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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52화 (49/191)

52화. 공작의 약혼녀

어제 이딜로스가 떠난다고 했던 걸 들은 나는 새벽녘부터 몰래 그의 방 침대 밑에 숨어들었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어렴풋이 들리는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는 새벽 내내 숨어 있었던 침대 밑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언제나 맡기 좋은 향기가 방 안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고막을 후비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이딜로스는 씻고 있나 봐. 지금이 기회야.’

나는 방 한구석에 펼쳐진 이딜로스의 짐으로 추정되는 네모난 가방에 다가갔다. 옷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들어간 가방 안을 보며 망설였다.

‘내가 따라가야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이딜로스를 구해 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가도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으면 어쩌지…….’

고민이 길어질 동안 물소리도 이어졌다.

한번 들어가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나는 가방에 정리된 옷가지들을 조심스레 들추고는 작은 몸집을 옷 사이로 구겨 넣었다.

물소리가 멈췄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딜로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참 부스럭대는 소리가 이어진 끝에 이딜로스가 다가왔다.

그가 벌어진 가방을 닫은 건지 시야에 점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이내 캄캄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런데 내가 가방을 비집고 들어간 탓인지 가방 안이 생각보다 더 비좁았다.

잘못하다간 가방이 터지기라도 할 것 같아서 배에 힘을 주고 포동포동한 배를 어떻게든 집어넣으려 했다. 아마 밖에서 봐도 가방이 볼록할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가방이 덜컥 소리를 내더니 열리기라도 한 건지 틈새에 빛이 스며들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이딜로스가 이상함을 느끼고 가방을 뒤적이려 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딜로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옷을 너무 많이 챙겼나?”

곧 이딜로스는 가방을 억지로 꾹 눌러 닫았다. 나는 그에 응하며 힘껏 배를 밀어 넣었다.

이딜로스가 가방을 챙겨 든 것인지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흔들거렸다.

문을 여닫는 소리와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다가, 내 몸이 다시 바닥에 내려앉은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사실 은근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안심했다. 이 짐이 이딜로스가 들고 가는 게 아니었다거나 시종이 짐을 이딜로스와 떨어진 다른 곳으로 옮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딜로스는 직접 이 가방을 들고 마차에 올라 제 옆에 둔 것 같았다.

“출발하지.”

낮고도 짤막한 목소리와 함께 가방이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앞에 있는 이딜로스의 셔츠를 킁킁대다가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새벽부터 그의 침대 밑에 숨어서 언제 그를 놓칠지 몰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참을 새도 없이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꿈속에서 지난번에 먹은 적 있던 고기가 나왔다. 먹음직스럽게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육즙은 좔좔 흐르는 두툼한 고기를 크게 베어 물려고 입을 아, 벌렸다.

고기가 입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윽.”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충격에 찌뿌둥한 몸으로 눈을 스르르 떴다.

“…….”

그런데 왜 보여선 안 될 빛이 보이는 것이며 시야는 뒤집혀 있는 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있던 뚱뚱한 가방이 열렸고. 내가 지금 옷가지들에 거꾸로 널브러진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위에서 이딜로스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왜 갑자기 멈춰 서선…….”

시선을 내리던 달콤한 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이딜로스의 눈이 커졌다.

내가 여태 본 이딜로스의 표정 중 가장 바보 같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 * *

소리 없이 부드럽게 마차가 멈췄다. 이딜로스는 차창 밖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줄곧 창밖으로 시선이 팔려 있던 나는 나를 안아 드는 이딜로스의 손에 고개를 들었다.

이딜로스의 얼굴은 불쾌하다는 듯 구겨져 있었다. 혹시 내가 멋대로 따라와서 기분이 나빠진 걸까.

그는 마차가 멈출 때까지도 내게 제대로 된 말을 걸지 않았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조용히 나를 응시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댈 뿐이었다.

나는 이딜로스의 팔을 꼭 붙잡았다.

‘난 네가 걱정돼서 따라온 건데…… 싫은 거라면 미안.’

이딜로스가 마차에 내리며 내게만 들리도록 낮게 말했다.

“여기선 함부로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만 붙어 있어.”

그는 나를 안은 채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을 지나 황궁의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옆으로 줄줄이 서 있던 기사들이 외계인이라도 본 것 같은 눈빛으로 우리를 흘겨봤다.

나는 들러붙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이딜로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분명 내가 이딜로스를 지켜 주러 온 것인데 안락함과 안전함을 느끼는 건 그의 품 안에 있는 나였다.

그의 걸음 소리는 흙을 밟는 소리에서 잘 다듬어진 돌길을 밟는 소리로, 그리고 대리석을 밟는 소리로 바뀌었다. 이딜로스가 어딘가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어서 오너라. 기왕 참석할 거라면 마멜라도 데려오지 그랬니.”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불쾌한 목소리와 ‘황후’라는 단어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긴 눈꼬리를 가진 갈색의 눈이 휘어졌다.

“이런, 고양이를 데려왔구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이딜로스의 품에 바짝 달라붙으며 황후를 노려봤다.

내가 겁먹었다는 걸 아는지 이딜로스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한데 별다른 말씀이 없다면 빨리 들어가고 싶군요.”

황후에게 내뱉기엔 퍽 무례한 말이었다. 황후가 한차례 웃음을 내뱉었다.

