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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42화 (39/191)

42화

꼭 애원하는 것처럼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흐느낌이 섞인 것 같기도, 그저 기운 없이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어느 쪽이든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이딜로스가 내쉬는 숨결이 지나치게 가까웠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에 나조차도 펄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목석처럼 굳어 있는 내 털을 만지작대더니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해. 너와 있으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아.”

너무 놀란 탓인지 미친 듯이 쿵쾅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천천히 숨을 골라야 했다.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애쓰며 머리로는 이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이딜로스가 동물을 무서워하는 걸 극복하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와 닿은 손과 온기, 숨결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히 나를 이전과 같이 무서워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겁마저 견뎌 낼 정도로 무언가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걸까.

‘이를테면, 기댈 상대 같은 것…….’

나는 얌전히 그 자리에 엎드려 이딜로스의 팔을 꼬리로 쓸어 주었다. 처음으로 나를 필요로 해 준 그의 곁을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지키고 싶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를 좋아해 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가 보인 절박함의 꼬투리를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붙잡아 주고 싶었다.

그대로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그렇게 나는 그의 숨소리가 다시 잔잔한 파장을 일으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 * *

나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든 이딜로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깨어 있을 때의 날카로움과는 다르게 세상모르게 잠든 이딜로스는 꼭 순한 양 같았다. 이대로 낚아채 가도 모를 것 같아서 나는 앞발을 들어 그의 뺨을 눌러 봤다.

‘정말 미동도 없네. 마멜라도 그렇고…… 나 때문인 거겠지?’

생각보다 말랑하던 그의 뺨에서 시선을 들어 금색 머리칼을 바라봤다. 부스스하게 엉망이 된 머리칼들이 내가 오기 전 그가 얼마나 잠을 설치고 있었는지를 알려 줬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오랫동안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야.’

그는 늘 나를 피하기 바빴고 이제는 내가 그를 피하기 바빴다. 줄곧 이렇게 이딜로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처음 창틀에서 이딜로스를 내려다봤을 때 보였던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자꾸만 떠올랐으니까.

그때 보았던 그 차가운 입매가 마멜라의 앞에서는 느슨히 풀리는 것에 묘하게 안심이 되었고,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는 다시 차갑게 굳어 버린다는 것에서는 또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도 그랬다.

이렇게 상태가 안 좋으면서 무서워하는 내가 곁에 있기를 바랄 정도로 사람이 필요하면서.

왜 그는 늘 선을 그을까. 왜 남들을 곁에 두지도 하물며 다가오게 하지도 않는 걸까.

그리고 왜 이렇게 혼자 망가져 있는 걸까…….

나는 외로움이 그늘진 것 같은 이딜로스의 얼굴을 천천히 눈에 담다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신경이 기울고 시선이 가는 것은.

나는 이딜로스의 코끝에 내 코를 가져다 대어 문질렀다.

‘네가 외롭다면, 언제든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내가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어.’

네가 내게 공포를 느낀다면 난 네가 공포를 느낄 틈도 없게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훔쳐서 달아날 거야.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네게는 일말의 공포도 남지 않게끔 혼자서만 간직할게.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혼자 죽어 가지 마.

‘……잘 자, 이딜로스.’

이딜로스의 방을 빠져나왔을 땐 어느새 불빛 하나 없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복도에 안개가 스산히 깔려 있는 것을 본 나는 서둘러 마멜라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멜라의 냄새가 났다. 마멜라가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마멜라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 문이 내가 들어가기 좋을 만한 공간만큼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 안엔 촛불의 어스름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알량한 촛불에만 의지하기엔 빛 하나 들지 않는 잿빛 하늘이 너무 어둑했다.

나는 두리번대다가 소파에 있는 조그만 인영을 발견했다.

“아옹!”

“아릴? 왔구나.”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마멜라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달려가 소파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반가움에 마멜라의 손등을 핥았다.

‘어디 갔었어, 마멜라!’

나는 마멜라에게 이상은 없는지 그녀를 요리조리 살피며 냄새를 킁킁 확인했다. 풀 냄새가 살짝 섞여 있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마멜라의 눈가가 평소보다 붉은 것이 보였다.

“아침부터 혼자라서 심심했지? 미안해.”

사과하는 마멜라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겨 있었다. 눈도 그렇고 목소리도, 꼭 울음을 터트리고 난 후처럼 느껴졌다.

“아옹…….”

나는 걱정을 담뿍 담아 괜찮냐고 물었다. 그런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마멜라는 대답 없이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릴, 내일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엄청 특별한 날인데.”

“……아옹?”

“내일은 오라버니의 생일이야.”

그녀의 말에 놀라기도 잠시 곧 내게는 어리둥절함이 밀려왔다.

아무리 고양이어도 인간들이 생일을 기념일로 챙긴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이딜로스는 내일이 생일인 인간이라기엔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는데…….

마멜라는 테이블에 달린 서랍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오라버니한테 준비한 선물도 있어.”

그녀가 리본으로 꽁꽁 묶인 선물 상자를 꺼내었다. 마멜라가 직접 포장한 건지 모양은 엉성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봐줄 만은 했다.

