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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49화 (46/191)

49화

“아…….”

혹시 그가 다칠까 봐 얼떨결에 이딜로스의 머리를 감싸 안은 나는 등에 와 닿는 충격에 미간을 찡그렸다. 땅에 부딪힌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나는 몇 차례 끙끙대다가 고개를 내렸다. 이딜로스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얄밉게도 멀쩡했다.

나는 쓰러진 그대로 기진맥진하게 수풀에 뻗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기운을 뽑아냈더니 죽을 것 같다.

그래도 첩자 같은 걸로 오해받아 저택을 지키는 삼엄한 경비병들한테 끌려가는 것보단 나았다.

‘……여기선 어떻게 빠져나가는 게 좋을까.’

의식을 잃은 이딜로스는 힘이 쭉 빠져 무거웠고 삐끗한 발목은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기력이 돌아오면 그때 도망치자……. 지금은 온몸에 힘 하나 없으니까, 조금만 쉬다가…….’

몽글몽글한 뭉게구름의 개수를 세며 손으로는 끌어안고 있던 이딜로스의 머리칼을 무의식중에 쓰다듬었다.

‘와아, 부드러워. 이딜로스가 날 만질 때 이런 기분일까?’

손가락에 감기는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에 감탄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내려 킁킁 냄새를 맡았다. 고양이의 본능인지, 아니면 솔솔 풍기는 향기가 너무 좋아서인지. 나도 모르게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정신과 혼을 쏙 빼 버릴 것 같은 향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원래도 이랬나?’

언젠가부터 그랬다. 그의 시원한 향기에는 이따금 달콤하게 오감을 자극하는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분명 첫 만남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보단 요즘 이딜로스한테 신경을 더 많이 써서 그런가…….’

옅은 구불거림이 있는 그의 머리를 정성껏 쓰다듬어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아래에 깔린 다리를 움직여 보려고 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혼자 기다리고 있을 마멜라도 걱정되었다.

그때, 뜬금없게도 오싹한 생각이 번뜩였다.

‘잠깐만……. 이러고 있다가 지난번처럼 다시 고양이로 돌아가면. 나 깔려서 죽는 거 아니야?’

목덜미의 솜털이 삐죽 서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무거워 죽겠는데 그 조그만 몸으로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나는 필사적으로 여길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압사당한다. 깔려 죽는다!

그러나. 오늘 내게는 아무래도 운이라는 게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갑작스레 울렁증이 찾아오며…… 시야가 삽시간 만에 뒤바뀌었다.

* * *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말했을 텐데. 지금 내 눈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침대에 기대앉아 따뜻한 컵을 손에 쥔 이딜로스가 구겨진 표정으로 경비 대장을 노려봤다.

이걸로 벌써 세 번째. 세 번씩이나 같은 이유로 그의 침실을 들락날락한 경비 대장은 난처함에 어쩔 줄 몰랐다.

보다 못한 안셀이 나서서 말문을 뗐다.

“전하, 정말로 확실하게 보신 게 맞습니까? 그러니까 저택에 침입한 어떤 여인이 있었다 했지요……. 그 지난번, 전하께서 보셨다던 그 여인이 맞는지요?”

“그래. 몇 번을 말하나. 지난번에도 쥐새끼처럼 빠져나간 것 같으니 이번엔 영지까지 샅샅이 뒤져서 내 앞으로 데려와야 한다.”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은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혀를 덴 건지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컵을 내리곤 고개를 들었다.

안셀은 한숨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지난날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이딜로스는 갑자기 웬 여자가 자기를 덮쳤다고 주장하더니 그 여자를 찾아내라고 했다.

머리칼은 눈처럼 새하얗고 눈은 바다처럼 푸른 여자라고…….

은발을 잘못 본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아니랜다.

이 세상에 늙어서 희끗희끗해진 머리가 아닌, 날 때부터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말한 여자의 차림새는 더 기가 막혔다. 옷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의 네글리제 같은 걸 입고 있다고 했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둘러싼 자객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차림새.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카델라로트 저택에 침입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자라면 엄두도 내지 않을 것이다.

안셀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이딜로스의 상태를 살폈다.

‘역시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 같은데……. 방금도 쓰러져 있었다지.’

주인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느낌이라 안셀도 썩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딜로스의 주장은 현실성도 없었고, 그가 얼마나 과로를 즐기는지 잘 알았기에 그런 결론에 다다랐다.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한 모양인가 보다.’

안셀은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찡한 마음과 함께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간 제 친구가 자객들에게 얼마나 많이 목숨을 위협당해 왔던가.

그 탓에 이딜로스는 자연히 경계심이 높아졌고 남을 믿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뭐든 제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거리를 두고 그 상대를 떠보다가 매정히 돌아서기 일쑤였다.

