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나는 요즘 들어 창밖에 부쩍 많이 보이는 경비들을 눈으로 좇았다. 나와 같이 창가에 걸터앉아 책을 보고 있던 마멜라는 나를 따라 밖을 흘긋대더니 말했다.
“오라버니도 참. 정말로 그 수상한 사람을 잡으려는 걸까?”
나는 마멜라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수상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잡아야 하는 거 아닐까?
물론 그게 나인 것 같다는 점이 조금 문제이긴 했다만.
마멜라는 한숨을 푹 내쉬곤 말했다.
“난 오라버니가 잠결에 뭘 잘못 보신 것 같아. 얼마 전에 피로 때문에 쓰러지신 적도 있잖아. 사람 머리가 어떻게 새하얀 색일 수가 있겠어?”
이딜로스가 쓰러진 적이 있다는 건 혹시 그때를 말하는 걸까. 이딜로스가 내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날.
마멜라의 말을 듣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잠결이라. 그러고 보면 그랬다.
고양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나와 이딜로스가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럴싸한 생각에 도달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딜로스가 꿈을 꿔 놓고선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거였네!’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 인간 꿈꾼 걸 가지고 이 난리를 부린 거라니. 괜히 나까지 곤란해질 뻔하지 않았나.
줄곧 남아 있던 불안감이 가시자 나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싱그러운 햇빛이 쏟아지는 밖을 바라봤다.
그때 마멜라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릴, 그런데 오늘은 오라버니한테 안 가?”
“아옹?”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멜라는 내 등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요즘 틈만 나면 오라버니한테 찾아갔잖아. 오라버니랑 친해진 거 맞지?”
“…….”
이딜로스가 드디어 나를 좋아하는 거라며 웃는 마멜라를, 나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쳐다봤다.
사실 얼마 전 이딜로스가 나를 황후에게서 구해 준 후로, 나는 이딜로스에 대한 기대로 이전보다도 더 그를 졸졸 쫓아다녔었다.
<……또 왔군. 안셀.>
한숨을 내쉬며 안셀을 부르는 이딜로스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기대를 가지고 그를 쫓아다녔던 만큼 이딜로스는 이전처럼 나를 모질게 쫓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가까이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여전히 안셀에게 나를 붙잡아 감시하라고 했고 여전히 내가 가까이 가려고 하면 물러났으며 여전히 나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
묘한 변화가 있다면 이제는 이딜로스가 나와 눈이 마주쳐도 인상을 쓰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대신 여전히 창백한 낯으로 표정만 살짝 굳혔다.
‘결론적으론 친해지지도 못했고 이딜로스가 나를 아직 좋아하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시선만 무신경하게 창밖으로 돌렸다. 괜히 진실을 알려 주어 마멜라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마멜라가 목소리를 낮추더니 중얼거렸다.
“오라버니는 밤늦게까지 집무실에 계시니까 새벽에 찾아가면 좋을 텐데.”
“아옹?”
“피곤하신 오라버니를 위해 우리 아릴이의 귀여움으로 피로를 풀어 드리면 좋아하실 거야. 문제는 내가 피곤해서 일어나질 못한다는 거지만.”
마멜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였다.
이거다.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그 시간엔 안셀도 돌아가고 없을 테니 이딜로스와 단둘이 있으면서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아옹!”
나는 마멜라의 무릎 위로 달려들어 그녀의 손을 핥았다. 고마워, 마멜라. 고마워!
내가 새벽까지 찾아가 곁을 지키면 이딜로스도 내가 자신에게 진심이라는 알아줄지도 모른다. 그럼 이딜로스가 내 정성에 감동해서 나와 친구가 되어 주겠지.
‘좋아, 새벽까지 잠들지 않고 기다릴 거야!’
* * *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고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
집무실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는 불빛들에 의지한 채 이딜로스는 잉크 펜을 움직였다.
사락사락.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집무실을 메웠다.
잉크를 찍어 서명하고, 종이를 넘기고 검토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흘긋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피곤함에 시린 눈가를 문질렀다. 하루의 시간 중 새벽 시간대가 가장 힘들었다. 세상이 멈춘 듯한 고요함은 그의 피로에 무게를 더했다.
