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공작 전하, 제 주군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성가신 한숨 소리가 들렸다. 몽롱한 정신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거절하겠습니다. 연회가 끝나거든 찾아오라 전하십시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맞춰진 초점에, 옆자리에 있어야 할 이딜로스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자 창가 옆 티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서류를 훑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의 길게 뻗은 속눈썹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그 예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앞발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간밤에 불편하게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무심결에 앓는 소리를 내자 이딜로스가 이쪽을 바라봤다.
“일어났어?”
“아옹.”
나는 침대에서 몇 차례 뒤척이다가 내 털 상태를 살폈다. 경악에 차서 입이 벌어졌다.
어쩐지 느낌이 조금 이상하더라니. 이딜로스가 자면서 나를 얼마나 쓰다듬어 댄 건지 털이 아주 엉망이었다. 나는 울상을 지은 채 내 부스스한 털을 내려다보다가 이딜로스를 원망스레 노려봤다.
이딜로스가 무구한 눈으로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불편한지 평범한 인간은 절대 모른다.
씨잉……. 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앞발부터 털을 그루밍했다. 창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빤히 구경하던 그가 나를 불렀다.
“아릴.”
나는 그의 부름을 무시하곤 열심히 털을 정리했다. 이딜로스가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고 있는데 저 정도 방해는 무시할 권리가 있지 않나.
잠시 후, 달그락하고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다가왔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내가 기껏 정리해 둔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놀아 줄까.”
고개를 들자 생기가 감도는 금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말은 물음이었지만 눈빛은 내가 함께 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지난번부터 느낀 건데…… 왠지 이딜로스가 나를 놀아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이딜로스를 놀아 주는 것 같다. 나보다 이딜로스가 더 즐기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그루밍을 멈췄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딜로스가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장난감을 들어 올렸다.
‘……요망하고 귀찮은 인간 같으니.’
* * *
이딜로스는 자신이 했던 말대로 나를 두고 나가지 않으려 했다.
매일매일 새로운 손님이 이딜로스를 초대했지만 그는 모든 청을 거절했다. 매번 피곤하다느니 바쁘다느니 핑계를 대면서.
그래 놓고 정작 하는 일이라곤 나와 놀아 주는 것뿐이었다.
식사도 그랬다. 첫날 저녁은 바깥에서 하고 왔지만 그 후로는 방 안에서 모든 식사를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밖을 나가지 않는 걸 이상하다고 여기기엔 너무나 이딜로스다운 모습이기도 했다.
요즘엔 나를 데리고 똥개 훈련을 시키는 것에 취미를 붙여서 종종 밖을 나온다지만 예전엔 집무실에 박혀 꼼짝을 않던 인간이지 않던가.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이곳에 머무를 것 같던데 이럴 거면 뭐 하러 따라왔나 싶었다. 온종일 안락한 방 안에 죽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그러나 머무른 지 사흘째 되는 날. 평소와는 다른 아침을 맞았다.
나는 긴장을 머금은 채 창가에 앉아 그가 하는 양을 주시했다. 이른 아침부터 이딜로스가 외출복을 차려입기 시작한 것이다.
마른침을 삼킨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내가 나서서 이딜로스를 지켜야 할 때가 온 거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딜로스가 처할 온갖 위험 상황들을 상상하며 어떻게 그를 도울 것인지 생각했다.
‘솜뭉치인 척 얌전히 있다가 이딜로스가 위험에 처하면 기습하는 거야.’
앞발 펀치를 날려 이딜로스를 위협하는 못된 인간들을 때려잡으면 분명 이딜로스도 내 듬직한 모습에 반할 것이다. 이딜로스는 고마운 마음에 나한테 간식을 산처럼 쌓아 선물할 테고, 나는 안셀을 부려 먹으며 여생을 편안하게 간식 언덕 위에 집 짓고 사는 거야…….
변질된 상상을 이어 가며 만족스럽게 웃은 나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이딜로스의 발치로 쪼르르 달려갔다. 만약 날 데려가지 않으면 박력 있게 그의 앞을 가로막을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이딜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아릴.”
나를 덥석 안아 든 이딜로스는 곧장 문으로 향했다.
뭐야, 나도 데려가는 거였어?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문밖을 나오자마자 곳곳에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대부분이 궁내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었는데 우리를 보곤 눈을 비비는 인간도 여럿 있었다. 나는 부담스러워서 이딜로스의 옷 안으로 숨고 싶었다.
이딜로스가 고양이를 데리고 있는 게 그렇게 신기할 일인가?
뭔 동물원의 동물 보듯 쳐다보고 있는 시선들을 나는 마주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건 약과에 불과했음을 궁을 나오고서야 깨달았다.
이딜로스가 잘 조성된 길을 따라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들이 달라붙었다.
그중 대부분이 이딜로스처럼 이곳에 온 손님들 같았는데 다들 경악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는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렸다.
나는 그들을 힐긋대다가 부담스러움에 못 이겨 결국 땅을 바라봤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이딜로스…….’
하필 이딜로스는 화창한 날씨면 더 눈에 띄는 인간이었다. 머리칼부터가 햇살만큼이나 눈부신 색이지 않나. 만약 내가 저들 중 한 명이었다면 이곳에서 이딜로스밖에 보이지 않았을 거다.
내리꽂히는 시선이 과해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잘 닦인 그의 구두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문득 그의 겉옷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딜로스의 옷이 왜 이렇지?’
