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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34화 (31/191)

34화

그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평소 고양이인 아릴을 대할 때보다 더한 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라 아릴은 당황해 굳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대답하는 게 좋을 텐데.”

“…….”

이딜로스는 정말로, 대답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아릴을 노려봤다.

이 또한 기막힌 재현이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딜로스의 더러운 심보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표정에 찔끔한 아릴은 우물쭈물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 그게, 나는…….”

다만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이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딜로스는 진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황당할까.

정체가 수상한 짐승을 마멜라의 곁에 둘 수 없다며 아릴을 끌고 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무리 꿈이어도 아릴은 그런 결말을 원치 않았다.

어쩌면 좋을지 막막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멀리서 안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그 부름에 이딜로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릴의 눈이 기회를 엿보고 빛났다.

‘아, 이때다!’

아릴은 이딜로스가 보지 않는 틈을 타 날렵하게 근처 수풀로 몸을 날렸다.

“잠깐……!”

이딜로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릴은 몸이 커져도 고양이일 때나 다름없는 속도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수풀로 들어오니 아릴의 시야에 다시금 보송한 앞발이 들어왔다.

‘다시 고양이가 됐잖아……?’

그 변화가 이상해 앞발을 요리조리 돌려 보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이딜로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이딜로스의 눈빛을 떠올린 아릴은 깜짝 놀라 수풀을 따라 달렸다.

멀어지는 뒤편에서 이딜로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거지?”

아릴은 한참을 빙빙 돌아 이딜로스를 따돌렸다. 그 탓에 마멜라의 방으로 돌아갔을 땐 아릴의 몸은 엄청나게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한창 독서 중이던 마멜라는 아릴을 힐끔 보더니 깜짝 놀라 책을 내팽개쳤다.

“아릴, 어쩌다 이렇게 더러워졌어?”

“아옹…….”

아릴은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힘들어서 헥헥 숨을 고르자 마멜라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아릴은 반응 없이 축 늘어졌다. 몰라. 엄청 이상한 일을 겪었으니까…….

아릴의 자그만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꿈이 이렇단 말인가. 꿈이면서 이렇게 힘든 것까지 생생한 것도 이상했다.

아릴은 마멜라가 내미는 손에 얌전히 몸을 기대었다. 기분 좋은 냄새가 나서 아릴은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아까 너무 뛰어서일까, 온몸에 힘도 빠지고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다.

마멜라의 손에 이마를 문지르던 아릴은 여트막한 한숨을 터트리곤 눈을 감았다. 또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드디어 이 개꿈에서 깨어나려 하는 걸까.

인간이 되는 꿈 같은 건 더는 꾸고 싶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 따윈.

* * *

“아릴, 일어나. 밥은 먹어야지.”

마멜라가 아릴의 보송한 털을 흔들어 깨웠다. 대자로 뻗어 있던 아릴은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얼마나 깊게 잠들어 있었던 건지 깼는데도 정신이 꿈나라를 오갔다.

아릴은 입을 크게 벌려 하품했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앞발을 핥았다.

인간의 매끄러운 피부 같은 게 아닌 고양이의 익숙한 털이 결을 따라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릴은 한참 털을 정리하다가, 문득 꼬질꼬질했던 털이 깨끗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다 올라간 적 없는 마멜라의 침대 위에 누워 있기까지 했다.

‘아까 그게 꿈이었으니까 당연한 건가.’

그런 개꿈을 꿨다는 게 조금 민망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인간이 되고 싶다고 계속해서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아릴, 이리 와.”

마멜라는 아릴의 노란색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 주며 말했다. 사료 봉투가 부스럭대는 소리만으로 진저리가 난 아릴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터덜터덜 침대에서 내려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가득 채워져 먹음직스러운 척을 하는 사료가 보였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빨리 먹고 치워야지 어쩌겠어.’

아릴은 심호흡한 후 전투적으로 사료에 고개를 파묻고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먹는지 사방으로 사료가 튀었다.

먹는 양 반, 날아가는 양 반이었다. 사실 이것도 노린 것임을 마멜라가 몰라야 할 텐데.

그 옆에 앉아 아릴이 무아지경으로 먹는 걸 지켜보던 마멜라는 흐뭇하게 웃었다.

“맛있나 보네, 더 줄까?”

하필 맛을 차단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아릴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마멜라가 뭐라고 말하건 우걱우걱 씹어 삼키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멜라가 사료를 더 부으려는 듯 사료 봉지를 집어 드는 게 아닌가.

아릴은 기겁해서 울부짖었다.

“아오옹!”

깜짝 놀란 마멜라가 굳었다.

“왜, 왜 그래? 먹기 싫어?”

당연하지. 이걸 누가 더 먹고 싶어 하겠어!

울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던 아릴은 화가 나서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려치기만 했다. 마멜라는 시무룩하게 사료를 내려놨다.

“알겠어……. 안 주면 되잖아.”

너무 사납게 운 걸까. 마멜라가 풀이 죽었다. 왠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아릴은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너도 이걸 먹어 보면 내 마음을 알겠지.’

아릴이 밥그릇을 비워 갈 즘엔 마멜라가 자리를 떠 거울 앞에서 옷가지를 정리했다. 막 사료를 다 먹은 아릴이 고개를 들자 마멜라가 다가왔다.

“다 먹었네. 이제 가자.”

“아옹?”

아릴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간다는 거지?

딱히 말로 내뱉지 않아도 찰떡같이 알아챈 마멜라가 아릴을 안아 들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빨리 돌아오셔서 자기 전에 뵈러 가려고.”

마멜라는 아릴을 안은 채 방을 나섰다. 그녀는 품 안 가득 들어온 작고 소중한 아릴의 보들보들한 털을 쓰다듬으며 오라버니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릴은 어느새 가까워진 이딜로스의 냄새를 맡으며 문득 꿈에서 본 이딜로스를 떠올렸다.