마멜라는 그 상자를 만지작대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너도 내일 있을 오라버니의 생일을 축하해 줘야 해.”

“…….”

정말 이상했다. 내일이 이딜로스의 생일이라면서 본인은 물론이고 마멜라마저 칙칙한 분위기라니.

나는 마멜라의 손등 위를 내 조그만 앞발로 겹쳐 잡았다.

그들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옹.”

내 눈을 바라보던 마멜라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너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인 거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아. 진짜 이상해. 가끔은 정말로 네가 내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아서.”

“…….”

“네가 원한다면 우리 가족 이야기를 들어 줄래?”

나는 대답과 끄덕임 대신 잠자코 마멜라의 눈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해 주겠다는 말과 달리 한동안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고양이인 나에게조차도 꺼내기 힘든 말인 걸까.

나는 마멜라의 다리 위에 얌전히 엎드리며 그녀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마멜라는 입을 열었다.

“내가 내일은 오라버니의 생일이라고 했잖아. 그러니 내일은 정말 특별한 날인데…… 실은 오늘도 그런 날이거든.”

오늘도 누군가의 생일이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렇게 음울한 건 말이 안 되는데.

어느새 마멜라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오늘은 부모님의 기일이야.”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그 순간 우르릉 번개가 치며 방 안이 번쩍거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부모님의 기일…… 이라니, 그럼 둘의 부모님은 돌아가셨단 거야?

믿기 힘든 것도 잠시. 생각해 보면 그랬다.

나는 이곳에서 그들의 부모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제야 알게 된 내가 바보 같은 것일까.

하지만 고양이인 나로서는 동거인이 어떤 가족을 가졌고 누가 돌아가셨고 같은 세세한 것들에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건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알든 알지 못하든 그들을 사랑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딜로스가 오늘 그런 모습을 보인 것도 다 그래서였던 거야…….’

평소보다 유난히 위태로웠던 것도 나에게 가지 말라고 한 것도.

오늘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날이었기 때문에.

나는 애석한 의문만이 들었다. 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왜 하필 이딜로스의 생일 전날이었을까.

나는 눈시울이 발개지고 있는 마멜라를 올려다봤다. 마멜라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내 머리와 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은 6년 전에 돌아가셨어. 내가 여섯 살이고 오라버니가 열일곱 살 때. 그날은 곧 있을 오라버니의 생일을 위해 별장에 가 있었는데 거기서 사고가 나서 두 분이 돌아가신 거야. 그게 하필이면…… 오라버니의 생일 전날이었던 거고.”

“…….”

“그땐 나도 힘들었지만 아마 나보다 더 힘들었던 건 오라버니였을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듯 애써 웃는 마멜라의 눈동자는 가엽게도 촉촉해져 있었다.

“아릴, 그때 오라버니가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

“나한테 미안하댔어. 오라버니가 왜 나한테 사과를 한 걸까.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잖아. 그런데 오라버니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들려오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비록 마멜라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썹은 조금씩 일그러졌고 이내는 고개도 아래로 푹 꺼졌다.

“하필 그땐 내가 어려서, 오라버니한테 그렇지 않다고 말도 못 해 줬어……. 어쩌면 전부 그것 때문이야. 내가 그 말 한마디를 못 해 줘서…….”

마멜라는 흐트러진 호흡으로 작게 숨을 들이켜곤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랑 함께 지낸 시간은 길어지고 있는데 점점 벽이 생기는 것 같아. 나 이젠 오라버니가 너무 어렵게 느껴져…….”

그 순간 다시 한번 콰르릉 번개가 내리쳤다. 눈앞이 소멸할 것만 같은 빛이 방 안에 번쩍거렸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린 마멜라가 있었다.

나는 복잡한 눈으로 마멜라를 바라봤다. 어떤 생각을 하고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시선 속의 그들은 늘 사이가 좋기만 한 남매였는데.

비록 같이 있는 시간은 적어 보였지만 함께 있을 때는 서로를 아끼는 모습에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우애 깊은 모습에 그들의 가족이 되고 싶었고 이딜로스와 친해지고 싶었던 거였다.

마멜라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말해 주질 않아. 어디 아픈 건 아닌지 힘든 건 아닌지…… 누구한테도 알리질 않아. 그래서 나 흑, 때로는 정말 무섭기까지 해……. 오라버니가 어떻게 될까 봐.”

“…….”

나는 흐느끼고 있는 마멜라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마음이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당연히 친밀하기만 할 것이라 여겼던 이상적인 남매는 서로에게 벽이 있었다. 오빠는 그 무엇도 내비치질 않고 있었고 동생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질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 만한 일은 분명 많았다.

‘마멜라는 이딜로스가 동물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잖아…….’

이렇게까지 벽이 세워진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난데없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거리감을 만들어 낸 벽이 생겼을 리가 없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6년 전에. 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나는 마멜라를 달래기 위해 그녀의 옆구리에 머리를 비비적대며 울었다.

“아옹.”

울지 마, 마멜라. 내가 도와줄게.

할 수 있는 거라곤 애교 부리기와 사고 치기밖에 없는 말썽꾸러기 고양이지만 이런 나라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러니 울지 마, 마멜라. 네가 울면 내 기분이 너무 무거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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