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73화 (63/191)

73화

“와아, 마멜라의 옆방이네!”

마멜라가 가리킨 방향에는 그녀의 방과 내가 사용할 방이 나란히 있었다.

늘 저택에서 탐험 놀이를 할 때나 비어 있던 저곳을 몰래 들어가 보곤 했는데, 저곳이 내가 사용할 곳이 될 줄이야.

나는 설렘을 가득 안은 표정으로 마멜라를 바라봤다. 마멜라는 발그레 볼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내가 오라버니한테 부탁했어. 안셀의 조카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하니까 오라버니 표정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우겼더니 내 옆방으로 준비해 주더라고.”

“바로 옆이라니, 너무 좋아!”

“이제 고양이로 있을 땐 내 방으로 왔다가, 사람이 될 때는 다시 네 방으로 가면 돼.”

“고마워, 마멜라.”

나는 자그만 마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하고 풍성해서 느낌이 좋았다.

늘 내 머리를 만져 주던 건 마멜라였는데, 내가 마멜라의 머리를 만져 주는 날이 오다니.

마멜라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연한 건데 뭘…….”

“그런데 마멜라.”

나는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딜로스랑 대화는 잘 마무리된 거야? 지난번에 조금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응. 뭐…… 그럭저럭.”

마멜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대화를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은 듯 마멜라는 곧바로 다른 화제로 돌렸다.

“아릴, 널 양녀로 받아 주신 분이 궁금하지 않아? 어떻게 뭘 거치지도 않고 바로 안셀의 부탁을 받아들여 주셨을까?”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일면식도 없이 내 양아버지가 된 인간이 궁금하긴 했다.

다만 마멜라가 말한 이유로 궁금하다기보단, 이딜로스가 그 인간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선생님이란 건, 보통 제자가 스승을 부를 때 쓰는 말이지 않던가?

옆에 있던 안셀이 시원찮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 첫째 형님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호쾌한 성격이지요. 이번에도 그저 재밌어 보이니 도와준다는데……. 양녀로 들인 분이 수인이라는 걸 알면 아마 기절할 겁니다.”

“되게 자유로운 분이신가 보네…….”

마멜라는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문득 드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으로 말했다.

“난 가족이란 게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줄 몰랐어. 마음 같아선 안셀의 조카가 아니라 마멜라의 동생이 되고 싶은데.”

그 말에 마멜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동생? 누가 봐도 아릴이가 언니인데?”

“그렇지만 나이로 치면 마멜라가 나보다 열한 살이나 더 많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마멜라는 할 말이 없는지 마냥 웃었다. 안셀이 옆에서 말했다.

“아릴 님, 어디 가서 누가 나이를 물으면 한 살이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왜?”

“인간의 한 살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는 아기이니까요. 그러니 아릴 님은 누군가 나이를 묻는다면, 적어도…… 흠, 열여덟이라고는 해야겠군요.”

“내가 열여덟 살로 보여?”

내 말에 안셀과 마멜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요나도 마멜라와 함께 나보고 열여덟 살 정도로 보인다고 했지. 내 원래 나이보다 열입곱이 늘어났지만, 나는 해맑게 대답했다.

“알았어.”

뭐든 많으면 좋은 거니까, 나이도 많으면 좋은 거겠지. 기왕이면 스물여덟이나 서른여덟이면 더 좋을 텐데. 고작 열여덟으로 보인다는 게 아쉬웠다.

마멜라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있잖아, 아릴이는 이미 나와 가족이지만, 서류상으로도 가족이 되고 싶은 거면 굳이 내 동생이 아니어도 우리 오라버니랑 결혼…….”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서둘러 마멜라의 말을 잘라 낸 안셀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자, 아릴 님. 이제 그만 들어가 보시죠. 아가씨께서 방을 꾸미는 걸 많이 도우셨다고 합니다.”

“어? 정말?”

마멜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응, 사실 네 취향을 알 수 없어서 내 취향대로 꾸몄어. 나쁘진 않을 테니 한 번 봐 봐.”

안셀이 앞장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러자 보인 것은…….

“안녕하세요, 드디어 오셨네요! 어머, 마멜라 아가씨도 계셨네요. 어어, 안셀 님까지? 아하, 저택 소개를 받다 오신 거구나!”