바람결에 흔들리던 머리칼. 놀란 듯 천천히 커지던 눈.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살을 받아 평소보다 미려하던 얼굴.

거기다 홀린 것처럼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선까지…….

평소의 까칠한 모습과는 다른, 모든 경계를 허문 듯한 무해한 표정이었다. 그런 모습은 아릴에게 있어 왠지 조금 이상한 기분을 일으켰다.

무해한 모습의 그를 괴롭혀 보고 싶다는 얄궂은 마음과 알 수 없는 소유욕과 독점욕 같은…… 그런 터무니없이 이상한 것들.

그러나 곧이어 그의 경멸 어린 시선이 떠오르자 아릴은 마음이 확 식는 것을 느꼈다.

꿈에서 본 무해한 표정이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그래, 이쪽이 이딜로스지. 애초에 그건 가짜잖아.’

아릴은 마멜라의 품에 안겨 이동하면서 복도를 둘러봤다. 늘 창밖으로만 보이던 경비병들이 복도 곳곳에 서 있었다.

아릴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복도까지 경비를 서지는 않는데 이상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어느새 이딜로스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마멜라가 노크했다.

“오라버니, 저예요. 들어가도 돼요?”

잠시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마멜라는 익숙한 박대에 아릴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오라버니가 일부러 우릴 돌려보내려고 대답하지 않으시나 봐.”

“아옹……?”

그걸 그렇게 해석할 수 있나?

문득 아릴은 지난 며칠간, 이딜로스의 마음을 얻으려고 마멜라와 함께 집무실에 쳐들어간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 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

멋대로 이딜로스의 집무실을 들이닥쳤다가 몇 번을 쫓겨났더라…….

아릴이 횟수를 세어 보고 있는데 마멜라가 문고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안 열어 주실 것 같으니까 그냥 들어가자.”

아릴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 그래도 되는 거야?

아릴은 마멜라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마멜라는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릴은 마멜라의 돌발 행동에 긴장해야 했다.

들어가면 분명 이딜로스가 질겁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리라.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더 심할 게 분명했다.

마멜라는 해맑은 표정으로 외쳤다.

“오라버니!”

“…….”

그런데 의외였다.

이딜로스가 잔뜩 인상을 찌푸릴 것이라 예상했던 아릴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책상 한 귀퉁이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애초에 마멜라와 아릴이 찾아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릴은 의아했다.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평상시엔 어떻게든 자신을 내쫓으려 혈안이 되어 있지 않던가.

이상함을 느낀 건 마멜라도 마찬가지인 건지 그녀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저 왔어요.”

“……?”

그제야 이딜로스가 반응했다. 고개를 든 그가 그들을 바라보곤 표정을 굳혔다.

안 그래도 금이 가 있던 그의 미간에는 더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이딜로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따로 고민거리가 있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아릴을 봐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후자인 거라면 아릴은 조금 마음 아팠다.

“마멜라.”

“아, 쫓아내시려는 거면 조금만 참아 주세요. 3분만 어필할게요. 우리 아릴이는요…….”

“아니, 그러려는 게 아니라.”

“네?”

마멜라는 의외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마멜라를 올려다본 아릴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이딜로스는 골칫거리가 있는지 피곤하게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말했다.

“혹시…… 수상한 사람 못 봤어?”

“수상한 사람이요?”

“응. 여자였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아릴은 홀로 심각함에 잠겼다.

수상한 사람이라니 설마 카델라로트 저택에 침입자라도 들어왔나?

이곳은 고양이인 아릴이 봐도 삼엄할 정도로 경비가 철저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들여보내지 않을 정도로 빡빡한 곳으로 보였는데.

그런데 그 경비를 뚫고 침입한 인간이 있단 말인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무척 대단했다.

‘뭐가 됐든 내가 발견하면 이딜로스에게 물어다 줘야지.’

혹시 모른다. 그렇게 침입자를 갖다 바치면 자신을 좋아해 줄지.

애초에 그 침입자가 이 저택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지 않나. 마멜라나 이딜로스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그건 정말로 안 될 일이었다.

‘좋아, 내가 못된 침입자를 붙잡고 이딜로스의 마음도 얻어 낼 거야!’

아릴은 기세등등하게 마음먹고는 마멜라와 이딜로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수상한 여자는 못 봤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요?”

“혹시 보게 되거든 도망쳐. 어떤 수상한 여자가 오늘 갑자기 나무 위에서 날 덮쳤어. 차림새로 보기엔 자객은 아닌 것 같았지만……. 갑자기 달아나 버려서 놓쳤거든.”

“네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아릴은 귀를 쫑긋 세우곤 이딜로스의 말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왠지 익숙한 것 같지만 착각이겠지.

이딜로스가 말했다.

“기억나는 인상착의를 알려 주마.”

아릴이 눈가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인상착의, 저걸 알아야 침입자를 붙잡을 수 있다.

아릴은 제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딜로스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머리 색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색이었어. 새하얬거든. 눈은 푸른색이었고 키는 정확하진 않지만, 이 정도쯤 되었을 듯한데. 그리고 옷은…….”

“……옷은요?”

술술 말하던 이딜로스가 돌연 말끝을 흐렸다. 마멜라는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딜로스는 어째선지 갑자기 시선을 피했다.

이딜로스가 말을 멈춘 사이, 머릿속으로 침입자의 몽타주를 그려 보고 있던 아릴은 뭔가를 눈치채곤 굳었다.

‘……잠깐, 새하얀 머리에 푸른 눈?’

왜 이리도 꿈속의 자신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딜로스가 나무 위에서 덮쳤다고 말했던가?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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