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이제 곧 식사할 텐데 좀 내려놓지. 아릴도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아, 제가 저만 생각하고 있었군요. 미안하구나, 아릴. 배가 많이 고플 텐데.”
곧바로 수긍한 안셀이 나를 놓아줬다. 낯선 이딜로스의 도움으로 안셀에게서 벗어난 나는 바닥으로 내려와 마멜라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붙잡아 들고는 푹신한 쿠션이 깔린 식탁 한 곳으로 올려 주었다.
나는 당황해 시녀를 돌아봤다. 갑자기 붙잡은 것까지는 밥을 주려는 손길인 걸 알 수 있었으나 나를 이곳에 올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나는 불안하게 이딜로스의 낯을 살폈다.
‘이딜로스가 날 보면서 먹다가 체하면 어쩌지.’
하필 자리도 이딜로스와 정면으로 보는 위치였기에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이딜로스가 내게 공포를 느끼는 것, 불편함을 느끼는 것, 내가 그에게 폐가 되는 것…… 나는 그 모든 게 싫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음으로 눈앞에 놓인 내 먹이를 보고서 나는 하던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한눈에 봐도 호화스러운 그릇 위에 두툼한 고깃덩이들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표면이 번쩍거리는 그릇은 내가 마멜라의 방에서 보던 노란색 발바닥 그릇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넋 놓고 그릇을 보고 있자 마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릴, 오라버니가 준비하신 거래.”
……뭐라고? 이딜로스가?
충격을 받아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내가 제 맞은편에 있다는 게 싫지는 않은지 이딜로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이딜로스가 나에 대한 겁을 극복하기라도 한 걸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딜로스의 시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나를 아직 무서워하고 있는데…….
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의 식사가 시작되자 나는 후각을 자극해 대는 눈앞의 고기를 바라봤다. 겉에 불질만 살짝 한 것처럼 보이는 고기를 한 입 물었다.
육즙이 팡 터졌다. 고기는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입 안에서 살살 녹아 없어졌다.
부드러운 식감이며 풍미, 고소한 육즙이 혀끝에서 폭죽을 펑펑 터트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믿기 힘든 맛에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 세상에 이런 음식이 존재했단 말이야?’
한 일주일은 쫄쫄 굶은 것처럼, 나는 그릇에 얼굴을 묻고 고기를 열정적으로 베어 물었다. 양이 많아서 배가 불러 왔지만 두세 덩이는 더 입에 욱여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료는 물론이고 고기 간식의 맛도 잊어버렸다.
‘아……. 맛있는 것들은 너무 빨리 사라져…….’
나는 삽시간에 텅 비어 버린 그릇을 바라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세 사람은 여전히 식사 중이었다.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며 이어 가는 아침 식사. 주로 마멜라가 이야기를 꺼냈고 안셀이 리액션을 보였다.
이딜로스는 조용히 듣기만 하거나 대답하는 정도의 작은 반응만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대화에 참여하는 시간보다 나를 쳐다보는 시간이 더 긴 것 같았다.
아까 무아지경으로 고기를 먹을 때도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이딜로스가 보고 있던 거였나.
나는 이딜로스에 대한 배려로 일부러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반대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빈자리가 사람 수보다 많은 긴 테이블이 고작 세 사람이 앉기엔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명도 더 앉을 수 있을 법한 크기인데 꽤나 썰렁하게 느껴졌다.
‘원래라면 저 자리 중 두 곳에 마멜라와 이딜로스의 부모님이 계셨을 텐데.’
그들의 빈자리인 것일까. 나는 남몰래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마멜라가 조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웃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묵직해졌다.
예전에는 이딜로스도 지금보다 환하게 웃지 않았을까.
그러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릴, 벌써 다 먹었네. 맛있었어?”
줄곧 떠드느라 여념이 없던 마멜라가 다 먹은 지 오래인 내 그릇을 들여다봤다. 나는 해맑게 울며 마멜라가 뻗은 손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이번에도 이상할 정도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는데 이윽고 줄곧 말이 없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줄까?”
뭐? 더 준다고?
나는 고개를 홱 들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눈을 열정적으로 빛내자 이딜로스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사용인을 부르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때 돌연 내 배를 만져 본 마멜라가 그를 가로막았다.
“안 돼요, 오라버니. 아릴이 지금 배불러요.”
“그래? 더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아옹……!”
이딜로스가 손을 도로 내리자 나는 펑펑 울고 싶어졌다.
아니야, 더 먹고 싶은 거 맞아! 물론 배부른 것도 맞지만…….
내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으며 울상을 지었지만 마멜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먹고 싶다고 자제 없이 먹으면 아릴이 배탈 나요. 책에서 봤다고요.”
“많이 공부했구나. 그래, 그럼 우린 마저 식사하자.”
처음으로 마멜라가 미웠다.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군 채 글썽거렸다.
맛있었는데. 맛없고 딱딱한 사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는데…….
그들은 나를 내버려 둔 채 식사를 이어 갔고, 티타임까지 가졌다. 나는 그들이 먹음직스러운 디저트와 차를 마시는 모습을 뚱하게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마멜라의 손길을 받으며 엎드렸다. 그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를 무료하게 듣고 있을 때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이딜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왜 자꾸 쳐다보지?’
그가 나를 계속 보는 것도 신기할 따름인데 더 놀라운 건 이딜로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쳐도 먼저 눈을 피하지 않는단 거였다.