자세히 살펴보니 주머니 속에 익숙한 뭔가가 들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나는 눈이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털실 공, 내가 환장해 마지않는 그 털실 공이었다.
‘……이걸 왜 넣고 가는 거야? 대체 어딜 가는 건데?’
불안감이 몰아쳤다. 설마 똥개 훈련은 아니지? 이딜로스만 즐거운 그 공놀이는 아닌 거지……?
저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묵묵히 걸음을 옮긴 이딜로스는 분수대가 있는 넓은 정원을 지나쳐 웬 언덕에 도착했다.
맑은 하늘과 맞물린 푸르른 언덕이 눈을 탁 트이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는 언덕 아래의 풀밭에 나를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볕이 쨍쨍한 탓인지 이딜로스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싫으면 나오지 말 것이지 왜 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신경 쓰이게.’
나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인간의 모습이었더라면 저런 햇빛 따위는 손을 들어 가려 줬을 텐데.
그 무심결의 생각은 곧 경악을 몰고 왔다. 미친 게 분명했다.
‘애초에 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이딜로스는 내가 가까이도 못 오게 할 텐데…….’
이딜로스는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데다가 인간 모습의 나는 싫어하다 못해 침입자로 취급하지 않던가.
나는 낯선 언덕을 탐색하듯 빙 둘러보며 냄새를 맡았다. 밀려드는 꽃향기에 기분이 산뜻해지기는커녕 침울해지기만 했다.
망설이며 이딜로스를 돌아보자 공을 꺼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릴, 넌 밖에서 노는 걸 좋아했지.”
설마 내가 방 안에서 심심할까 봐 데리고 나온 건가. 허구한 날 마멜라와 함께 정원을 뛰어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집무실 창 너머로 그가 우리를 보고 있던 걸 종종 발견하곤 했으니까. 아마 이딜로스에게 내 존재를 들켰을 무렵부터 아주 꾸준히 그래 왔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마멜라와 놀던 것도 잊고 그의 집무실을 마주 올려다보곤 했다. 얄팍한 유리창 하나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 거리감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는데…….
나는 어느새 겉옷을 벗어 두고 소매까지 걷어 올린 그를 바라봤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걸까.
막 회상에 젖어 들려던 때 공이 머리 위로 휭 날아갔다.
“물어와, 아릴.”
회상을 깨부수는 이딜로스의 한 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아, 맞다. 똥개 훈련…….
한순간에 기분이 구려진 나는 공이 날아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애초에 이 공은 내가 굴리고 노는 용도이지 원반처럼 던지고 노는 용도가 아니었다.
분명 가벼워서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는 공인데 어째선지 이딜로스가 던진 건 저 언덕 꼭대기까지 날아갔다.
하필 와도 언덕이야, 왜!
나를 생각해서 데려와 준 이딜로스의 마음을 무시할 생각은 없으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장소 선정이 아닌가……!
수풀을 굴러다니는 공을 겨우겨우 물고 그에게로 돌아가자 엄청난 배신감이 뒤통수를 때려 왔다.
나는 이렇게 쨍쨍한 볕 아래에서 헥헥대며 고생하는데 이딜로스는 언덕 아래 배롱나무 그늘에서 아주 편안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그가 공을 가져가며 내뱉는 말에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었다.
미처 짜증을 내기도 전에 공이 다시 하늘을 날았다.
“이번에 갔다 오면 간식 줄게.”
기가 차서 그의 구두를 내 앞발로 찍어 누르고 싶었지만 굴욕스럽게도 내 몸은 간식이라는 말에 반응해 이미 공을 쫓아가고 있었다.
간식을 내걸다니, 이 못된 인간…….
지친 숨을 내쉬며 언덕 위에 떨어진 공을 물었다. 속으로 온갖 불만을 구시렁대며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저 멀리 이딜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의 곁에 보이는 낯선 인간은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드러내고, 얼굴은 양산으로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가 움직이면서 양산이 비스듬히 기울자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저 인간을 마주하고 있을 이딜로스를 보니 가슴이 갑갑하게 조여 오기 시작했다. 불쾌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휘감아 올라왔다.
나는 공을 내팽개치고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한시 빨리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의 앞에서 저 인간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무르는 일분일초를 모조리 빼앗아 가고 싶었다.
“아옹!”
마침내 언덕을 거의 내려갔을 때 소리쳤다.
이딜로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떠나가지 않기를 바라며 서둘러 발을 굴렀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급했던 나머지 발을 헛디뎠다. 눈코 뜰 새도 없이 발이 아래로 쑥 미끄러졌다.
‘으, 으악……!’
부지불식간에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자 시야가 하늘과 땅으로 빙빙 뒤바뀌었다. 눈앞이 핑핑 돌아 엄청난 멀미가 솟구칠 때였다.
폭, 누군가 아래에서 나를 받았다.
익숙한 향기가 바람을 따라 끼쳐 왔다. 흐트러진 초점을 바로잡자 걱정과 당혹스러움이 담긴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아릴, 괜찮아?”
이딜로스의 품이었다.
맥이 탁 풀린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긴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배롱나무 밑이 아니었다. 그가 굴러떨어지는 나를 붙잡으려 볕이 내리쬐는 이곳까지 달려온 걸까.
그때 옆에서 수풀을 사뿐히 짓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함을 가지고 고개를 들어 보기도 전에 걸음 소리가 멈추더니, 청아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어머, 공께서 고양이를 기른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게 진짜일 줄은 몰랐어요.”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웃음을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보석 같은 녹색 눈이 보였다.
그녀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가 모르는 공의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