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황궁 연회에 참석하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나는 지렁이 같은 곡선이 줄줄 이어진 괴상망측한 인간들의 문자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이딜로스의 표정을 뜯어보듯 세심히 살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찡그린 채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있었다. 거기다 굳게 다물린 입술까지.
아니, 다물렸다기보다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씹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게 인간의 손과 같은 것이 있었다면, 하다못해 앞발이 길기만 했더라면 그가 치아로 짓씹고 있을 입술을 꾹 눌러 빼내어 주고 싶었다.
‘왜 저렇게 싫어하는 거지? 황궁 연회가 대체 뭐길래. 혹시 위험한 곳인 걸까?’
황궁 연회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석하기를 바란다는 걸로 봤을 때 어느 장소라거나 행사인 건 알겠다.
가든 말든 그건 이딜로스의 자유이지만…… 그 장소가 위험한 곳인지 어떻게 알고 이 비실비실한 인간을 보낸단 말인가.
‘내가 지켜 줄 방법이 없을까?’
같이 따라가면 지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최근 들어 부드럽게 녹아 있던 그의 금색 눈에 또다시 모난 돌멩이 같은 불쾌감이 서린 게 보였다. 누가 봐도 벌써부터 가기 싫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를 보며 작게 울었다.
“아옹.”
“응?”
그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고양이의 자그만 모습이 담기자 날카롭던 시선이 느슨히 풀렸다.
그 작은 변화에 기분이 묘하게 들뜨는 순간, 나는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를 따라가서 지켜 줘야겠다고.
* * *
“아릴, 잡아!”
“아옹!”
나는 마멜라가 던져 주는 딸랑이 공을 따라 달려갔다. 그런데 마멜라가 얼마나 힘차게 던진 건지 내 짧은 다리로는 도무지 쫓아가기 힘든 속도로 공은 복도 저편까지 날아갔다.
나는 달려가던 걸 멈추곤 마멜라를 돌아봤다.
“아, 너무 멀리 던졌네…….”
“아옹.”
원래부터 탱탱 튀고 잘 굴러가는 공이었다. 어느새 복도의 모퉁이까지 가 있는 공을 보며 나는 마멜라와 눈치 싸움을 했다.
마멜라는 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 주워 와야겠다, 그치?”
나는 다시금 공을 보다가 마멜라를 슬쩍 흘겨봤다.
‘……내가 물어 와야 하나?’
분위기상 내가 갔다 와야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체 마멜라의 옆으로 도도하게 걸어가 보란 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기 싫다는 의사를 내비치려고 그루밍까지 했지만 통하지 않은 건지 마멜라가 내 엉덩이를 자꾸만 토닥거리는 척 밀어냈다.
“아릴, 주워 와야 더 놀 수 있어.”
그리 말하는 마멜라를 퉁명스럽게 쳐다봤다.
‘귀찮은데…….’
지금 노는 것도 마멜라가 나를 놀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가 마멜라를 놀아 주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이런 공놀이는 예전에나 재밌었지 이제는 지루했다. 너무 열심히 움직이면 덥기도 하고, 그냥 시원한 바닥에 누운 채로 가만히 있고 싶었다.
‘마멜라가 날 쓰다듬어 주면서 독서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데.’
물론 가끔 마멜라가 너무 독서에 열중하면 엉뚱한 곳을 만져서 조금 불만족스럽긴 하다만.
‘누가 지나가다가 공 좀 물어다 줬으면 좋겠다.’
나는 복도 모퉁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갔다 와야 할 것 같다.
결국 마멜라의 채근에 못 이겨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모퉁이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어떻게 이리도 타이밍 좋게 나타날 수가 있을까. 심지어 무척 반가운 얼굴이었다.
나보다 마멜라가 먼저 방방 뛰면서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이딜로스가 이쪽을 바라봤다. 나와 마멜라가 함께 있는 걸 보더니 시선을 내려 자신 쪽으로 굴러와 있는 공을 쳐다봤다.
나는 귀찮은 일을 떨쳐 낼 수 있으리란 직감에 기대에 차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마멜라 역시 귀찮은 일을 떠넘길 생각에 기쁜 건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공 좀 가져다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나 다를까 여동생밖에 모르는 바보 이딜로스는 몸을 굽혀 공을 줍고는 순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딜로스의 등장이 너무 반가워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폴짝폴짝 뛰었다.
‘역시 이딜로스야.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준다니까!’
이딜로스가 마멜라에게 공을 건네며 미소 지었다.
“아릴과 노는 중이었구나.”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내게 닿았다.
나는 해맑게 울며 그의 발치를 맴돌았다. 살랑살랑 흔드는 꼬리가 그의 드러난 발목에 간간이 스치자 이딜로스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멜라는 내게 시선이 팔린 이딜로스에게 말했다.
“아릴이랑 공놀이 중이었어요. 오라버니도 함께하실래요?”
그 말에 이딜로스의 시선이 마멜라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곧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난 괜찮으니 둘이서 놀아.”
“같이 하면 더 재미있을 텐데요…….”
마멜라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이딜로스는 마멜라를 달래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미안, 다음에 하자.”
나는 답지 않게 마멜라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딜로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거절하는 걸까?
예전엔 어떻게든 나를 멀리하려고 마멜라의 제안을 거절했다 쳐도…… 지금은 그다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유치해서 싫다는 건가…….’
