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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39화 (36/191)

39화

나는 멍하니 졸음에 젖은 눈을 깜빡였다. 어제 이딜로스의 집무실에 찾아갔다가 한 것도 없이 잠들어 버린 걸 떠올리곤 후회가 밀려왔다.

‘이딜로스가 깨면 애교도 부리고 예쁨도 받아 보려 했는데 내가 자 버릴 줄은…….’

역시 그 시간대까지 깨어 있는 건 동물이 할 짓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계획이 수포가 되어 버린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나는 왜 마멜라의 방에 있는 걸까.

주변을 빙 둘러봤다. 꼭 새벽에 내가 이딜로스를 찾아갔던 게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그가 펜을 움직이는 미약한 기척만이 느껴지던 잔잔한 꿈.

하지만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건 나도 안다. 어제 집무실의 문을 닫을 때 머리로 콩 밀어서 닫았던 감촉이 생생했으니까.

‘잠결에 내 잠자리를 찾아서 온 건가?’

이딜로스가 나를 친히 옮겨 줬을 리는 없고……. 아니면 이른 아침에 집무실을 찾아온 안셀이 바닥에서 자고 있는 날 발견하고 옮겨 준 걸지도 모른다.

‘와, 그런 거면 이딜로스 진짜 너무하네.’

바닥에서 자는 날 아침까지 내버려 뒀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 매정한 상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던 나는 애써 내가 내 발로 걸어왔을 거라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내 움직임에 나와 함께 침대에서 자고 있던 마멜라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아릴…… 잘 잤어?”

“아옹.”

잠버릇이 난폭해 하루아침에 폭탄 머리가 된 마멜라를 보곤 나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멜라의 머리맡으로 가 그녀의 폭탄 머리를 핥아 열심히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까르르 웃음을 흘리던 마멜라가 말했다.

“새벽에 갑자기 오라버니가 찾아오셔서 깜짝 놀랐었어. 너 언제 오라버니한테 간 거야?”

“……?”

나는 마멜라의 머리를 핥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마멜라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조잘조잘 말했다.

“갑자기 날 깨우셔서 뭔가 했는데 널 이렇게 꼬옥 안고 오신 거 있지? 아릴이 넌 오라버니랑 그렇게 친해졌으면 말 좀 해 주지.”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내가 내 발로 걸어서 들어온 게 아니라 이딜로스가 날 데리고 온 거였다고? 거기다 꼬옥 안아서?

전혀 상상치도 못한, 아니 상상은 해 봤지만 솔직히 너무 말이 안 되어서 머릿속에서 치워 둔 일이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라니.

“오라버니가 드디어 우리 아릴이의 매력에 빠지신 게 분명해!”

마멜라의 환호에 나는 묘하게 기분이 상기되었다.

정말로 이딜로스가 날 좋아하게 된 걸까. 이제 드디어 친구가 될 수 있는 걸까?

마멜라가 머리맡에 있던 나를 덥석 끌어와 안았다. 마멜라는 기쁘게 웃으면서 내 털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밥 먹고 나서 오라버니를 만나러 가자.”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평소보다 맛있게 밥을 즐길 수 있었다. 기분이 좋으면 안 좋은 것도 긍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거였다.

‘난 오늘부터 이딜로스랑 친구야!’

그 생각 하나에 전에 없던 자신감이 치솟아 의기양양해졌다.

내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하다니! 역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었던 거다.

마침내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한가로운 티타임이 찾아왔을 때. 마멜라는 나를 품에 안고서 이딜로스의 집무실 앞에 섰다. 마멜라가 방긋거리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이제 널 점점 더 좋아하시게 될 게 분명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에는 이딜로스가 우릴 내쫓지 않겠지. 이젠 날 조금은 좋아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렇게 마멜라가 손을 들어 노크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진갈색 머리의 말쑥한 청년, 안셀이었다.

“안셀? 어디 가?”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아릴도 반갑구나. 전 지금 전하께서 부탁하신 서류를 소거하러 가는 길입니다.”

마멜라와 내게 인사를 건넨 안셀이 양손 가득 들린 종이 뭉텅이를 보였다.

마멜라는 산더미 같은 종이의 양을 보고 조금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오라버니는 안에 계시지? 지금 많이 바쁘셔?”

“예? 아, 그게.”

안셀이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피했다. 마멜라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안셀은 집무실 안을 힐끔 보더니 한숨과 함께 말했다.

“지금 안 계십니다.”

“응? 나가셨어?”

“아니요. 그것이 아니오라…….”

“뭔데? 어서 말해 줘.”

안셀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집무실을 옮기셨습니다…….”

“……집무실을 옮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안셀은 차마 입을 열지는 못하고 내 쪽을 바라봤다.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처로웠다.

그 표정을 보자 나와 마멜라는 서로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불길함. 조금 전까지 가졌던 희망이 와장창 깨지는 듯한…….

헛기침한 안셀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와 아릴이 너무 자주 찾아와 방해가 되신다고…… 아가씨께서 위치를 물어보셔도 절대 알려 주지 말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안셀은 그런 식으로 둘러댔지만 나는 어렴풋이 눈치챘다. 방해가 된다는 건 핑계고 내가 계속 찾아와서 옮긴 것이 분명했다.