그 묵직한 피로감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건 강인한 정신력도 체력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기에 오늘도 피로를 몸에 이고 사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습관이고 나쁘게 말하면 버릇인 거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네.’
이딜로스는 잠시 깃펜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잠들 생각 없이 그냥 아주 잠시 눈의 피로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한숨을 흘리며 등받이에 기대 누운 몸이 평소보다 묵직했다.
밤바람에 나뭇잎이 스산히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던 때였다.
철컥.
갑자기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뜬 이딜로스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봤다.
그런데 문이 열려 있기만 할 뿐 들어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바람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바람이 문고리를 돌려 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이딜로스는 열려 있는 문 쪽을 살폈다. 문 아래에도 위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 시간에 여길 지나갈 사람은 없을 텐데.’
잠이 깊은 마멜라가 장난을 치고 갔을 리는 없고 사용인이 그의 허락도 없이 열고 갔을 리도 없다.
‘……유령?’
이딜로스는 의심스럽게 생각하곤 저 혼자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을 흘렸다. 유령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있나.
애초에 진짜 유령의 짓이라 한들 이딜로스는 딱히 그런 걸 무서워하지 않았기에 괜찮았다. 그저 왜 문을 열어 놓고 간 걸까 하는 짜증만이 들 뿐.
귀신조차 무서워하지 않는 이딜로스가 무서워하는 것은 지상에 딱 하나. 짐승뿐이었다.
이딜로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열어져 있는 문을 닫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때, 바로 밑에서 앙증맞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옹!”
“……!”
이딜로스의 심장이 순간 철렁했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던 그는 제때 책상 모서리를 잡았기에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이딜로스는 소리의 출처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반짝이는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기 고양이가 보였다.
이딜로스는 숨을 짧게 토해 내곤 막연함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 거지?”
“아옹!”
요즘 들어 무서울 정도로 졸졸 쫓아오는 아릴이었다. 이딜로스로서는 뒤에서 곰이 쫓아오는 거나 다름이 없었기에 그는 망연히 문만 노려보았다.
‘누가 열어 준 거지? 직접 열고 들어온 건가?’
이딜로스는 막막함에 아래를 힐끔 바라봤다.
아릴은 눈도 떼지 않고 그를 초롱초롱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꼭 자신을 예뻐해 달라고,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것 같아 매몰차게 쫓아낼 수가 없었다.
이딜로스는 잠시간 고민했다. 이 무시무시한 아기 고양이를 어떻게 돌려보낼지.
그러나 그게 헛된 짓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고양이는 안 그래도 매일같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데다 여기저기서 신출귀몰하는데…… 내쫓아도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체 어쩌다 이 고양이에게 잘못 걸린 걸까.
이전엔 이렇게까지 쫓아다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하루가 멀다고 멋대로 제 집무실에 들어와 활개를 치고 다녔다.
‘꼭 점령당한 것처럼…….’
오금이 저리는 발상이었다. 대체 여길 점령해서 어쩌려는 거지. 여기가 마음에 들어서 제 구역으로 삼으려는 건가.
‘미치겠군.’
이딜로스는 여전히 열려 있는 문을 바라봤다. 열린 문이 거슬려서 움직이고 싶은데 고양이도 따라 걸음을 뗄까 봐 무서웠다.
그가 막막하게 중얼거렸다.
“들어올 거면 문이라도 좀 닫고 올 것이지…….”
“아옹?”
그런데 그의 혼잣말에 고양이가 반응했다. 아릴은 짧은 다리로 달려가 문을 머리로 ‘콩!’ 밀어 닫고는 돌아왔다.
이딜로스는 깜짝 놀랐다. 똑똑하다더니 꼭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했다. 눈치가 그만큼 뛰어난 건가?
이딜로스는 아릴이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것에 걸어 보기로 했다.
그는 경계하는 눈빛을 거두지 못한 채로 고양이에게 명령했다.
“가만히 있어.”
그러곤 아주 조심스레 움직여 의자에 착석했다. 고양이 쪽을 힐끔 보니 아릴은 정말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정말 사람 말을 척척 알아들을 정도로 똑똑한 건가?
