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안셀이 덧붙여 말했다.
“물론 형식상입니다. 괜찮은 구실을 대며 제가 전하께 우리 조카님 좀 잠시 맡아 주십시오,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조금 엉성한 방법인데.”
“예, 하지만 효과는 있을 겁니다. 전하께서 첫째 형님의 부탁이라고 한다면 거절하실 리가 없거든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하하, 전하께서 저희 형님께 신세를 지신 게 조금 있습니다.”
마멜라도 아는 게 있는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의문스러웠지만 말하기 곤란한 것일까 봐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그보다 의심이 드는 것이 있기도 했다.
“그럼 내가 너희 형의 딸이 되는 거야? 그래도 돼?”
“예, 뭐 안 될 건 없지요. 이런 터무니없고 갑작스러운 제안도 흔쾌히 응해 줄 사람이기도 하고.”
“…….”
“아무튼 수양녀에 관한 것은 형님께 소식을 전달해야 해결되는 것이니 뒤로하고 마멜라 아가씨께서 양녀로 입적하신 아릴 님이 공작저에서 머무르실 수 있는 구실을 생각해 주셨습니다.”
“으응? 마멜라가?”
“평소 독서를 많이 하시더니 이런 구실도 술술 만들어 내시더군요. 아릴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던 사이에 뚝딱하고 만들어 내셨지 뭡니까.”
“우와.”
내가 잠시 옷을 갈아입은 그 짧은 시간에 만들어 냈다는 건가? 늘 이상한 책을 읽는 줄 알았더니 모두 도움이 되는 책이었나 보다.
마멜라는 쑥스럽게 웃다가 문득 미소를 굳혔다.
“……그런데 이걸 위해선 신전을 조금 끌어들여야 하는데……. 아릴, 괜찮을까?”
“응? 문제가 돼?”
어리둥절하게 묻자 마멜라가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녀는 다시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내가 생각한 걸 알려 줄게.”
나는 마멜라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인간들의 일에 눈이 어두웠던 나였기에 마멜라는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꽤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처음엔 이해를 못 하고 되묻던 나는 뒤에 가서는 그냥 이해한 척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뜩이나 내가 커지면서 부쩍 작아 보이는 마멜라인데 나를 위해 계속 입 아프게 조잘거리는 것을 보니 병아리가 필사적으로 삐악거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계속 설명을 듣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결국 나는 마멜라가 말해 준 것의 절반 정도만 이해한 상태로 흘러가는 시간을 맞아야 했다.
어느덧 인간의 모습으로 이딜로스를 맞기로 한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창가에 엎드려 있던 나는 창밖의 나무들이 주홍색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어느덧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정말 갈수록 인간으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네.”
책상에 앉아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던 마멜라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내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최대가 여섯 시간이었는데 어제의 기록이 여덟 시간이야.”
“아옹…….”
마멜라가 장장 2주 동안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던 종이를 보였다. 그건 바로 내가 인간에서 다시 고양이로 강제로 돌아가는 시간을 기록해 둔 거였다.
고양이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니 이런 거라도 메모를 해 두어야 한다는 마멜라의 의견에 따르고 있었다. 상당한 도움은 된다만 불안과 충격도 함께였다.
이제는 이딜로스의 앞에 인간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뚜렷했다.
나를 따라 창가에 등을 기댄 마멜라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소 시간도 늘어났어. 일주일 전만 해도 네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다섯 시간이야.”
“…….”
“수인이란 존재는 정말 신비로워.”
마멜라의 표정에서 반짝이는 호기심이 느껴져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한 세대에 하나만 존재하는 생명체라니. 인간들에게는 신비로울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 부러울 뿐이었다.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보잘것없다는 것에 훨씬 가까웠다. 애초부터 나는 다친 채로 수풀에 덩그러니 떨구어져 있지 않았던가.
“아릴, 걱정하지 마.”
