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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74화 (64/191)

74화

어느새 빨갛게 익은 단풍들이 나무에 한가득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사이 마멜라가 바짝 다가와 들뜬 목소리로 물어 왔다.

“아릴, 차 마실 시간이야.”

“아옹.”

됐어.

분명 그리 말했건만, 어느새 마멜라는 요나에게 따뜻한 차를 부탁하고 있었다.

찻잔 두 개와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찻주전자가 티 테이블 위에 준비되었다.

쿠션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은 마멜라가 고양이인 나를 향해 재촉의 손길을 보냈다.

“아릴, 어서.”

“……아옹.”

마멜라의 성화에 못 이겨 별수 없이 인간으로 변했다.

‘지금 인간이 되면 새벽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야 하는데…….’

초가을에서 하늘 아래가 붉게 물든 완전한 가을로 접어들 때까지, 나는 어느새 어엿한 성체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작년 이맘때 가을에 태어났던 모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연하게도 고양이로 지내는 시간이 짧아지고 인간으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고양이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방법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을 법한 아슐란도 지난번 신전 허가서를 보내어 도움을 준 이후로 연락이 닿지도,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마멜라가 의자 한 곳에 걸어 둔 가운을 집어 걸쳤다.

늘 인간이 될 때마다 입고 있던 하얀 천 쪼가리 위로 가운을 포개어 입자 기다란 머리칼이 그 아래로 말려 들어갔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모아 올려 옷자락에서 새하얀 머리칼들을 모조리 빼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멜라가 순수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와, 눈의 요정님 같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들에게 두 개씩 달려 있는 그 눈을 말하는 건가? 뭘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의아하게 내 몸을 내려다보다가, 마멜라의 관심이 어느새 차에 기울었다는 걸 깨닫곤 자리에 앉았다.

요나는 준비해 둔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홍차였다.

나는 제법 익숙하게 설탕을 퐁당퐁당 빠트리곤 홀짝였다.

홍차에 우유를 섞어 스푼으로 젓던 마멜라가 말했다.

“오라버니가 많이 늦네. 이번엔 늦을 거라고 말하고 가긴 했지만 조금 걱정돼.”

“그러게.”

그날 이딜로스가 가는 걸 본 후로 벌써 보름이 지났다.

처음엔 나에게 말도 없이 떠났다는 생각에 서운했었다.

그러나 마멜라의 말로는, 그날 내가 베로니와 함께 있던 새에 이딜로스가 고양이인 나를 찾았다고 한다.

하필 내가 인간이 되어 있던 터라 마멜라는 내가 침대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고 했고, 이딜로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고.

‘난 그럴 때만 인간이 되지…….’

정말 쓸모없고 도움도 안 되는 수인의 체질이란. 이제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다.

마멜라는 부드러운 밀크 티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그래도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이전에도 이딜로스가 이렇게 늦게 돌아오던 때가 있었어?”

“당연하지. 가끔 저 멀리, 변경 쪽의 항구 마을에 갈 때면 한 달이 지나서 올 때도 있어. 그래도 이번엔 브라우니 로데칼에 다녀온다고 했으니 아마 보름 정도면 와.”

“……브라우니 로데칼?”

내가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마멜라가 웃음을 피워 내며 말했다.

“아, 브라우니 로데칼은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야. 솔직히 말해 빈민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인데, 오라버니는 종종 가서 그곳에 물자를 나눠 주고 그러거든.”

“빈민촌은 어떤 곳인데?”

“음…… 가난과 기아가 많고 풍족하지 못한 곳.”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의 이면에는 그런 곳도 있는 건가?

난 여태 가 본 곳이 카델라로트 저택이나 황궁이 다였기에 인간들은 모두 풍족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라버니는 신전에도 고아들을 위해 후원을 하고, 빈민촌에도 그런 후원을 많이 하시거든. 그래서 가끔 이런 일로도 늦게 올 때가 있어.”

“그렇구나…….”

이딜로스의 타인을 대하는 못된 성격과 연관을 짓자면 솔직히 상상이 가질 않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그의 내면이 생각보다 여린 것을 보면 그 속에 한 줌의 자비로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멋있다. 인간에게 풍요와 행복을 준다는 수인인 나조차 알지 못했던 세계에 이딜로스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던 것 아닌가.

“아릴, 넌 오라버니가 언제 돌아올 것 같아? 오늘? 내일? 모레?”

“음, 모레?”

“그래? 난 내일로 할래.”

마멜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맞추는 사람한테 틀린 사람이 시중들어 주기 할래?”

안셀이 듣는다면 기겁해 마땅할 내기 제안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이런 시시콜콜한 내기는 마멜라와 나에게 있어 재미난 놀이였다.

그 후로 우리는 간단한 화젯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내가 모르는 인간들의 일들에 대해 마멜라가 알려 주는 식이었다.

그러다 조금 질릴 즘엔 함께 정원으로 나가 산책했다.

