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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40화 (37/191)

40화

왜 여태 몰랐을까 싶은 섬광 같은 깨달음이었다. 충격으로 머리가 다 어질거렸다.

이전까지 보였던 이딜로스의 태도가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여태 나한테서 슬금슬금 멀어지면서 안전 거리를 확보했던 것도. 나만 보면 질겁했던 것도. 날 싫어하진 않아도 좋아해 주진 못했던 것도…….

다 나를 무서워했던 거라면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그럼 날 이 집에 들이는 걸 그렇게 반대했던 것도 내가 무서워서 그랬던 건가?

“아옹…….”

나는 이딜로스의 낯빛을 살폈다. 누가 보면 내가 해코지라도 한 줄 알겠다. 그는 와락 일그러진 표정으로 공포감에 질려 나를 바라봤다.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어깨를 떨면서 연거푸 내뱉는 딸꾹질 소리가 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처럼 맹하고 작은 게 뭐가 무섭다고…….’

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물러났다. 이딜로스가 너무 놀란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상상조차 가지 않았을 모습. 늘 완벽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가 있다니.

‘그럼 난 여태 이딜로스를 괴롭힌 거나 다름없었던 거야……?’

줄곧 이딜로스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그가 질겁해도 쫓아다녔지 않았던가. 날 볼 때마다 그가 심장 졸였을 거라고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이 철퇴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그에게서 조금씩 물러나다가 완전히 걸음을 돌려 버렸다.

싫은 걸 넘어서 내가 무섭다는데 도무지 계속 들이댈 수가 없었다.

침울하게 저택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돌아갔다. 다음에, 다음에 다시 지켜보는 거야.

그로부터 며칠.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딜로스를 지켜봤다.

이딜로스는 내가 또 튀어나올까 불안한지 몇 걸음 걷다가 멈춰서 두리번거리고 또다시 몇 걸음 걷다가 멈춰서 두리번거리길 반복했다.

저 정도라니, 왠지 안쓰럽기까지 했다.

새삼 내가 이딜로스를 얼마나 끈질기게 괴롭혔던 건지 실감 났다.

나는 멀찍이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착잡하게 생각했다.

그가 나를 좋아하게 되도록 다가갔던 걸, 이제는 그만둬야 할 것 같다.

#이상한 변화

“최근 새롭게 나온 퐁당 디저트 메뉴가 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입니다. 부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 루나뜨로트의 매출이…….”

이딜로스는 안셀의 보고에 전혀 집중하질 못했다. 늘 업무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머릿속을 지금은 전혀 다른 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시무룩하게 걸음을 돌리던 고양이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때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고양이는 꼭 상처받은 듯이 돌아섰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원래라면 빨빨 달려와 주변을 맴돌고 있어야 할 아릴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다시 원래 집무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어쩌면 반겨야 할 소식이었다. 무서워 마지않던 존재가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제 근처를 얼씬도 하지 않으니 안도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왤까. 이상하게도 자꾸만 신경 쓰였다.

‘혹시 또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가.’

그렇게 활발하던 고양이인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이번에도 열병을 앓아 쓰러졌다거나 기력이 없어 그를 찾아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이딜로스는 책상을 손끝으로 초조하게 두드리다가 멈췄다.

역시 찾아가 봐야겠다.

“새로 들여온 맬벳 양식이 수도에 유행으로 퍼지면서 마르젠로트에는 최근 들어 품귀 현상까지…… 전하, 어디 가십니까?”

이딜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셀이 말을 멈추곤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이미 훌쩍 문 쪽으로 가 버린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마멜라에게.”

“예? 지금,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보고는 이따가 마저 듣지.”

안셀을 덩그러니 버려둔 채 이딜로스는 집무실을 나왔다. 그는 곧장 여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을 놓지 못하고 간간이 주변을 둘러봤다. 또다시 갑자기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신출귀몰하던 고양이였으니까.

하나 불안감이 무색하게 고양이는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정말로 어딘가 아픈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느새 마멜라의 방문 앞에 선 이딜로스는 노크를 하려다 말고 멈췄다. 무턱대고 찾아왔더니 뒤늦게서야 깨달음이 밀려왔다.

……지금 고양이가 멀쩡한지 확인하러 업무도 제쳐 놓고 나온 건가?

그가 벌였다기엔 너무나 이상한 행동이었다. 며칠 안 보였다고 이렇게 찾아올 정도로 아릴에게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

……그게 뭐라고. 온종일 귀찮게 졸졸 쫓아다닐 뿐이었는데.

무서워서 심장조차 남아나질 않게 하던 존재일 뿐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결국 이딜로스는 몇 번의 고민 끝에 손을 움직여 문을 두드렸다.

이건 어쩌면, 완전히 휩쓸려 버린 게 분명했다.

“마멜라, 나야.”

잠시 후 여동생의 방문이 열렸다. 모습을 보인 마멜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문을 활짝 열었다.

이딜로스의 시선이 자연히 마멜라의 뒤로 보이는 방 안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오라버니?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잖아요.”

“그냥…… 너와 다과라도 들까 싶어서.”

“갑자기요?”

마멜라의 어리둥절한 목소리 위로 안셀의 말이 겹쳤다.

갑자기.

이딜로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나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이해할 수 없게도 그의 모든 행동은 충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딜로스가 말없이 바라보자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던 마멜라가 되물었다.