계속되는 시선 탓에 불편해져 골머리를 싸맬 무렵, 마멜라가 이딜로스에게 선물 상자를 건넸다. 드디어 그의 집요한 시선이 거두어졌다.
“오라버니, 제가 직접 주문 제작한 선물이에요.”
“선물은 안 준비해도 된다니까……. 일단 고맙게 받을게.”
“얼른 열어 봐요.”
이딜로스가 상자에 묶인 리본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풀자 마멜라가 옆에서 그를 독촉했다.
‘마멜라는 은근히 성격이 급한 편이라니까.’
나도 고개를 쭉 빼고는 상자를 바라봤다. 마멜라가 어떤 선물을 준비했을지 궁금했다.
이딜로스의 손에 상자의 뚜껑이 들어 올려짐과 동시에 마멜라가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짜잔, 손거울이에요! 마법석이 박혀 있어서 빛도 나요. 그 거울로 얼굴을 보면 오라버니 미모가 배는 더 반짝거릴 거예요!”
나는 마멜라의 삐까번쩍한 선물에 경악했다. 나는 온갖 보석 장식이 달린 커다란 손거울을 보다가 생각했다.
‘저건 분명 마멜라 자기 취향인 것 같은데…….’
남의 생일 선물에 본인의 취향만 반영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옆에서 안셀이 풋,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급히 입을 막는 듯해 보였으나 그러면 뭐 하나. 이미 이딜로스의 따가운 눈초리는 안셀에게 무언의 협박을 날리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다시 마멜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정말요? 요긴하게 쓰셔야 해요.”
나는 이딜로스의 반응에 감탄했다. 정말로 마멜라에게 지극정성이긴 하구나. 아니면 실은 이딜로스도 저런 취향이었던지.
나는 여전히 훈훈한 남매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딜로스의 손은 여전히 거울의 손잡이를 꼭 붙잡고 있었다.
문득 마멜라가 이딜로스에게 벽이 느껴진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보기엔 화기애애해서 그 말이 믿기질 않아.’
누가 저렇게 사이좋은 모습을 두고 거리감과 벽이 있다고 느낄까. 어쩌다 마멜라가 이딜로스에게 거리감을 느낄 지경이 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던 시간 동안 그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온 걸까.
나만 지루하던 티타임 시간도 마침내 끝이 났다. 마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 다시 한번 생일 축하드려요, 오라버니.”
“고마워, 마멜라. 선물은 잘 쓰도록 할게.”
이딜로스가 미소 지었다. 마멜라는 나를 품에 안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때 이딜로스의 목소리가 그녀를 막았다.
“잠깐만.”
“왜 그러세요?”
“아릴은 여기 두고 가.”
나는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나는 왜?’
마멜라도 의아한 눈빛이었지만 내가 이딜로스와 꽤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전 가 볼게요. 이따가 봐, 아릴.”
“아옹……!”
마멜라는 나를 그들에게 남겨 둔 채 등을 보였다.
나는 사라지는 마멜라의 뒷모습을 처량하게 바라보다가 이딜로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를 직시하는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반응에 부담스러움을 넘어 의심이 들었다.
혹시 어제 내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봤다는 이유로 마멜라가 없는 틈을 타 내게 해코지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이딜로스를 경계하며 그나마 믿을 만한 안셀에게로 슬금슬금 도망갔다. 안셀은 조금 전까지 앞 접시와 찻잔이 놓여 있던 자리에 내가 앉자 눈을 반짝 빛내며 나를 쓰다듬었다.
나는 허락도 없이 날 만지는 안셀에게 확 성질을 부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안셀은 여차하면 나 대신 화를 입어 줄 존재였다.
내 보드라운 털을 어루만지던 안셀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 굳이 아릴만 남겨 둔 이유가 있으신지요?”
“집무실에 아릴을 데리고 갈 거라서.”
“예? 아릴을…… 아니 그보다 집무실이라뇨. 오늘 같은 날 일하실 셈입니까?”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초리던 안셀이 기함했다. 이딜로스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뜰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가만히 앉아 있는 안셀을 무신경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뭘 새삼 놀라나? 미적대지 말고 따라와. 어제 농땡이를 피웠는데 오늘도 놀 수는 없지 않나.”
“그건 놀았다기보다 휴식을 취했다고 하심이…….”
이딜로스가 안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안셀은 음울하게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이내 나를 끌어안은 채로 다급히 이딜로스를 따라갔다.
졸지에 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집무실에 끌려가게 생겼다. 나는 그런 이딜로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번엔 내가 찾아오는 게 불편해서 집무실 위치까지 옮겼으면서…….’
이딜로스가 앞서가다 말고 걸음을 멈춰 우리를 돌아봤다. 계속 그의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안셀에게 딱 달라붙었다.
“안셀.”
“예, 전하.”
“오늘은 날도 날이니 너도 이만 돌아가 봐.”
안셀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절 희망 고문하시는 건 아니지요?”
“싫으면 말고.”
이딜로스가 다시 등을 돌려 가 버리려 하자 안셀이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싫을 리가요!”
“그럼 이만 가 봐. 아릴은 내려 주고.”
안셀은 되살아난 새순처럼 쌩쌩해져선 나를 복도에 내려 주었다. 나는 당황해 안셀의 옷자락을 물었다.
아니, 잠깐만. 네가 가 버리면 난 이딜로스랑 둘이 남는다고!
하지만 눈치 없는 안셀은 나더러 다음에 놀아 주겠다느니 헛소리를 하곤 발에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쌩 사라졌다.
그렇게 이딜로스와 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