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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56화 (53/191)

56화

‘왜 하필 지금……!’

절망감이 완전히 뻗어 가기 전 나는 서둘러 무릎을 모으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몸을 할 수 있는 대로 작게 웅크렸다.

두 손에 닿는 머리칼의 부드러운 감촉이 이것이 현실이 맞단 걸 몸소 느끼게 해 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필, 하필 이럴 때만…….

이딜로스는 남을 싫어하는데. 나는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예전엔 마멜라나 이딜로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내 모습을 들켜 미움받게 될 거라면 인간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신께서 내 생각을 엿듣고 인간으로 만들어 주신 거라면 제발 원래대로 되돌려 달라고 빌고 싶었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단 도망치자. 어서 숨어야 해.’

다행인 점은 여태까지는 인간이 되더라도 금방 고양이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거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긴장으로 굳은 다리를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뒤편에서 수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딜로스가 있던 방향이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대로 굳어 버린 나는 그 소리를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머리를 감싼 손을 더 세게 아래로 누르며 몸을 더 작게, 이대로 그가 나를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작아지게 꾹 내리눌렸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쳐 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소리가 뚝 멈추었다.

수풀을 스치며 내던 발소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풀벌레의 소리가 메웠다.

이어지는 고요함에 나는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다.

‘간 건가……?’

머리를 세게 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을 조금 풀었다. 억지로 누르고 있던 고개가 살짝 들렸다. 아무런 소음 없이 온전히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가 반가웠다.

참고 있던 숨을 작게 토해 냈다. 폐에 밀려드는 산소와 함께 안도감이 차올랐다.

‘다행이야. 연회장에 들어갔나 봐. 이 모습으로 다시 마주치지 않아서 정말…….’

그때였다.

뭔가가 내 오른쪽 손목을 붙잡아 확 끌어당겼다. 위로 끌려 올라간 나는 자못 익숙한 상황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만큼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늘 좋아하기만 하던 향이 훅 끼쳐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눈앞의 상대에 부딪히지 않게 중심을 잡았다.

이마를 박지 않고 무사히 멈춰 선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라펠 핀을 바라봤다.

이딜로스가 하고 간 푸른색 보석에 체인이 연결된 그것과 같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의 브로치만 바라보는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나타났군.”

“…….”

“이번엔 네 정체가 대체 뭔지 알아내야겠어.”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느끼며 꼼짝 않고 있었다. 아니, 그보단 굳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믿고 싶지 않은 상황에 시야가 점차 흐릿해졌다.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말아 쥔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고개가 붙잡혀 강제로 들어 올려졌다.

흔들리는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울어?”

“…….”

“내가 뭘 했다고 그러지? 넌 내게 더할 짓도 할 거잖아, 안 그런가?”

경멸감 섞인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던 그가 턱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누가 시켜서 날 쫓아다니는 건지 불어. 보나마나겠지만…….”

“…….”

“……하, 이젠 말 못 하는 척도 하는 건가?”

이딜로스는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의 손이 턱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늘 펜을 쥐고 있던 길고 예쁜 손이 목에 닿는 순간 나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진심이다. 나를 명백한 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는 가볍게 붙잡은 내 목을 금방이라도 움켜쥐고 비틀 수 있다는 듯 싸늘하게 바라봤다.

나는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야만 했다.

“나, 나는,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그의 손에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내 목을 잡아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참아 내지 못한 눈물을 툭툭 떨구며 절박하게 입을 열어야 했다.

“제발 믿어 줘…….”

심장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것 같아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이딜로스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내 차림새를 훑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울컥 치솟는 눈물을 가라앉히며 말을 마저 내뱉었다.

“저기, 난 모, 못된 사람이 아니라……. 너의 고, 고…….”

“이렇게 하지.”

한창 고양이라는 말이 나오질 않아 애쓰고 있는데 그가 내 말을 뚝 끊었다. 목을 움켜쥔 이딜로스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지는 게 느껴졌다.

“널 황실 경비대에 넘기겠다.”

나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관찰하듯 나를 보며 느릿하게 입을 뗐다.

“싫은가?”

“그,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그의 서늘한 금색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왜 무단 침입자 따위의 말을 들어야 하지? 왜, 나는 무섭지 않으면서 황실은 무섭나?”

……말이 통하질 않는다. 무슨 말만 하면 다 끊어 버리기 일쑤인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대로 지난번처럼 이딜로스를 기절시키고 도망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다면 그는 인간인 나를 더 경계하게 될 거다. 차라리 지금 그의 눈앞에서 고양이가 된다면 이 상황보다 나을까.

누가 봐도 지금 내 모습을 싫어하는 것 같은 그의 눈앞에서…….

역시 싫다.

대체 왜 자꾸 이딜로스의 근처에 있을 때만 인간이 되는 걸까.

나는 서러움에 차오르는 눈물을 소리 없이 펑펑 흘렸다.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그의 눈을 마주 봤다.

그런데 착각일까, 그의 눈빛의 온도가 점점 변하고 있는 것 같다.

“황실 경비대에 잡혀가긴 싫어?”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못된 인간으로 몰려 붙잡혀 가야 하는 신세라면 황실보다는 카델라로트에 끌려가는 게 나았다.