내 열렬한 시선을 느낀 건지 이딜로스가 내 쪽을 바라봤다. 그는 내 집요한 시선에 동요하는 것 같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이딜로스의 표정을 읽어 버리고 말았다. 아쉬움이 섞여 있는 소심한 표정을.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너, 실은 하고 싶은 거지.’
나는 곧장 이딜로스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놀란 그가 걸음을 물리려고 발을 떼는 듯했지만 이내 그의 검은 구두는 도로 제자리에 붙었다.
마멜라의 앞인 걸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데 왜 안 하는 거야? 같이 공놀이하자!
“아옹!”
“아, 아릴. 그러지 마. 오라버니가 곤란해하실 거야.”
마멜라가 나를 뜯어말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의심에 찬 눈으로 이딜로스를 올려다보았다.
낮은 시야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분명히 곤란함과 두려움이 넘실댔지만 그만큼 설렘과 기대도 함께 떠오르고 있었다.
완전히 곤란해하고만 있는 건 아니란 말씀이다.
‘이 인간은 생각보다도 더 소심하고,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쓴단 말이지.’
그걸 여동생의 앞에서까지 그런다는 건 조금 문제이지만…….
내가 이렇게 고집을 부려 줘야 이딜로스도 못 이기는 척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마멜라와 함께 있을 시간도 만들어 줄 수 있고.
남매의 벽을 허물어 주겠단 내 목적을 알 리가 없는 마멜라는 계속해서 나를 말렸다.
“아릴, 오라버니랑은 다음에 놀자. 오라버니는 많이 바쁘시잖아. 아마 이렇게 놀 시간은 없으실 거야.”
마멜라는 안절부절못하며 이딜로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 쩔쩔매는 모습을 보자니 지난번에 마멜라가 나를 붙잡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사실 오라버니가 어려워.>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 것 같네.’
마멜라는 이딜로스가 터무니없이 바쁘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 탓에 그를 방해해선 안 된다는 마음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고.
‘나마저도 없을 때는 마멜라가 얼마나 외로웠겠어.’
나는 이딜로스의 옷자락을 문 채 그를 올려다봤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바보 같은 인간. 챙겨 줄 거면 확실히 챙겨 주던가. 애매하게 챙겨 줘서 외로운 마음을 들게 하면 안 되지.’
나는 계속 망설이고만 있는 이딜로스를 꼬셔 내기 위해 필살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매정하게 가 버리면 작고 귀여운 난 내버려지는 것이라는 불쌍한 표정으로 낑낑댔다.
“아옹…….”
그 눈빛에 이딜로스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곧 듣기 좋게 근사한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조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마멜라는 그의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정말요? 시간 괜찮으신 거예요?”
“……응. 안 그래도 요즘 너와 많이 놀아 주지 못한 것 같아 신경 쓰이던 참이었어.”
이딜로스가 마멜라에게 다정히 미소 지었다.
좋아, 내 의도대로 이딜로스가 함께 공놀이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놓고 드러난 그의 발목에 애교 부렸다. 그러는 중에 나도 모르게 살짝 핥았더니 이딜로스가 눈에 띄게 몸을 굳혔다.
마멜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라버니, 어디 안 좋으세요? 역시 많이 바쁘신 건…….”
“아니, 아니야. 그럼 내가 뭘 하면 될까?”
이딜로스는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내게서 발을 떨어트림과 동시에 한 발짝 옆으로 피하며 물었다.
‘……둘이 있을 땐 날 못 만져서 야단이더니. 마멜라 앞에서는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이거야?’
애초에 동물을 무서워한다는 크나큰 약점을 여동생에게까지 숨긴다는 게…….
한순간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우러나왔다.
‘이딜로스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 이러니 벽 같은 게 생기는 거잖아.’
은근슬쩍 그를 째려봤다.
마멜라가 이런 걸로 마음 앓이 하고 있다는 걸 알긴 하는 건가?
“오라버니, 일단 밖으로 나갈까요? 셋이서 복도에서 공놀이를 하기엔 좀 그런 것 같아서요.”
마멜라가 기대감이 어린 순수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딜로스는 복도에 달린 커다란 창문으로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보더니, 고민하듯 표정을 조금 찡그리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래.”
줄곧 이딜로스를 보고 있던 나는 그의 표정에 싫은 티가 조금 섞여 있는 걸 포착했다.
햇볕을 싫어한다고 했지.
이딜로스의 장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점만큼은 아주 훌륭하고 좋은 오빠였다.
* * *
“아릴, 물어 올 수 있겠지.”
물음도 당부도 아닌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
햇볕을 싫어한다더니 이딜로스는 지치지도 않고 공을 던졌다.
우리 셋 중에서 가장 신난 사람이 이딜로스였다. 마멜라는 진즉에 지쳐서 커다란 나무 그늘로 숨어 버린 지 오래였고…… 강철 체력인 나마저도 슬슬 힘들어지고 있었다.
‘난 고양이잖아, 왜 똥개 훈련을 시키냐고.’
억울해서 눈물이 다 터지려고 했다. 이딜로스는 이렇게 몸 쓰면서 노는 걸 좋아하면서 왜 여태 집 안에만 박혀 있었던 걸까.
그가 이렇게 뛰어노는 걸 좋아할 줄 알았으면 이딜로스를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는 일은 처음부터 없었을 거다.
남매의 벽을 허물어 주기 위한 계획 같은 건 다른 방식으로 실현하면 되는 거였는데.
이렇게 내가 개처럼 잔디밭을 구르고 뛰어다니면서 흙 묻은 공을 열 번도 넘게 물어 오는 짓은 더는 그만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