기대에 묻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돌이켜 보니 어제 찾아갔을 때도 이딜로스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 같다.

열 번 찍어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내가 이딜로스를 너무 얕본 듯했다. 이렇게나 친구가 되기 어려울 줄이야. 쉽게 친구가 되기엔 그가 쌓고 있는 벽이 너무나 거대했다.

다가가려고 하면 멀어지고 힘겹게 한 걸음 다가가도 결국엔 다시 멀어진다.

왜 이렇게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일까.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면서.

‘계속 이렇게 여지를 주기만 하고……. 이럴 거면 차라리 내가 포기하게 계속 매정하게 굴던가.’

인간들의 말 중에는 희망 고문이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다. 이게 바로 그런 것일까. 이딜로스는 내가 제풀에 지쳐 떨어지기를 바라는 걸까?

나는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수염을 떨었다.

‘……날 너무 쉽게 봤어.’

이딜로스는 분명 날 좋아하게 될 거야.

왜냐하면,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나는 마멜라의 품에서 폴짝 벗어나 달려갔다.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아, 아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고 이딜로스의 냄새를 쫓아갔다.

그의 냄새가 향하고 있는 곳은 일전에 마멜라와 몇 번 가 본 적이 있던 화원의 안쪽이었다.

평범한 들판에 조성한 미로 같은 화원은 깊게 들어갈수록 울창한 숲으로 풍경이 변해 갔다.

냄새가 가까워질수록 처음 보는 저택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걸음을 멈춘 나는 저택을 올려다봤다.

‘와.’

숲속에 파묻힌 저택은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향기로운 꽃 덤불이 기둥마다 휘감겨 올라가고 있어 오래도록 관리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일부러 이런 식으로 조경해 고택의 느낌을 낸 거였다.

‘우리 집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엄청 크네.’

나는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가 저택의 감상 평을 늘어놓고 있을 때는 아니지 않나.

나는 목적대로 이딜로스를 찾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킁킁, 이딜로스의 냄새를 맡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어.’

저택은 정말이지 고요하기만 했다. 멀리서도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여긴 정말로 인간이 이딜로스 외엔 없는 것 같았다. 그제야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딜로스가 머무는 곳엔 왜 항상 다른 인간이 없지?

세상에는 분명 많은 인간이 존재하는데 이딜로스가 곁에 두는 인간은 고작해야 마멜라와 안셀 둘뿐이었다.

어쩌면 나를 막아서던 그의 벽이 단지 그의 성격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냄새를 따라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복도를 걸었다.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지만 채광이 좋아 창가의 햇볕만으로도 복도는 충분히 밝았다.

그리 호화롭지도 그렇다고 단조롭지도 않은 저택을 걷던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딜로스는 어디 있는 걸까.’

그러다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냄새가 이어지는 맞은편 모퉁이에서 익숙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모퉁이로 눈만 살짝 내밀자 걸음을 옮기고 있는 번듯한 인영이 보였다. 보는 이 하나 없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게 이딜로스의 습관이라는 걸 오랜 관찰로 알고 있던 나는 다시금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이딜로스가 점점 다가오는 걸 느끼며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마 내가 여기까지 온 걸 모를 거야.’

어쩌면 이딜로스는 내가 찾아와서 싫어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열 번 찍어 쓰러질 나무가 아닌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되면 나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찍어 넘어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이딜로스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이딜로스가 내가 숨어 있는 모퉁이를 지나치기까지 앞으로 세 걸음 남았을 때.

나는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아옹!”

해맑고 우렁차게 그를 부른 나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해맑음 그 모든 걸 혼신의 힘으로 끌어올린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런데…….

“으……!”

으?

창백하게 질린 이딜로스가 부자연스럽게 끊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제 입을 턱 막아 버린 이딜로스를 당혹스레 쳐다봤다. 방금…… 소리 지르려고 한 거지?

내가 한 걸음 다가가자 이딜로스가 뒷걸음질 쳤다. 더 믿기 힘든 것은 그러다 얼마 안 가 그가 뒤로 나자빠졌다는 거였다. 꼭 다리에 힘이라도 풀린 것처럼.

‘왜, 왜 저러지? 꼭 겁에 질린 것 같잖아…….’

에이, 설마. 그저 놀란 거겠지.

애써 부인하려 했지만 눈앞의 생생한 그의 행동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잘게 떨리는 금색 눈동자. 하얗다 못해 파랗기까지 한 창백한 안색. 뒤로 도망치려는 것처럼 꼼지락대는 바닥을 짚은 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못 건드렸다간 울기라도 할 것 같은 저 표정……!

“아옹……?”

너 설마……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다가가려는 순간 그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흡.”

“…….”

그뿐일까 급기야는 입을 막은 채로 딸꾹질까지 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 인간…… 이딜로스는 정말로 날 싫어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날 싫어했던 게 아니라…… 그저 날 무서워했었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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