마멜라는 이딜로스에게 선물 받은 1호, 2호, 3호 화원들을 다시금 소개해 줬다. 그중 가장 최근에 받았다던 3호는 정원의 수준이 아니라 그냥 산이나 다름없어서 나는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

방으로 돌아왔을 땐 기력이 모두 소진되고 말았다.

“으, 힘들어…….”

온종일 마멜라를 따라 정원을 거닐었던 나는 초주검 상태가 되어 침대에 쓰러졌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졸음이 밀려왔다.

‘조금만 잘까…….’

침대 위에 덮어 둔 이불 아래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그대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꿈나라로 빨려 들어갔다.

“으음…….”

나는 졸음에 겨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품하며 흐릿한 초점을 잡는데, 뭔가 이상하다. 어째서 방 안이 이토록 어둡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있어 방이 이렇게까지 어둡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창밖에 햇빛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나 엄청 오래 잠들었구나. 숙면했구나.’

저녁 먹을 시간도 일찌감치 지난 한밤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산이었다.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마를 짚었다. 낮잠을 너무 길게 자서 그런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마멜라는 나랑 식사하는 걸 좋아했는데, 저녁은 혼자 먹었겠네.’

이딜로스가 이번에 출장을 가며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자 마멜라는 아펠리아로서 이곳에 머무르게 된 나와 식사하는 걸 무척 반겼다.

그제야 제대로 먹어 보게 된 인간들의 음식이 얼마나 풍요롭고 맛있던가…….

사료만 먹을 땐 인간들은 미각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혹평했는데 이렇게 인간들의 음식을 먹어 보니 그들의 미각이 얼마나 섬세하고 훌륭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간 나만 맛없는 걸 먹여 왔다는 것에 약간의 원망이 생겼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오늘 오후 내내 마멜라와 함께 헤집고 다녔던 정원에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것이 보였다.

나는 창가 옆 테이블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는 생각했다.

‘너무 많이 자서 머리도 아픈데, 좀 거닐다가 올까.’

생각을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숄을 실내 드레스 위에 걸치곤 가벼운 신만 챙겨 신은 채 밖으로 향했다.

방을 나오자 음산할 정도로 정적인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한적한 저택에 내 발소리가 크게 울리지 않게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무사히 1층으로 내려와 저택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쌀쌀한 가을밤의 찬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한순간 긴장감이 사그라들고 개운함이 밀려왔다.

‘밤에 저택 밖을 나와 보는 건 처음이야.’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따금 신발 끝에 나무에서 떨어진 붉은 낙엽이 밟혀 바스락 소리를 냈다. 밤 특유의 찬 공기와 그 냄새가 이리도 상쾌할 수가 없었다.

고양이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행동이니 인간이 되어 좋은 점 하나는 있구나 싶었다.

“다시 봐도 정말 크네.”

나는 산처럼 큰 마멜라의 3호 화원 근처를 천천히 거닐었다. 알록달록하게 물든 나무 아래, 떨어져 내린 단풍잎들의 풍경은 밤에 보아도 장관이었다.

‘대체 이런 걸 선물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래.’

한참 산의 둘레를 거닐던 나는 빨갛게 익어 가고 있는 산을 올려다보다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바스락.

귀가 반응했다.

……분명 나는 걸음을 멈췄는데, 이건 무슨 소리지?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겁을 먹어 그런 것은 아니고, 일종의 경계 태세였다. 고양이로 치자면 등을 곧추세우고 몸을 부풀리는 행동…….

바스락, 바스락.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에 나는 생각하던 것도 멈추고 침을 삼켰다.

맞은편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는 것이 확실했다. 이 시간에 나처럼 밖을 돌아다닐 만한 사람이 있던가?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는 마멜라가 깨어 있기엔 지금은 너무 야심한 시각이었다. 마멜라뿐만 아니라 다른 고용인들도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그나마 깨어 있을 법한 사람은 이딜로스가 유일하건만, 이딜로스는 지금 출장을 가 있지 않던가.

‘분명해, 침입자인 거야.’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바닥을 둘러봤다.

마침 근처에 기다란 나뭇가지가 보여 주워 들고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교차로처럼 네 개의 길이 트여 있는 접점에 다다랐다. 왼쪽 길은 산으로 통하고, 오른쪽 길은 정원과 이어진 길이며 위쪽 길은 내가 올라온 방향에서 그대로 쭉 직진할 수 있는 길이다.

‘산 쪽에서 나는 소리야.’

하필 낙엽 소리 탓에 발소리를 분석할 수 없었다.

나는 나뭇가지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인기척이 더 가까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왼쪽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오는 순간 나뭇가지를 크게 휘둘렀다.

“누구야!”

목소리를 크게 내고서야 익숙한 향이 코 안으로 훅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 반가운 향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얄팍한 나뭇가지가 상대방의 손에 붙잡혔다.

정겹고도 조금은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가 찬바람을 가르고 내리꽂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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