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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36화 (33/191)

36화

“네.”

처음 보는 얼굴의 시녀가 내게 다가왔다. 시녀의 눈에 아무런 감흥도 담겨 있지 않은 것을 본 나는 당황해 뒷걸음질했다.

그러나 그 시녀는 뒤로 물러나는 나를 망설임 없이 덥석 붙잡더니 여자에게로 데려갔다. 나는 놀라 이도 저도 못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나는 마멜라를 바라봤다. 마멜라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끝내는 울 것처럼 표정만 일그러트리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는 시녀에게서 나를 옮겨 받았다. 그런데 나를 제대로 안아 받기는커녕 한 손으로 대충 내 목덜미를 잡았다.

뒷덜미를 확 잡아당기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음? 이 조그만 게 나를 노려보는구나.”

“저, 조금만 조심히…….”

마멜라가 안절부절못하며 말문을 뗐다. 그러나 여자는 나를 휙휙 둘러보며 보란 듯 더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불편해……!’

급기야는 머리까지 어질거려서 나는 바둥거렸다.

이 인간은 대체 뭘 하는 인간인 건지, 마멜라와 이딜로스는 왜 이런 인간을 마주 보고 있던 것인지 온갖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여자에게서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이 인간이 꼭 마멜라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자꾸만 그녀를 흘겨보고 있다는 거였다.

실은 나를 괴롭히려는 목적이 아니라 마멜라를 괴롭히려는 목적이기라도 한 걸까.

마멜라는 그만하라는 말도 못 하고 울먹거렸다.

“아, 아릴…….”

그때였다.

쨍그랑! 찻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티 받침 위로 쾅 놓였다. 화들짝 놀란 나는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거칠게 테이블 위로 놓인 찻잔 속의 찻물이 넘실거리다 못해 사방으로 튄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광경에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찻잔을 부술 듯이 내려놓은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응접실을 메웠다.

찻잔에서 손을 뗀 이딜로스는 거친 행동과 달리 무서우리만치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고양이는 여태 아프다가 막 기력을 찾은 상태입니다. 주의해 주십시오, 폐하.”

이딜로스의 말에 황후는 기이한 걸 본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뭐가 웃긴지 혼자 웃음을 흘렸다. 한껏 즐거운 듯 혼자 웃어 대던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렇담 내가 몹쓸 짓을 하였구나. 돌려주마.”

황후는 나를 던지듯 시녀에게 넘겼다. 그녀가 고개를 까딱하자 시녀는 나를 마멜라에게로 돌려보냈다.

나는 마멜라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폴짝 뛰어 그녀의 품으로 와락 안겼다. 마멜라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고 불안한 시선을 내렸다.

호되게 괴롭힘당하던 나를 보며 울음을 참고 있기라도 했었는지 마멜라가 그렁그렁 젖은 눈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아릴,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그녀의 입 모양으로 말을 알아들은 나는 눈가를 찌푸린 채 황후를 노려봤다.

무서웠냐고? 그럴 리가. 단지 기분이 나빴다.

‘저 인간은 뭐야? 어떻게 고양이에 대한 배려가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나는 으르렁댈 기세로 여자를 노려봤다. 그러다 문득 옆에서 시선이 와닿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나를 쳐다보고 있던 이딜로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딜로스는 나를 훑어보더니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다른 그의 반응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웬일로 인상을 안 쓰지?

나는 의아함과 약간의 기대를 품은 채 이딜로스에게 앞발을 뻗었다. 그러자 이딜로스가 흠칫하더니 경멸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곤 옆으로 살짝 이동했다.

그 익숙한 3단 반응을 본 나는 그럼 그렇지 코웃음을 흘렸다. 오늘은 뭐,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했나 싶었다.

어느새 나와 충분히 멀어진 이딜로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 뜻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내가 오기 전까지 나누었던 이야기의 연장선인 건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후는 기품 있는 미소로 그 말을 받았다.

“마멜라가 지금 입학하나 내년에 입학하나 여길 떠나는 건 매한가지인데 왜 시일을 앞당기면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마멜라의 의사도 존중해 주셔야지요. 제 동생이 원치 않는다면 폐하의 요구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설령 명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딜로스의 말에 황후는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여전히 건방지구나.”

“…….”

“그래, 알았다. 이만 가 보마. 지금은 너와 입씨름하기 싫구나.”

여자는 생각보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딜로스는 그녀를 배웅할 생각이 없는지 도리어 다리를 꼬며 찻잔을 들었다.

“부디 다음에 오실 땐 연통을 넣고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황후 폐하.”

“아, 안녕히 가세요, 폐하…….”