“정원으로 갈까요?”

“아니. 네 방이 좋겠어.”

평상시라면 아릴의 구역이나 다름없는 마멜라의 방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지나가는 사용인을 불러 다과를 준비하라 이르고, 마멜라와 테라스 쪽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면서 방 안을 눈으로 계속 살폈다.

‘……왜 없지?’

그가 주변을 훑는 모습에 마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아. 아릴이 안 보여서. 밖에 놀러 갔어?”

“아니요. 있는데…… 그게, 오라버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숨어 버렸어요.”

“숨어?”

그 말이 이해가 안 가는 듯 이딜로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좋다고 쫓아다니던 아릴인데 한달음에 달려와 반겨 줘도 모자랄 판에 숨었다니.

‘숨바꼭질을 하자는 건가?’

고양이의 돌변한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딜로스는 감이 잡히질 않았다. 혹시 고양이에게도 사춘기 같은 게 있는 건가.

그의 아리송한 표정을 본 마멜라가 침대 밑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릴, 어서 나와 봐. 오라버니 오셨어.”

“…….”

“아릴?”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마멜라는 뜸을 들이다 난처하게 웃었다.

뒤이어 덧붙인 말에 이딜로스의 입매가 미세하게 굳었다.

“아릴이가 요즘 계속 기분이 안 좋아서…… 직접 나오는 게 아니면 데려오기 힘들 것 같아요.”

이딜로스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고?”

“네, 건강해요.”

“……그래, 다행이구나.”

아릴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침대 밑을 힐끔 바라봤다.

그가 마멜라와 차를 들며 사사로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아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딜로스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빠졌다.

간간이 침대 밑을 살폈지만 아릴의 모습은커녕 그 보들보들한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가량을 그 자리에서 버티던 이딜로스도 끝내는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만 가 볼게.”

“네, 오라버니.”

마지막으로 아릴이 있는 곳을 힐긋 바라봤다. 가기 전에 모습은 비추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였으나 등 뒤로 문이 닫힐 때까지도 아릴은 나타나지 않았다.

“…….”

서운함일까, 실망감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쉬움일까…….

괜히 신경이 곤두선 이딜로스는 집무실에 돌아가 분풀이하듯 계약 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어 댔다.

자꾸만 생각나며 거슬리게 구는 고양이를 잊기 위해 업무에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멀티플레이에 갈고 닦아져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제 딴에는 생각할 틈도 만들지 않으려고 업무에만 매진했으나 머릿속 한쪽에선 자꾸만 떠올랐다. 그 고양이가.

이딜로스는 어느새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분이 안 좋다는 게 혹시 나 때문인 건가? 건강하면서도 날 찾아오지 않는 걸 보면…….’

문득 이딜로스의 생각이 마지막으로 아릴을 보았던 때로 날아갔다.

‘……설마 내가 지난번에 보인 태도 때문에 이제 내가 싫어진 건가?’

도장을 찍으려던 이딜로스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잠시 멍해 있던 이딜로스는 곧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멋대로 다가올 땐 언제고?

기분이 확 나빠진 이딜로스가 들고 있던 도장을 쾅 내려찍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책상 위로 이미 직인이 찍힌 서류들이 산을 이룬 채 쿵 놓였다.

“전하!”

거의 넋을 놓고 있던 이딜로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를 큰 목소리로 부른 안셀이 분통을 터트렸다.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제발 좀 쉬십시오! 이 양을 좀 보란 말입니다. 며칠 동안 대체 얼마나…….”

“됐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딜로스는 짤막하게 대답하곤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안셀의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라는 말이 걸렸다.

그의 미간에 점차 금이 갔다.

이건 꼭 고양이 때문에 그런 것 같지 않은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도리어 신경이 쓰여서 잠도 자지 못한 것처럼…….

이딜로스는 도장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저 업무가 많아서 못 잤던 것뿐인데. 자려고 한다면 당장에 업무를 그만두고 잘 수 있었다. 고양이 생각 같은 것도 안 할 수 있다고.

이미 모든 게 아릴에게 휩쓸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 이딜로스는 경건한 표정으로 안셀을 바라봤다.

“네 말이 옳군. 난 자러 가지. 넌 여기 남아라.”

“예? 정말입니까? 주무시러 가시는 겁니까?”

안셀이 기뻐서 펄쩍 날뛰었다. 이딜로스는 그 과한 반응이 귀찮아서 일일이 반응해 주지 않고 집무실을 나왔다.

‘잠을 못 잔 태가 나긴 하는군.’

이딜로스는 복도를 걸으며 갑갑한 타이를 느슨히 풀었다.

업무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눈 끝도 시리고,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묵직한 것도 느껴졌다.

‘……과로인가.’

늘 있는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걸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바로 앞 모퉁이에서 웬 털실 공이 굴러 나왔다. 공을 보고서 이딜로스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후에 모퉁이에서 아기 고양이가 튀어나와 털실 공을 와락 붙잡았다. 그러다 한 번 공과 함께 데구루루 바닥을 구르고, 해맑게 다시 일어서 공을 입에 물었다.

이딜로스는 그 살랑이는 꼬리를 보고서 반사적으로 굳었다.

거부감이 가장 먼저 온몸을 잠식하듯 번져 나갔고 뒤이어 이상하게도 반가운 마음이 밀려왔다.

참으로 모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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