“난 네 시건방진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든단다. 네 침방은 네가 어릴 적부터 쓰던 그곳이니 가 보거라.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들도 준비하라 이르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있을 폐하와의 만찬에 늦지 말거라. 폐하께서 널 무척 보고 싶어 하신단다.”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조카에게 무척 다정한 친척 어른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우악스럽고 저질스러운 면모를 안다.

나를 받쳐 든 이딜로스의 팔에 힘이 더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딜로스는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계단을 몇 차례 올라, 공작저보다도 화려해 보이는 복도를 거닐자 이딜로스가 황궁에서 지낼 침실이 나왔다.

철컥, 문을 닫자마자 이딜로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결같군.”

조금 전 황후의 태도에 하는 말인지 아니면 어릴 적부터 썼다던 넓고 화려한 이 침실을 보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은 한없이 저조해 보였다. 나는 일부러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눈을 둥글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그의 찌푸려진 표정이 풀어졌다.

이딜로스는 나를 데리고 가 소파에 푹 기댔다. 그가 나를 무릎에 내려놓고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릴, 몰래 숨어서 따라올 정도로 내가 좋았어?”

그의 말에 꼬리를 살랑거리던 걸 멈췄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 소리람. 걱정되어서 따라온 거지 좋아서 쫓아온 게 아니었다.

이딜로스의 헛소리에 들어 줄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그가 픽 웃었다.

“쫓아다닐 땐 언제고 왜 귀찮다는 태도지?”

“아옹.”

그의 무릎에 풀썩 엎드렸다. 이딜로스는 내 턱 밑을 긁어 주며 입매를 올렸다.

“마멜라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네가 없어져서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이딜로스의 말에 아차 싶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분명 마멜라는 내가 없어져서 놀랄 텐데 무슨 생각으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온 걸까……. 아, 알릴 수가 없지 참.

한창 그의 손길에 고롱대고 있자 이딜로스가 말했다.

“내가 좋아서 따라온 게 아니면 대체 왜 따라온 거지?”

“…….”

“말해 봐, 아릴.”

낮게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말해 보라고?

설마 내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그래서 내게 말해 보라고…….

“넌 사람 말을 곧잘 알아들을 정도로 영특하니 말도 할 수 있겠지?”

……그냥 뭘 잘못 먹은 거였구나.

나는 이딜로스의 손을 앞발로 살짝 쳤다. 헛소리 말고 더 열심히 긁어 보기나 해.

* * *

저녁때가 되자 이딜로스는 시종들이 가져다 줬던 고양이용 그릇에 사료를 부어 줬다.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내 밥그릇을 보다가 막 사료 봉투를 거두어 가는 그를 아연히 바라봤다.

나를 본 이딜로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너무 적나?”

아니, 적어? 이게?

나는 그릇 위로 수북이 언덕을 이룬 사료를 바라봤다. 이딜로스 눈엔 내가 이렇게 많이 먹을 것처럼 보이나?

내가 살이 포동포동하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걸 어떻게 다 먹어. 맛도 없다고!

“아옹!”

내가 고개를 홱 치켜들고 날카롭게 울자 이딜로스가 한 걸음 흠칫 물러났다.

“……더 달라고?”

아니! 답답하긴, 진짜.

생각해 보면 이딜로스가 내게 밥을 준 경험도, 내가 사료를 먹는 걸 본 적도 없긴 했다.

이딜로스 곁에서 죽치고 있다가도 늘 때가 되면 마멜라의 방으로 가서 먹었으니…….

더 일갈했다간 겁먹은 그가 내 옆에 다가오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를 한 번 째려보곤 사료를 마구마구 먹었다. 남겨 놓으면 내 입이 이것밖에 안 되겠구나 생각하겠지 뭐!

“많이 먹어야 어서 자라지. 넌 너무 작아.”

아픈 곳이 찔려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나도 자라고 싶긴 한데 이렇게 먹으면 위로 안 자라고 옆으로 자란단 말이야…….

눈물 맛이 나는 사료를 먹고 있자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작 전하, 폐하의 명으로 식사 자리에 모시러 왔습니다.”

“……가지. 아릴, 다녀올게.”

이딜로스는 어쩐지 불안감을 거두지 못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다.

나는 그가 나가자 사료를 먹을 만큼 먹고 목도 축인 후에 주변을 둘러봤다.

이딜로스가 어릴 적부터 머물렀다는 방이어서일까, 그의 냄새가 가득한 것 같다.

가지고 놀 장난감이 없었기에 방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어떤 서랍장을 지나치고 있을 때, 서랍장 밑의 틈새에서 뭔가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낮은 눈높이인 내게만 겨우 보이는 서랍장 아래를 들여다보다가 앞발을 밀어 넣었다.

서늘한 감촉과 함께 앞발이 따끔거렸다.

‘뭐지?’

앞발을 빼내자 서늘한 감촉의 정체가 보였다.

‘……유리 조각?’

내 앞발만 한 크기의 뾰족한 유리 파편이었다. 거기다 표면에 말라붙은 검붉은 색의 무언가…….

그게 뭔지 깨달은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게 왜…….’

그때 문 앞에서 이딜로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녁을 먹고 온다더니,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당황한 나는 유리 조각을 다시 서랍장 밑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동시에 이딜로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릴.”

고개를 돌려 그를 본 나는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 이딜로스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물건이었기 때문에…….

그가 들고 있던, 자그만 털 물고기가 걸린 장난감 낚싯대를 보이며 미소 지었다.

“놀아 줄게, 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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