뭐가 됐든, 이딜로스는 잉크 펜을 쥐었다. 이윽고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종이를 한 장 넘길 때마다 고양이를 흘끔대며 쳐다봤다. 아릴은 얌전히 앉아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듯 집무를 보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상하게도 집요함이 느껴지는 고양이의 눈빛이 조금 무서웠으나 그래도 움직일 기미는 없어 보였기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평상시엔 제발 들러붙지 말라고 해도 들러붙더니.’
지금만큼은 말을 잘 듣는 아릴 덕분에 이딜로스도 마음 편히 업무에 열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양이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 가량이 지났다.
마침내 이딜로스의 손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딜로스는 피로함에 꽉 매여 있던 타이를 느슨히 풀며 옆을 바라봤다.
너무 기척이 없어서 가 버린 건 아닌가 싶었는데 고양이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반짝이던 두 눈은 나른히 닫힌 채였다.
‘……잠들었네.’
이딜로스는 새근새근 잠든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제 구역인 것처럼 드러누워 도로롱 잠들어 있는 아릴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누군 무서워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이딜로스는 잠든 아릴을 가만히 바라봤다.
‘누가 낚아채 가도 모르겠군.’
이딜로스는 문득 황후가 내팽개쳐 땅에서 끙끙대던 아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저도 모르게 아릴을 안아 올렸는데…… 순간적으로 겁을 상실했던 건지 뭔지.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그랬다.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고양이와 손에 감기던 부들거리는 솜뭉치의 감촉.
분명 무서운 마음도 들었지만 묘하게 피어나는 사랑스러운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귀엽기로는 무엇과 견주어도 비할 데가 없긴 했으니.
제 앞에서 세상 모르게 잠든 고양이를 희한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늘 매몰차게 내치기만 했는데 대체 뭘 보고 따라다니는 거지?’
이딜로스는 자그만 아릴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자 분홍색 발바닥을 내보인 채 발라당 누운 아릴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이딜로스의 시선이 아릴의 분홍색 발바닥에 닿았다가 천천히 올라와, 보송해 보이는 고양이의 털에 닿았다.
‘……보들보들할 것 같아.’
이딜로스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혹시나 고양이가 깰까 봐 심장은 조마조마하게 쿵쾅거렸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공포감에 눈앞이 어질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주 가볍게라도 좋으니 다시 만져 보고 싶다는 양면적인 마음이 충돌을 일으켰다.
이딜로스의 손이 막 부들거리는 털에 닿으려던 때였다.
귓가에서 울리는 가파른 심장 소리에 결국 이딜로스는 움직임을 멈췄다.
‘역시 안 되겠어.’
아쉬운 마음만 남긴 채 손을 거두려던 때였다. 갑자기 아릴의 코가 킁킁 움직이더니 꾸물꾸물 움직여 이딜로스의 손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딜로스는 놀라 기겁했다. 하마터면 덜컥 심장이 멈출 뻔했다.
급작스레 반응했다간 아릴이 놀랄까 봐 손을 빼내지도 못한 이딜로스가 굳었다.
“…….”
그는 요란하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아릴을 살폈다.
‘……자는 건가?’
다행히 고양이는 여전히 쿨쿨 잠들어 있었다. 이딜로스는 긴 숨을 터트리며 가슴께를 쓸었다.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 데도 재주가 있는 고양이였다.
이제는 손을 빼고 싶어도 그러질 못하게 된 이딜로스가 잠자코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손등에 살포시 닿은 고양이의 보들보들한 털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그도 실은 속으로는 이다지 고양이를 예뻐하고 싶었다. 마음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공포를 이길 수 없었을 뿐.
그때 아릴이 조그만 입을 우물거리더니 그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이딜로스는 놀라기도 잠시, 손끝에서부터 감도는 이상한 기운에 숨을 들이켰다.
희미하게 맑은 기운이 밀려들었다. 한순간 피로가 싹 사라졌다.
‘이건 꼭 지난번 악몽 속에서 느꼈던 것처럼…….’
정말로 그때 이 고양이가 다녀갔었던 건가?
……그렇다면 왜 아릴이 다녀가자 지독한 악몽을 끝낼 수 있었던 걸까. 왜 이렇게 이 고양이와 닿으니 머리가 맑아지는 걸까.
‘……넌 진짜 이상해.’
이딜로스는 숨을 고른 뒤에 고양이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