마멜라가 내 앞발을 붙잡으며 웃었다. 나는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마멜라가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나중이 되면 오라버니가 아릴이가 요즘 안 보인다고 찾겠다. 그럼 난 아릴이가 이제 오라버니랑 노는 게 질린 거라고 말할 거야.”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나는 픽 웃었다.
마멜라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 앞발을 놓더니 포동포동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릴이 너, 최근에는 계속 오라버니랑만 놀았잖아. 말없이 오라버니를 따라 황궁까지 가 버리고. 내가 그때 너 찾으려고 침대 밑까지 들어갔었어.”
“아옹…….”
말도 없이 황궁에 갔던 일은 여전히 미안했다. 그런데 내가 계속 이딜로스랑만 놀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있었다.
이딜로스가 좋아서 찾아간 건 맞지만 애초에 마멜라가 나랑 놀아 주지는 않고 『은밀한 연애 이야기』, 『두근두근 공주님의 사랑』 같은 책이나 읽어 대니 방을 나간 거였다.
“아옹.”
나는 불평을 담아 앞발을 휘둘렀다. 마멜라가 갸웃했다.
“응?”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아주 느리고 가늘게 울었다. 아아오옹.
그러자 마멜라가 해맑게 말했다.
“나 요즘 아릴이 너랑 수다를 자주 떨었더니 이제 네가 고양이일 때도 말 알아들을 수 있을 거 같아. 화장실, 맞지? 이리 와.”
“…….”
조금 어이가 없어진 나는 고개를 홱 돌리곤 창가에서 내려갔다.
“아릴, 어디 가?”
“아옹.”
순진한 목소리로 묻는 마멜라를 지나쳐 그대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뒤따라 나온 마멜라가 물었다.
“오라버니한테 가려고?”
용케 내 의도를 알아채곤 물어오는 마멜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멜라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졸졸 쫓아왔다.
“화장실은 안 가? 참으면 배 아야 해.”
“아오옹.”
“쫓아오지 말라고?”
“아옹.”
마멜라가 이번에는 웬일로 고양이 언어를 잘 알아들었다.
정말로 인간인 나와 대화를 하다 보니 나와 통하는 구석이 조금은 생긴 모양이었다.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마멜라를 바라봤다.
그런데 돌아가기는커녕 마멜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아릴이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같이 가자는 거지, 아릴?”
“…….”
그럼 그렇지. 마멜라는 역시 고양이인 나와는 안 통한다.
옛날엔 당연히 통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밥을 말하면 화장실에 데려다주고, 놀아 달라고 하면 밥을 주는 걸 보니 전혀 아니었다.
나 역시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는 마멜라의 말을 곡해해 버리곤 했지만, 이렇게 심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인간들 특징인 것 같다.
이딜로스도 그렇고 안셀도 그렇고…… 고양이의 마음을 그대로 알아채 주는 인간은 세상에 없었다.
아. 아슐란은 가능했던가?
나는 마멜라의 품에서 버둥거리기를 포기하곤 얌전히 안겼다.
마멜라는 헤실헤실 웃으며 내 털은 항상 부드러워서 기분 좋다며 마구 쓰다듬었다.
‘내가 수인인 걸 알게 되었는데도 태도가 변하지 않은 건 마멜라뿐이야.’
특이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태도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를 정중히 대하는 안셀과 요나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 같은 게 없었다.
비록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마멜라이지만 그녀는 나를 가장 생각해 주는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아릴,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어.”
불현듯 집무실을 앞두고 꺼낸 마멜라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하는 마멜라의 눈빛은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
“아옹?”
“이제 곧 넌 인간의 삶도 살아야 하잖아. 온전한 고양이로서의 삶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네가 힘들까 봐 걱정돼.”
“…….”
“나야 뭐, 네 비밀을 안다지만…… 넌 오라버니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게 고양이의 모습도 비춰야 하고 인간의 모습도 비춰야 하잖아. 그래도 정말 괜찮겠어?”
