 갔다.

그의 얼굴에서 언뜻 복잡함이 엿보였을 때, 그는 대답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열 걸음 정도를 조용히 뒤따라 걸었을 때, 이딜로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말을 아무런 대가 없이 하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할 겁니다.”

그의 말에선 사막에 홀로 선 사람의 황량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럼 들어가세요.”

저택에 도착하자 나는 이딜로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에게 겉옷은 돌려주었지만, 손에 묶인 손수건은 여전했다. 다행히 이딜로스가 상처를 감싼 손수건까지 들고 갈 정도로 옹졸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돌려주겠다고 했더니 버리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긴 했지만…….’

그에게 그 이상의 친절을 바라는 것 자체가 덧없는 짓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버리라니. 물건을 아낄 줄도 모르는 인간 같으니.

나는 방으로 돌아가는 길의 복도를 느릿하게 밟으며 왼손을 바라봤다.

엄지손가락에 아직도 그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마찬가지로 내 입술을 쓸어 보았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이보다 더 부드럽게 떨리는 감촉이었는데.

같은 입술인 건 매한가지인데 뭐가 달라서 이렇게 와 닿는 감촉마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방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입술을 쓸던 손을 말아 쥐곤 손수건 묶인 손을 뻗었다. 문고리가 돌아갔다.

* * *

“하아…….”

식사 시간이 찾아오자 마멜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안셀이 무료할 때 하라며 건넨 1만 피스의 퍼즐을 맞추고 있던 나는 마멜라의 한숨 소리에 귀 기울였다.

나는 들고 있던 조각의 자리를 찾다가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마멜라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그런데 그런 말과 달리,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이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손에 든 조각을 맞춰 넣은 나는 퍼즐을 손에서 놓고 마멜라를 바라봤다. 마멜라의 낯빛은 유난히 좋지 않아 보였다.

곧 있으면 이딜로스와 함께하기로 한 식사 시간인데, 무슨 문제라도…….

불현듯 뭔가가 생각난 나는 마멜라에게 떠보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딜로스랑 대화는 잘 풀었어?”

“아…… 그건 신경 안 써도 돼.”

마멜라가 시선을 피했다. 눈치껏 짐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나는 입을 벌렸다.

설마 아직도 지난번 그 상태에서 사이를 풀지 못했다는 건가?

나로서는 그들의 옛날 일을 알지 못하기에 누구의 잘못인지 판단할 수도 없지만 이렇게까지 냉전이 질질 끌리는 건 원치 않았다.

‘내가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마멜라를 보며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이딜로스가 돌아오고서 처음 함께하는 식사 자리였다.

그가 나를 끼워 주지 않으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다행히 내가 약혼녀라는 소문이 저택에도 퍼져서인지 이딜로스가 나를 내치지는 않았다.

만약 이딜로스가 직접 그러한 소문을 내었던 거라면 제 발에 걸린 셈이었다.

마멜라는 내게 찰싹 달라붙어 식당으로 이끌었다. 나는 단단하게 팔짱을 낀 마멜라를 바라보다가 스쳐 가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붉게 물든 나무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 이딜로스는 나랑 같이 식사하는 걸 싫어하겠지.’

반은 씁쓸함, 반은 그가 제 꾀에 걸렸다는 유쾌함. 그러한 양면의 감정이 느껴졌다.

‘괜찮아. 이딜로스의 박대는 여러 번 겪어 봤으니까…….’

물론 그에게 다시 다가가야 한다는 것과 그가 나를 남처럼 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오랜만에 만난 이딜로스가 나를 대했던 그 태도는 마냥 나를 밀어내려고만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딜로스가 정말로 나를 밀어내려 했더라면, 그는 아마 나를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관심이 없는 것엔 심히 무신경하고, 싫어하는 것은 극명히 드러내는 인간이었으니.

창밖을 바라보며 걷자니 어느새 식당을 앞두고 있었다.

눈앞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긴 식탁의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딜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은 내게 잠시 머무르다가 곧바로 옆에 있는 마멜라에게로 넘어갔다.

마멜라는 이딜로스의 대각선 방향에 앉았다. 나는 뒤따라 마멜라의 옆에 앉으려다 멈췄다. 그 자리에는 식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시선을 옮겨 마멜라의 맞은편 자리를 바라봤다. 따지자면 이딜로스의 옆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차마 저곳에 앉을 용기까지는 없었기에 마멜라의 옆으로 온 것인데…… 하필 그 자리에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려 이딜로스의 옆에 앉았다. 마주 보게 된 마멜라가 귀여운 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걸 마지막으로, 마멜라는 입을 꾹 다문 채 어색하게 식기만 만지작댔다.

“…….”

“…….”

식사가 나오기까지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이 불편한 기류의 원인을 찾듯 마멜라와 이딜로스를 슬며시 번갈아 바라봤다.

원래 이렇게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는 건가?

지난번, 이딜로스의 생일 때 가졌던 식사 자리와는 달랐다. 그때는 조잘조잘 잘만 떠들던 마멜라가 지금은 인사랄 것도 없었으니.

이딜로스는 식사가 차근차근 나오기 시작하자 다소 무뚝뚝한 투로 말했다.

“부담 없는 편안한 식사가 되길 바랍니다.”

“네. 감사해요.”

그의 형식적인 말에 나는 미소를 살며시 지었다. 이딜로스는 나이프를 들어 올리던 걸 짧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내게서 눈길을 돌렸다.

“마멜라.”

이딜로스의 시선이 마멜라의 앞 스테이크 접시에 닿았다. 마멜라는 황급히 손사래 쳤다.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마멜라도 이딜로스를 따라 나이프를 들어 능숙하게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내가 마멜라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시지요.”

“아, 네.”

나는 긴장을 머금은 채 나이프를 들었다.

이딜로스가 떠나 있을 보름간 마멜라와 둘이 식사를 하며 식사 예절에 대해 배웠었다. 나이프를 쥐는 방법과 고기를 썰고 조금씩 입에 넣어 천천히 음미하듯 맛봐야 한다는 그런 복잡한 것들.

그냥 마구잡이로 잘라 입에 넣으면 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솔직히 그 생각은 인간의 이성적이고 예의 주의적인 면모와 거리가 먼, 지극히 짐승 같은 것이라는 걸 나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태 살아온 생의 절반 이상이 고양이였는데…….

나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누른 채 나이프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마멜라가 나를 흘끔대고 있었다. 무척 불안한 눈길로.

‘힘 조절하자. 힘 조절…….’

갑작스레 좋지 못한 기억 속, 기겁하는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아릴, 벌써 나이프만 세 개째 망가뜨렸어……. 고양이가 왜 이렇게 힘이 좋아?>

나는 최대한 손에 힘을 빼고 나이프를 쓱쓱 움직였다.

그런데 너무 힘을 뺐나. 그만 손에서 미끄러져 버린 나이프가 ‘쨍그랑!’ 요란한 소음을 내며 그릇 위로 떨어졌다.

“…….”

마멜라가 입에 넣으려던 양파를 툭 떨어트렸다.

나는 놀라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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