이딜로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황실에 넘기겠다는 건 무르지. 대신 내가 시키는 걸 따라야 할 거다.”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울던 것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눈썹 끝에 걸려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선택해. 황실에 잡혀갈지 아니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할지.”

코를 한 번 훌쩍인 나는 고민할 새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시키는 대로 할게…….”

그 순간 그가 내 목을 놓았다. 갑작스레 공기가 밀려들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그를 경계하듯 바라봤다.

무섭다.

‘날 물고문하면 어떡하지. 어쩌면 여덟 시간 동안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으라고 할지도 몰라.’

겁에 질린 눈길로 그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나에게 시킬 온갖 고난과 역경을 상상하고 있자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파트너 역할을 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귀를 의심하며 그를 바라봤다.

“……파트너?”

“그래.”

그가 턱짓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연회장을 가리켰다.

“네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내가 알아서 판단하지. 나한테 이용당하기만 하면 넌 무사할 수 있는 거다.”

짐짓 친절하게 말하는 그였다.

하지만 나는 이딜로스가 하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저곳엔 다른 인간들이 많은 것 같았다. 여기까지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웅성대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저기서 단체로 나를 구박할 셈인 건가……?’

내가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채 바깥과 이어진 황궁의 거대한 정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선 따라와.”

그는 바깥에 세워진 마차에 가서 나를 태운 뒤 던지 듯 담요를 건네었다.

“걸쳐.”

시키는 대로 잠자코 담요를 둘러매자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이딜로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심장을 졸였다.

이러다 갑자기 고양이로 변하면 어떡하지.

여태껏 이렇게 오랫동안 인간이 되어 있던 적이 없었기에 눈앞이 암담했다. 나는 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숙였다.

마차가 멈추자 이딜로스는 나를 끌고 의상실로 보이는, 무척 크고 번쩍거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붙잡힌 채 끌려 들어가자 점원들로 보이는 이들이 각 잡힌 태도로 열을 지어 우리에게 정중히 인사를 해 왔다.

깜짝 놀라기도 잠시 나를 흘깃대는 시선들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나는 부담스러움에 이딜로스에게 붙잡혀 있는 손목만 바라봤다.

그들 중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로비드 님께선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런가. 오늘은 그를 만나러 온 건 아니고 연회에서 입을 의상을 좀 보러 왔는데.”

이딜로스가 나를 흘겨보자 지배인의 시선도 뒤따라 내게 머물렀다. 나는 힐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내가 이딜로스의 뒤로 살짝 숨자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 파트너다. 연회장에서 가장 눈에 띄게 하도록.”

이딜로스는 그대로 나를 어느 방으로 끌고 가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혔다.

“기다려.”

그가 짧게 명령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화려하고 커다란 방에 홀로 남은 나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이딜로스가 흘리고 간 냄새 이외에는 모든 게 낯설었다.

잠시 후 점원 같아 보이는 여자들이 드레스와 장신구, 구두가 걸린 옷걸이를 주르륵 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어째선지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내 옷을 멋대로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껏 상황을 파악했다.

‘내 원래 차림으론 그곳에 갈 수 없으니 이곳에 데려온 거야.’

나는 입을수록 숨이 턱턱 막히는 인간들의 옷을 참아 내며 잠자코 있었다. 황실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이딜로스를 얌전히 따르는 게 나을 테니까……. 아마도.

앞날에 대한 한숨이 나왔다.

그간 이딜로스가 나를 마주할 때마다 찢어 죽일 듯이 노려봤으며 나를 무단 침입자로…… 더 나아가 카델라로트에 해를 끼치러 온 못된 인간으로 여긴 것을 떠올리면 이딜로스를 따른다고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가씨, 여기 좀 봐 주세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나는 눈을 떴다. 실컷 내 얼굴을 만지작대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더니 드디어 끝났나 보다.

시선을 들자 동그란 원형 거울을 들고 있는 점원이 보였다. 왜 보라는 거지?

내가 그 점원을 멀뚱멀뚱 바라보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아래를 가리켰다.

“아가씨…… 여기 거울요.”

아, 내 상태를 확인하란 거였구나.

나는 그제야 깨닫고 거울로 시선을 내렸다. 처음엔 몇 차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미심쩍은 눈으로 인상까지 쓰며 거울을 바라봤다.

……내가 아닌데?

나는 예전에 꿈속에서 보았던 얼굴의 잔상을 떠올리며 의심의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다른 인간의 얼굴을 가져와 놓고 거울인 척하는 거야?

나와 시선이 마주친 점원들이 입을 틀어막더니 선망 어린 눈을 했다. 개중에는 감탄을 작게 터트리거나 홀린 듯 보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며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정말로 내가 맞는 걸까 싶어 달빛이 흘러내린 듯한 머리칼을 한 줌 손에 쥔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더니 반가운 사람이 들어왔다.

근처에 있던 점원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였다.

“끝났으면 나가 보도록.”

“예, 전하.”

그의 짧은 한마디에 그 많던 인간들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문이 철컥 닫히며 손님방에 둘만이 남게 되자 그는 내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반은 반가움으로 반은 경계심으로 그를 지켜봤다.

“역시.”

그가 내 앞에 서자마자 한 말이었다.

의미를 짐작하기엔 너무나 불충분한 부분이 많았다. 그의 눈빛이 불쾌함보다는 이채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것만 어렴풋이 유추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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