마멜라가 염려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딜로스에게는 내 본모습을 숨기고 싶었다. 설령 내가 스스로 고생길을 선택하는 것이라 해도 괜찮다. 그편이 이딜로스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떠안는 것보다 나았다.
고양이와 인간일 때 모두 미움받을지 모른다는 도박 위에 설 바에는, 인간일 때만 미움받겠다는 것이 내 선택이었다.
나는 그 정도로 이딜로스에게 내 존재를 미움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체 그까짓 미움이 뭐라고.
단순히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한 감정이었다.
마멜라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내 끄덕거림 한 번에 걱정이 담긴 눈빛을 모조리 지워 내고 해사한 웃음만을 남겼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마멜라가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노크도 없이 들어가는 게 이제 습관으로 굳어 버린 건지 그녀의 표정에는 망설임도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진심으로 잘리고 싶은 건가, 안셀.”
“……?”
“전하,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안셀이 애걸복걸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이딜로스는 코웃음 쳤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뒤편에 선 우리에게 닿았다.
와락 찌푸려져 있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더니 안셀을 대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멜라, 무슨 일이야? 아릴까지 데리고.”
“아…… 아릴이가 오라버니를 보고 싶어 해서요.”
“……그래?”
이딜로스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게 보였다. 안셀은 경멸감이 살포시 어린 눈빛으로 금세 다정한 모습으로 둔갑한 이딜로스를 흘겨봤다. 그 모습에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이딜로스는 자개 빛 같은 은은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멜라, 모처럼 찾아왔으니 다과를 준비하라고 할까? 뒤뜰에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으니 그곳에 자리를 준비해도 좋겠구나.”
이딜로스의 눈앞에 있는 안셀은 완전히 없는 존재 취급이었다. 안셀은 눈으로 욕을 한 사발 퍼붓고 있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한 대 칠 수 있으면 지금쯤 이딜로스는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잠깐. 그래선 안 되지.
내 소중한 긁개가 다치면 안 되지 않은가. 이딜로스가 긁어 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잃을 수는 없다.
내가 몸을 파르르 떠는 것을 느낀 건지 마멜라가 나를 토닥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던 것 같았는데 제가 방해한 것 같은걸요.”
“……쯧.”
이딜로스가 혀를 차며 안셀을 째려봤다. 왜 하필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거냐는 불만 가득한 눈빛이었다.
서로의 눈빛 싸움에 피라도 튀기진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안셀은 그새 능력 있고 친절한 보좌관의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마멜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 거예요? 아, 혹시 제가 알아선 안 될 이야기인 건가요……?”
“안 될 거야 없지. 너도 들으면 분명 어이없어할 거야.”
“뭔데 그래요?”
“안셀이 자기 조카를 잠시 맡아 줄 수 없겠냐고 묻더군. 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딜로스의 말에 나와 마멜라는 그 자리 그대로 굳었다.
안셀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자꾸만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안셀이 이딜로스에게 귀띔 정도는 해 두어야 할 것 같다며 그래도 되겠냐며 내 허락을 구했었다.
그런데…… 귀띔부터 가로막혔구나.
안셀은 자기 첫째 형님의 부탁이라면 이딜로스가 들어줄 거라더니. 설마 그것도 허풍이었나.
그게 아니면 이딜로스가 거기까지 듣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는 건데.
최근, 황궁에서 내가 아릴이라고 밝히려고 했을 때 내 말을 아주 가래떡처럼 뚝뚝 끊고 제멋대로 받아들이던 이딜로스의 철벽이 떠올랐다.
‘……불쌍한 안셀.’
바로 내일이 계획을 개시하기로 한 날인데 첫 장부터 막히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쩌지, 다시 회의를 열어서 미뤄야 하나……?
그때였다. 마멜라의 환한 목소리가 들렸다.
“와아, 전 좋아요! 저 친구 생기는 거죠? 너무 기대돼요. 언제부터 와요? 나이는 몇 살이에요?”
마멜라의 해맑은 질문 폭탄에 이딜로스의 표정에 당혹감이 섞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