나는 이상할 정도로 떠는 마멜라의 대답에 고개를 들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팔까지 잘게 떨고 있던 마멜라는 시선도 들지 못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마멜라를 새끼 강아지라도 대하는 눈빛으로 보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멜라, 다음에 보자꾸나. 나는 네가 언제든 황궁으로 와 주었으면 좋겠단다.”

“아옹……!”

마멜라의 눈빛에 일순간 두려움이 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원인인 것이 분명한 여자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황후는 겁먹기는커녕 나를 보며 기묘한 웃음만 걸친 채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여자가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는 웃음을 띤 채 우리를 돌아봤다.

“참, 어여쁜 화원이 생겼더구나. 구경을 좀 하다 가고 싶은데. 이마저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믿으마.”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딜로스는 탐탁잖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대답에 만족스러운 눈을 하던 여자는 데리고 온 시종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마멜라는 기다렸다는 듯 숨을 길게 터트렸다. 갑갑했는지 뻣뻣하게 앉아 있던 자세도 축 늘어뜨렸다.

나는 마멜라의 무릎 위에서 적개심 어린 눈으로 여자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아까 그 인간, 마멜라가 엄청 불편해하는 것 같았어. 마멜라뿐만 아니라 이딜로스도…….’

나는 어느새 나와 몇 뼘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이딜로스는 살벌하게 맞은편의 자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저 미친 여자가 직접 찾아올 줄이야.”

이딜로스의 싸늘한 목소리에 한기를 느낀 나는 마멜라의 품 안으로 슬쩍 도망쳤다. 그러자 마멜라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릴, 괜찮아? 어떡해. 아직 기력이 없을 텐데…….”

마멜라가 황후 폐하를 말리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먹거렸다. 나는 그런 마멜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앞발을 뻗었다. 내 발바닥이 마멜라의 뺨을 꾹 눌렀다.

“아옹.”

“괜찮다고 하는 거야?”

“아옹.”

내가 마멜라의 뺨을 다시 한번 누르자 이번에는 마멜라가 웃음을 흘렸다.

“다행이야, 아릴.”

“…….”

옆에서 나와 마멜라가 교감하는 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이딜로스를 흘긋 바라봤다. 평상시엔 관심도 안 주더니 오늘은 왜 자꾸 쳐다봐?

사실 아까 그가 말한 내 가치 때문에 조금 삐쳐 있었던 나는 고개를 새침하게 홱 돌렸다. 이래 봤자 이딜로스는 눈 하나 깜빡 안 할 인간이기는 했지만.

마멜라의 품에 얌전히 기댄 나는 익숙하게 그녀의 머리칼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사이 마멜라가 말했다.

“오라버니, 그런데 조기 입학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멜라의 물음에 이딜로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용케 깨지지 않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크로델 왕립 학교의 기숙사가 황궁과 가깝다는 걸 너도 알 거다. 그러니 방계라면 황궁에서 직접 지낼 수도 있지. 그 여자는 널 하루빨리 황궁에 불러들이고 싶은 거야.”

마멜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러기 싫어요……!”

마멜라의 떨림이 가까이 붙어 있던 나한테까지 전해졌다. 나는 의아했다. 마멜라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딜로스가 마멜라를 바라봤다. 그녀를 다독이려는 듯 한없이 자상한 눈빛으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해. 네가 황궁에서 지내는 일은 학교에 입학하고서도 없을 거야.”

“네…….”

“올라가서 이만 쉬어. 네 고양…… 아릴도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할 텐데.”

애써 미소 지은 마멜라가 나를 안은 채 일어섰다.

나는 마멜라와 함께 나가면서 뒤를 바라봤다. 홀로 찻잔을 들고 있는 이딜로스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오늘 아무래도 이딜로스의 태도가 조금 변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인 걸까?

방으로 돌아가자 마멜라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서 피곤하다며 곧바로 침대에 뻗어 버렸다. 들어 보니 마멜라가 밤새 나를 간호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푹 자라는 의미로 마멜라에게 내 기운을 조금 밀어 넣어 주었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나는 곯아떨어진 마멜라를 두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 놀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문득 일전에 마멜라와 함께 놀았던 텃밭이 생각났다.

요나가 거기다 심어 둔 딸기가 무척 맛있었는데…….

달콤한 딸기를 떠올리는 순간 고이는 침에, 나는 슬쩍 눈을 굴려 마멜라를 바라봤다.

지금 아무도 모르게 텃밭에 가면 거기 열린 딸기는 모두 내 것일 텐데.