안셀은 몇 년 전 겨우겨우 이딜로스의 사람이라는 범위에 엄지발가락을 걸친 경비 대장, 켈로인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켈로인은 이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제가 꼭 그 무단 침입자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래, 도망이 특기인 것 같았으니 유의해야 한다.”

“예!”

경비 대장이 침실을 나가자 이딜로스의 방에 남은 사람은 안셀과 마멜라, 방의 주인, 그리고 고양이 하나가 다였다.

마멜라는 울먹이면서 이딜로스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갑자기 쓰러져 계셔서 놀랐어요……. 아릴이가 발견해서 절 데리고 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몰라요.”

눈물을 머금은 마멜라의 말에 이딜로스는 그녀의 품에 안긴 고양이를 바라봤다. 조금 전 그의 화난 모습이 무서웠던 건지 마멜라의 품에 얼굴을 푹 묻은 채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딜로스가 찡그린 인상을 풀며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나도 왜 쓰러진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여자가 내게 이상한 짓을 한 게 분명해.”

비록 조금 전 의사가 와서 피로가 쌓인 것 말고는 모든 게 멀쩡하다고 했으나 이딜로스는 그 수상한 여자가 제게 뭔 짓을 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눈빛을 굳히며 여동생에게 당부했다.

“마멜라, 너도 조심해. 호위를 붙여 둘 테니 저택 안이라도 그를 떼어 놓지 마.”

마멜라는 고양이를 꼭 안은 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딜로스의 말도 안 되는 주장보다 그의 건강 상태가 더 걱정되는 표정으로.

이딜로스의 시선이 그녀의 품에 있는 고양이에 닿았다.

“아릴.”

고양이가 일순 흠칫하더니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마멜라가 이딜로스에게 아릴을 넘겨주었다.

“오라버니, 전 이만 가 볼게요. 푹 쉬세요. 꼭이요.”

“그래, 알았어.”

“전하, 저도 가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걸 부디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 수면 규칙을 지키셔야 합니다. 적어도 여섯 시간 이상 수면하셔야…….”

“알았으니 나가 봐라. 네 말을 듣다간 휴식이랄 게 없을 것 같군.”

두 사람이 나가자 마침내 그의 침실에는 고양이와 그, 둘만이 남았다.

아릴은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앞발의 털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자신을 들어 올리는 손길에 놀라 굳었다.

이딜로스는 고양이를 자신의 배 위에 올려 두곤 엄지로 아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네가 날 도와줬군.”

“…….”

아릴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딜로스는 조금 심통이 난 표정을 짓더니 문을 흘겨보곤 말했다.

“전부 내 말을 안 믿던 눈치던데. 아릴, 넌 봤겠지. 네가 그 수상한 여자를 쫓아내 준 거잖아.”

“아옹…….”

아릴이 시선을 피했다. 찔리는 구석이 많아 앞발에 땀이 찼으나 꾹꾹이를 하는 척 이딜로스의 옷에 땀을 눌러 닦았다.

‘운 좋게 압사당하지 않고 빠져나와서 다행이지…….’

그 수상한 여자가 바로 눈앞의 고양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이딜로스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양이가 유일한 제 편이라고 믿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아릴은 시선을 요리조리 회피하다 말고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가 줄곧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두 눈이 단번에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게 녹아 있었다. 사랑스러운 애정이 묻어난다는 착각마저 들어 아릴은 숨이 막혔다.

이딜로스가 이제 정말로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설렘과 자신이 그 여자라는 걸 들키게 되면 다시 싸늘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종이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었다.

‘이러다…… 갑자기 또 인간이 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자그만 심장이 조마조마하게 뛰었다. 그 심정을 모르는 이딜로스는 더없이 자상한 손길로 고양이를 안아 든 채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잘게 떠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소곤거렸다.

“이제 너만은 그다지 무섭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평화로운 만큼 아릴은 불안감을 느꼈다.

“네 곁에 있으면 마음이 너무 편안해져.”

이딜로스가 아릴의 털에 고개를 묻었다.

이윽고 들리는 그의 나직한 말은 아릴의 심장을 여러 의미로 떨어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날 널 내쫓지 않아 다행이야.”

이 기분. 어째서 심장이 뛰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위태로운 기분.

그의 말에 안심하기엔 긴긴 시간을 돌아 힘들게 얻게 된 그의 애정이 불안하게 다가왔다.

이 안온함을 온전히 누리기엔…… 멋대로 인간으로 변해 버린다는 절망감이 너무 컸다.

결국 그의 말로 느껴졌던 얕은 희열은 불안감에 굴복했다.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해. 인간이 되면 안 돼…….’

그래야 내쫓기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어.

그러나 그 절망이 머지않아 다시 찾아오게 되리란 걸, 아릴 역시 은연중에 짐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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