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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71화 (61/191)

71화

“풋.”

요나가 웃음을 짧게 터트리자 안셀이 당황한 낯을 띠었다. 짐짓 엄한 표정으로 얼굴을 뒤바꾼 안셀이 의연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아릴 님, 보통 숙녀분들은 마차에 오르내릴 때 에스코트를 받습니다.”

“그게 뭔데?”

“쉽게 말해서 붙잡아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마차에 오르내릴 때 말고도, 연회에 입장할 때도 여성분들은 에스코트를 받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생각해 보니 지난번, 황궁에서 이딜로스가 마차에서 내려 손을 건넸던 게 생각났다.

그때 난 ‘손’을 훈련해 둔 습관이 있어서 무심코 내밀었던 것인데, 내가 좋아서 손잡아 준 게 아니었구나.

“알았어. 기억해 둘게.”

“아릴 님, 저는 다른 수단으로 이동할게요. 안셀 님과 조심히 도착하시길 바랍니다.”

요나까지 함께 가 버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지, 요나는 내게 작별 인사를 해 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안셀이 부럽다는 눈길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릴 님, 저를 대할 때와는 판이한 반응이군요.”

“아닌데?”

“섭섭합니다. 제가 더 많이 놀아 주고 예뻐해 주지 않았습니까? 선물도 많이 사 드렸는데…….”

“선물?”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맛없는 사료로 바꿔 준 것과 날 데리고 인형 놀이나 했던 걸 선물이라 하는 거야?”

“맛이 없으셨습니까? 건강에는 무척 좋은 사료인데…….”

“쌓여 있으니까 돌아가면 네가 한번 먹어 봐. 마멜라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억지로 먹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내가 씩씩 성내며 말하자 안셀이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펼쳤다. 그러나 그간 쌓여 있던 게 있어서인지 뿔난 내 심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네가 사 온 그 이상한 옷들은 또 어떻고? 이 옷보다 불편했거든?”

“그, 그렇습니까. 아하…… 사랑스럽기로는 정말 이를 데 없었는…… 죄송합니다. 일단 진정하시지요.”

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콧바람도 흥흥 내뱉으며, 내가 화났다는 걸 아낌없이 드러냈다.

꼬리가 있었더라면 소파를 탁탁 내려쳤을 텐데, 내 분노를 표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내 화를 풀어 주기 위해 쩔쩔매던 안셀은 창밖을 확인하곤 말했다.

“이제 곧 도착하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십시오. 아직 전하께서는 아릴 님이 연회 때의 그 여성이라는 것을 모르시니까요.”

“……알았어.”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셀과 말을 주고받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공작저의 모습이 창 너머로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할수록 긴장감이 찾아왔다.

나는 요나가 턱 아래에 묶어 준 모자의 리본 끈을 만지작대다가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 분명 다 잘될 거야. 이제껏 혼자 이딜로스를 마주쳤던 것과 달리,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

그리고, 이딜로스는 허락했다는데 뭐가 두려운 거야.

아펠리아로서 저택에 머무를 허락을 받아 둔 상태에서, 나는 그냥 그의 앞에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된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하고, 그의 눈을 마주 보면서…….

“…….”

마차가 멈췄다.

그 반동에 심장이 덜컥 튀어 나갈 것처럼 뛰었다.

그래, 모든 일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만약,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안 된다고 한다면?

“……아릴 님? 내리시지 않습니까?”

어느새 먼저 마차에 내려 손을 내밀고 있던 안셀이 의아하게 물었다. 나는 놀라 정신을 차렸다.

한순간 겁에 질렸던 나는 무심결에, 차라리 얌전히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안셀의 손을 잡았다. 모자의 챙을 잡아 내려 얼굴을 더욱이 감추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 형편없는 생각을 하다니…….’

안셀과 마멜라, 요나의 노고를 단 한 번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꼴이지 않은가.

여태껏 겁에 질려 이딜로스에게 도망치려고만 했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슨 근거로 밝은 미래보다 부정적인 미래를 먼저 염두에 두었던 걸까.

쫓겨난다느니, 버림받는다느니, 미움받는다느니…….

불공평하다.

모든 것이 동등해야 마땅한 세상인데, 긍정은 콩알만 하고 부정은 거대하다는 건 세상의 규칙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라는 작은 내면에서부터 동등해야 하는 거잖아.

나는 굳게 마음먹고 안셀의 에스코트를 받아 공작저의 익숙한 길을 걸어갔다.

일부러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태평한 행동 같은 건 하지 못했다. 혹시나 이딜로스가 집무실에서 저택으로 향하고 있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기라도 할까 봐…….

“지금부터 제가 아릴 님께 말을 놓아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난 오히려 네가 그러는 편이 더 익숙해.”

“허허, 그렇습니까. 전 오히려 존대가 더 편한데요. 안 그러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꼭 신께서 노하셔서 저를 벌할 것 같고, 막 그렇단 말입니다.”