그 유혹적인 생각에 망설이기를 두 번. 나는 곧장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 가서 몰래 먹고 오면 아직 환자인 내가 딸기를 모두 먹어 치웠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잽싸게 마멜라의 방문을 열고 나간 나는 시종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개구멍을 타고 텃밭으로 향했다. 워낙 저택 탐험을 많이 한 덕에 이런 지름길들도 찾아낼 수 있었던 거다.

이 모든 게 오늘을 위한 선견지명이었다는 생각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텃밭에 도착하자 분홍 빛깔의 자그만 여름 딸기가 오밀조밀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사료만 먹고 살던 나는 여기저기에 널린 딸기를 보곤 눈을 빛냈다.

‘마멜라와 왔을 땐 몇 개 먹었더라……. 두 개?’

마멜라도 너무했다. 나한텐 두 개밖에 안 줬으면서 정작 자신은 열 개도 넘게 혼자 따 먹었으니.

‘마멜라가 먹을 딸기 두 개만 남겨 두고 전부 내가 먹어 버려야지.’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 딸기밭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딸기를 먹기 위해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보니 텃밭이 금세 엉망이 돼 요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각은 즐겁게 팡팡 터지고 있었다.

‘평생 이 맛을 모르고 사료 맛만 알고 살았더라면 삶의 의미가 없을 뻔했어.’

한참 무아지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흙과 풀잎을 파헤쳐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딸기의 과육을 먹고 있는데 뒤에서 느릿한 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응? 누구지?’

깜짝 놀란 나는 증거 인멸을 위해 서둘러 붉게 물든 앞발을 흙에 문질렀다. 딸기에 물들어 있던 털이 금세 흙먼지로 덮여 새까매졌다.

증거 인멸을 끝낸 뒤 돌아보자 눈앞에 누군가의 뾰족한 구두가 보였다.

그를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내 앞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웬 인간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꼬리와 귀를 바짝 세워 경계했다. 아까 그 황후 폐하라던 못된 여자였다.

‘뭐야, 이 인간이 왜 여기 있지? 여긴 내 구역이야! 화원은 저쪽! 반대편이라고.’

“아옹아옹!”

내 경고가 들리지 않는 건지 황후는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내게 양팔을 벌렸다.

“이런, 신나게 놀았는지 아주 꼬질꼬질하구나. 내가 씻겨 줄 테니 이리 오련?”

나는 여자를 흘겨보곤 고개를 휙 돌렸다. 내가 꼬질꼬질하든 뽀송뽀송하든 이 인간이 무슨 상관이지?

여자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탓에 나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 여자의 그림자가 점차 내 위로 거대하게 드리웠다.

여태 꿋꿋하게 이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조금 위압감이 들어 쭈뼛거렸다.

나는 황후를 노려보다가 달아나기 위해 등을 돌렸다. 발을 열심히 움직였지만 순간 내 몸이 단숨에 허공을 날았다.

“도망가지 말렴. 난 무서운 사람이 아니야.”

어느새 나는 아까처럼 뒷덜미가 붙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황후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럴수록 여자는 나를 더 꽉 붙잡았다.

‘아파……!’

황후는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너만 데려가면 우리 마멜라가 황궁에 오지 않겠니? 꽤 널 아끼는 것 같던데. 나 역시 널 아주 예뻐해 주마.”

“아옹!”

뭐라는 거야, 이게!

나는 황후를 향해 열심히 발길질했다. 그러나 내 짤따란 발은 여자의 머리칼에는 닿지도 못했다.

“쯧, 더럽게 흙이 튀지 않니. 얌전히 있을 것이지.”

여자는 성가시다는 듯 나를 붙잡은 손을 옷에서 멀찍이 떨어트렸다. 그러곤 한쪽 손목에 걸고 있던 손가방을 벌렸다.

그리 큰 사이즈는 아니었지만 나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것 같은…… 작정하고 챙긴 가방 같았다.

‘날 정말로 데려갈 셈인 거야……!’

그런 확신이 들기가 무섭게 여자가 나를 가방에다 욱여넣기 시작했다. 나는 앞발과 뒷발을 모조리 동원해 힘껏 반항했다.

“쪼그만 게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야!”

내가 낑낑대며 견디자 여자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화가 난 건지 내 머리와 다리를 억지로 눌러 대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이젠 발길질은커녕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마멜라……. 도와줘, 마멜라!’

여자의 우악스러운 힘에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나는 최후의 발악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아옹……!”

그때 어디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원한 향기가 공기 중에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바로 뒤편에서 걸음이 멈추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나를 밀어 넣던 여자의 손이 멈췄다. 나는 그 틈을 타 힘겹게 가방에서 고개를 빼 들었다.

그러자 시선이 마주쳤다.

무서우리만치 서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굳은 표정의 이딜로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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