웬 인간이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수다스러운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연갈색의 머리를 아래로 느슨하게 묶고 있던 귀여운 소녀가 나를 향해 방긋 웃었다. 가만 보니 아주 눈에 익은 얼굴이다.

“이런, 먼저 인사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안녕하세요, 아펠리아 아가씨. 아가씨께서 머무실 동안 옆에서 모시게 된 베로니라고 합니다.”

사용인 중에서 늘 나한테 간식을 가장 많이 주던 인간이었다.

나를 세상 예뻐해 주던 인간인데…… 이 애가 내 전담 시녀가 된 건가?

‘낯선 인간보다 낫긴 한데…….’

솔직히 내게 마멜라와 붙어 다니는 요나처럼, 이렇게 시녀가 생길 줄은 몰랐다. 이러면 내가 갑자기 고양이가 될 수도 있으니 곤란한데.

“베로니? 네가 아펠리아 언니를 모시게 되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가주님께서 제게 아펠리아 아가씨를 모실 영광을 주셨어요. 주인님의 약혼녀분이시니, 최선을 다해 목숨 걸고 모시겠다고 했죠.”

“…….”

“정말 영광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멜라와 불편한 눈빛을 교환했다.

왜 이 애까지 내가 이딜로스의 약혼녀라는 헛소문을 알고 있는 거지?

아니, 애초에 이딜로스가 내가 연회 때의 그 여자라는 걸 알게 된 게 방금이지 않나? 설마 그새 이딜로스가 그런 식으로 말하기라도 한 건가……?

실로 무서운 행동력과 속도였다.

베로니의 시선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가방에 닿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달음에 다가왔다.

베로니는 내 손에 들린 가방을 가져가며 말했다.

“무거운 가방은 저에게 주세요! 그런 가냘프신 몸으로 어떻게 이런 커다란 가방을…….”

베로니는 은근하게 안셀을 바라봤다. 당신의 손은 이럴 때 안 쓰고 대체 뭐 하냐는 눈빛이었다. 안셀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베로니를 마주 봤다.

그녀는 으쌰, 소리와 함께 가방을 힘껏 들어 올리더니 침대 옆으로 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해맑은 강아지처럼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펠리아 아가씨, 아침 일찍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시죠? 오늘은 푹 휴식을 취하시고 내일부터 마멜라 아가씨와 담소를 나누심이 어떨까요?”

“응? 아, 그게…….”

“허약한 체질이라고 하셨으니, 휴식은 제때제때, 꼬박꼬박하셔야 해요!”

나는 베로니의 열정 가득한 눈을 보다가 마멜라를 돌아봤다. 마멜라는 곤란한 표정으로 베로니를 보더니 이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펠리아 언니. 우린 내일 같이 놀아요.”

“아, 응…….”

내가 수인임을 모르는 베로니가 뒤에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곧 벽 하나를 두고 떨어지게 될 마멜라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갑작스레 안셀이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안셀의 눈이 이상할 정도로 그렁그렁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삼촌도 이만 가 보마. 네가 이렇게 병약한 몸으로 안전한 신전을 떠나 이곳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쾌차한 것 같아 마음 놓이는구나. 부디 잘 지내렴.”

“…….”

안셀의 오버를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기에 눈치껏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안셀은 우는 소리를 내며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이 인간, 비서직 말고 배우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마멜라는 눈물을 질질 흘리는 안셀을 데리고 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 마멜라는 손을 흔들며 베로니를 살짝 눈짓했다. 그녀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는 신호 같았다.

“내일 봐.”

달칵, 문이 닫히자 베로니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소리 없는 감탄이 담겨 부담스러웠다.

내가 시선을 슬그머니 옆으로 피하자, 베로니가 말했다.

“우선,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릴까요?”

“응…….”

베로니는 내가 가져온 짐을 풀어 살폈다. 펼쳐진 가방 속이 보였다.

나도 처음 보는 것인데, 여러 옷가지와 눈속임인지 약통 같은 것들이 들어가 있었다.

베로니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방 안을 살피다가 곧 방 한 곳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가방에도 옷이 있는데, 왜 굳이 저곳으로 가 버린 거지?