안셀의 실없는 소리에 나는 픽 웃었다. 아무래도 그가 내 긴장을 풀어 주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이딜로스를 만나러 가는 거라면 늘 그가 있는 집무실에 가겠거니 했는데,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응접실입니다.”

“……?”

“지금은 손님이시니까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안셀이 응접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따라 멈췄다. 안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입니다. 전하와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응.”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켜곤 모자가 잘 묶여 있는지, 내 얼굴을 꼼꼼하게 가리고 있는지 더듬어서 확인했다.

어차피 들어가면 얼굴을 보여야 할 테지만, 내 마음의 문제였다. 어떻게든 긴장과 불안감을 낮추고 싶었다.

안셀은 줄곧 반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직사각의 가방을 내게 건넸다. 두 손으로 받았음에도 묵직함이 느껴져, 가방을 떨어트리지 않게 꼭 쥐며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이곳에서 지내며 입으실 옷가지들입니다. 아가씨께서 고르셨지요.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준비됐어.”

어서 해치우자는 마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안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을 두드렸다.

“전하, 제 조카와 함께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번으로 네 번째, 인간의 모습으로 이딜로스를 마주한다.

이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주쳤지만, 이번에는 순전히 내 자의로, 내 선택으로 그를 만나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계속 마주치게 될 거야. 긴장하지 마. 용기를 내.’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쥐고 있던 가방의 손잡이를 더 세게 붙잡았다.

마침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귀가 반응했다.

눈을 뜬 나는 안셀을 따라 응접실에 들어갔다.

안셀이 멈추는 것을 보곤 나도 따라 멈췄다.

모자의 챙 너머를 살짝 들여다보자, 김이 올라가는 찻잔을 앞에 두고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긴장한 눈빛의 마멜라가 이쪽을 흘긋대고 있었다. 나는 마멜라를 바라보다가 그 옆, 테이블의 정중앙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다리를 꼰 채, 팔걸이에 올린 손 위로 가볍게 턱을 괴고 있는 꼴이 무척이나 오만해 보였다.

탐탁잖음이 묻어나는 그의 시선은 나와 안셀이 들어와 멈춰 서기까지 단 한 순간도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이딜로스는 그저 제 손에 들린 종이 문서만 계속 보고 있었다.

무관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태도에 숨이 막혔다.

‘아마 내가 안셀이 말한 양녀임을 증명하는 문서일 거야. 겁먹지 마.’

이딜로스는 여전히 종이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아펠리아 로제트라고?”

“예, 제 조카인 아펠리아 로제트라고 합니다.”

그가 종이를 훑어 내리며 확인차 물었다.

“입양되고 나서 몸이 허약해 줄곧 신전에서 지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제는 조금 호전되었다지만 언제 또 탈이 날지 몰라, 첫째 형님도 대신전과 가까운 카델라로트 영지를 고집하신 겁니다.”

“그렇군.”

이딜로스의 대답이 떨어지자 안셀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 옆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덩달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딜로스가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리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작게 내쉬던 그때였다.

차갑게 벼린 듯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런데.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나.”

“……예?”

이딜로스가 갑작스레 시선을 들었다. 그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모자에 얼굴이 가려지도록 고개를 숙였다.

이딜로스가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했다.

“네 조카는 입이 없나 보지. 병약하다더니 말하는 법까지 잊은 것은 아닐 테고.”

온기 없는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딜로스는 정말로 타인에게 무정하다는 것을.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예전에 이딜로스를 고양이로 처음 마주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날 이딜로스가 나를 내다 버리겠다고 했던 장면과 겹쳐져 손이 바르르 떨렸다. 무서워 죽을 것 같다…….

이딜로스의 싸늘한 시선이 내게로 옮겨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찰나지만 이딜로스의 숨소리가 짧게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의아함을 느끼자마자 이딜로스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 보십시오.”

“…….”

“아펠리아 양.”

심장이 부지불식간에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고는 시선을 들었다. 이딜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딜로스의 눈가가 한순간 좁아지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더.”

“…….”

눈앞에 마주한 두려움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손님이면 편안한 분위기로 맞아 줘야 정상 아닌가. 떨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그의 명대로 고개를 더 들었다.

완전히 그와 얼굴을 마주하자, 이딜로스의 표정이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하.”

곧 그가 입매를 비틀어 실소를 흘렸다. 마멜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나는 긴장한 채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딜로스는 한 치도 시선을 떼지 않고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안셀, 내가 찾던 숙녀분의 인상착의가 어떻지?”

“그, 그것이 말입니다, 전하. 저도 제 조카를 떠올리긴 했습니다만…… 신전에서만 지내 온 아이였기에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딜로스는 헛웃음과 함께 찻잔을 들었다. 그가 차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꼭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기분에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찻잔을 내려놓은 이딜로스가 나를 바라봤다. 그가 미소 지었다.

순간 손에 힘이 풀려 가방을 떨어트릴 뻔했다. 소름이 돋은 건 나뿐만이 아닌지, 안셀도 기겁한 소리를 흘렸다.

이딜로스가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느릿하게 말했다.

“아펠리아 로제트 양, 우린 구면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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