나는 줄곧 갑갑하게 매여 있던 턱 아래 모자 끈을 풀었다. 사실 이딜로스를 마주하면서도 몇 번이나 벗고 싶었던 모자이지만, 일부러 고집스레 버티고 있었다.

이따금 그의 탐탁잖은 시선이 내 모자에 닿았던 걸 보면 실내에서는 모자를 벗는 게 인간들이 정한 규칙인가 싶기도 했다.

다행히 아펠리아라는 존재는 그런 규칙에서 조금은 벗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인물이었다.

‘모자를 벗었다가 괜히 이딜로스랑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으면, 더 무서웠을 거야.’

벗은 모자를 쥐고 아까 일을 회고하는데, 베로니가 드레스 룸에서 옷 한 벌을 들고나왔다. 베로니는 들고 온 옷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더니 나를 보고 토끼 눈을 떴다.

나는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건가 싶어 손을 들어 뺨을 더듬었다.

베로니가 입을 벌리고 있다가 말했다.

“아깐 모자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는데……. 세상에,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세요? 너무 비현실적이라 제가 있는 곳이 꿈속인 줄 알았잖아요……. 대체 왜 모자 같은 걸 쓰고 계셨던 거예요?”

“어…… 고마워.”

나는 베로니의 경악 섞인 칭찬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칭찬이 맞긴 한 거겠지?

베로니는 몇 번의 움직임으로 능숙하게 내 옷을 갈아입혀 주곤 내게 푹 쉬라고 당부한 뒤 방을 떠났다.

딱히 할 게 없던 나는 마멜라가 취향껏 꾸몄다던 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때, 불현듯 뭔가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소리에 이끌려 창가로 다가갔다. 먼지가 내려앉고 바람이 살랑이는 정도의 아주 미약한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자마자 익어 가는 단풍잎들 사이로 나부끼는 황금색 머리칼이 보였다.

‘아, 이딜로스다…….’

그런데 그 옆에는 카델라로트의 인장이 찍힌 호화로운 마차도 함께였다. 나는 뒤늦게 그의 차림새가 외출복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딜 가는 거지?’

……그보다, 왜 지금 떠나는 거지?

기분이 울적해졌다. 내가 저택에 왔기 때문에 이딜로스가 어딘가로 떠나는 걸까.

‘아니, 어쩌면 내가 싫어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출장이 잡혀 있던 걸지도 몰라.’

좀 더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면, 나를 만나기 위해 출장 시간을 잠시 미뤘던 걸 수도 있지 않나.

이제 보니 옆에 안셀도 있었다.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딜로스에게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하필 그가 고개를 돌린 곳이 이 방향이었다. 그리고 또, 거짓처럼 그가 나를 바라봤다.

이딜로스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순간 숨이 멈췄다. 창틀을 쥔 손가락만이 사고가 통하는 듯, 힘이 실려 마디가 새하얗게 변했다.

나를 봤다. 나를 본 게 맞을까?

나를 봐 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나를 발견한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비밀 하나를 들킨 것 같아 심장이 조급하게 뛰었다.

그러나 곧, 서운하게도 이딜로스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바로 옆이 마멜라의 방이었지.’

이딜로스에게는 어딘가로 떠나기 전, 늘 마멜라의 방을 한 번씩 바라보는 습관이 있지 않던가. 순간 허탈해진 기분과 섭섭함이 밀려왔다.

봐 주길 바랐다가, 그러질 않았길 바라다가, 또 정말로 그러질 않으니 서운하다니.

성격 나쁜 이딜로스 못지않은 변덕이었다.

이딜로스는 곧 안셀을 돌아보며 무슨 말을 하더니 마차에 올랐다. 안셀이 그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마차 문은 매정하게 닫혔다.

‘……가지 말지.’

이딜로스를 잡지 못한 안셀을 탓하고 싶었다.

나는 그가 탄 마차가 출발해 떠나는 모습을 쭉 지켜봤다.

이딜로스의 흔적이 시야에서 깨끗하게 지워지고, 안셀만이 터덜터덜 돌아오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손마디에 실었던 힘이 풀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