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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31화 (28/191)

31화

<……아릴.>

잔잔하게 귓가에 감돌던 목소리.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잊어버릴 정도로 부드러운 음감이었다.

마멜라의 다리를 앞발로 꾹꾹 누르고 있던 나는 기분이 좋아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 진짜, 이딜로스도 이제 다른 인간들처럼 날 엄청 좋아하게 되는 거 아니야? 그러면 곤란한데.’

이딜로스가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건 그동안 수없이 상상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름 한 번 불렸다고 그에게 인정받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창 바보처럼 수줍어하던 중에 마멜라의 다리에 꾹꾹이를 하던 앞발이 삐끗했다.

쑥 미끄러져 내려간 나는 소파로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마멜라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릴, 괜찮아?”

마멜라는 나를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아픈 곳 하나 없던 나는 씩씩하게 울었다.

“아옹.”

“안 되겠어. 이리 와, 아릴.”

내 당찬 울음에도 마멜라는 나를 안아 들어 쿠션이 차곡차곡 쌓인 푹신한 보금자리로 옮겨 주었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 또 아프기라도 하면 분명 덧날 거야.”

“아옹…….”

신전에서 아슐란이 다녀간 직후부터 줄곧 절대 안정을 취해야 했던 나는 절망 어린 눈으로 마멜라를 바라봤다.

나로서는 너무 감쪽같이 나아서 이대로 뛰어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마멜라는 내가 움직이려는 기미만 보여도 안 된다고 대못을 박았다.

‘뛰어놀고 싶은데…….’

이 자리가 따뜻하고 포근하고 푹신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쿠션 더미 위에서 고인 빗물처럼 썩어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시무룩하게 쿠션 위로 고개를 묻었다. 마멜라가 이러길 바라는데 무턱대고 고집을 피울 수는 없지 않나.

그때였다. 바깥에서 웬 인기척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마멜라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을 바라봤다.

마멜라의 방으로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한꺼번에 찾아드는 것은 처음이라,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사이 인간들 중 누군가 노크했고, 마멜라가 문을 열었다.

나는 쿠션 틈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문 쪽을 바라봤다. 마멜라와 바깥의 인간들이 인사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저 인간들은 다들 나와 안면이 있는 인간들이었다. 하나같이 다 나를 예뻐하는 저택의 사용인들이었으니.

“아가씨, 아릴은 이제 괜찮은 건가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손을 모아 쥔 그들이 내 안부를 물었다.

‘아. 아픈 나를 걱정해서 와 준 거야……?’

그들의 병문안에 감동한 나는 벌떡 일어나 쿠션들을 파헤치고 방문 앞으로 달려갔다.

“어머, 아릴이네!”

내가 불쑥 나타나 당황한 표정을 지은 마멜라는 반가워하는 사용인들 앞에서 나를 돌려보내지는 못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옹!”

“아릴, 이제 아프지 않은 거지?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나는 병문안까지 와 주는 인간들의 기특함에 보상이라도 주듯 양껏 애교를 부렸다.

가장 앞에 있던 인간의 손을 핥자 뒤편에서 탄식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손도 맛있는데…….”

“다음번엔 손에 간식이라도 묻히고 와. 그래야 나처럼 선택받지.”

그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들은 나는 손바닥을 할짝이다 말고 멈췄다. 어쩐지 고기 맛이 나더라니 그런 거였냐.

이 저택의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내 관심을 받고 싶어 할까. 이딜로스를 제외하곤 모두가 그런 것 같다.

안셀도 늘 나를 마주칠 때면 가뭄에 단비처럼 나를 반기지 않던가?

‘인간들은 나 같은 아기 고양이를 되게 좋아하나 봐.’

그들의 관심이 재미있어 한창 즐기고 있을 때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이 인간들을 이용하면 오랜만에 밖을 나갈 수도 있겠는데?’

나는 아무래도 꽤 천재 고양이인 것 같다.

마멜라를 흘끔 바라본 나는 바로 옆에 있던 시녀의 옷자락을 물고 문밖으로 낑낑 잡아당겼다.

그러곤 바깥이 몹시 그립다는 간절한 눈빛도 장착한 채 시무룩하게 시녀를 올려다봤다.

“어머나……. 아가씨, 우리 귀여운 아릴이 밖을 나가고 싶나 봐요.”

“안 돼. 사제님이 아릴이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마멜라의 말에 시녀가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그에 지지 않고 초롱초롱 빛이 나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올려다봤다.

‘내 부탁을 안 들어주려고? 이렇게 간절하게 쳐다보는데?’

인간들을 구워삶기 위한 귀여움과 가여움으로 중무장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내가 맹한 생김새라 해도 이게 인간들에게는 제법 좋게 통한다는 걸 그간 안셀과 마멜라를 봐 오면서 알고 있었다.

“아옹…….”

아니나 다를까 사용인들은 나를 가엾게 바라보더니 듬직하게 나섰다.

“아가씨, 저희가 있는걸요. 아릴이 흥분하지 않도록 책임질게요.”

“맞아요, 아가씨. 아릴이 탈 나지 않게 조심히 놀아 줄게요.”

나는 얼굴을 활짝 펴고 그들을 바라봤다.

사용인들은 나를 밖으로 내보내 주기 위해 간절함을 담아 마멜라를 바라봤다.

마멜라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우리 아릴이 좀 부탁할게.”

“네! 저희에게 맡겨만 주세요!”

사용인들의 무리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시녀, 베로니가 나를 안아 들었다.

얌전히 안겨 방을 나간 나는 방문이 닫히는 순간 베로니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의연하게 착지한 나는 내 완벽한 착지에 점수를 만점으로 매겨 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갑갑하던 방을 나와서인가 기분이 무척 들떴다.

나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들에게 놀아 달라고 보챘다.

“뭘 하면서 놀아 주어야 아릴이 좋아할까?”

“내가 이럴 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해 왔지.”

한 인간이 주머니에서 쥐처럼 생긴 조그만 인형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호기심에 냄새를 킁킁 맡다가 인형을 물자 삐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인형을 떨어트렸다.

‘소리가 나잖아……!’

인간들의 문물을 접하곤 신기함에 눈을 반짝였다. 잠시 뒤로 물러났던 나는 몸을 낮추었다가 쥐 인형으로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인형이 삐이익, 하고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내 정신이 인형에 팔린 사이, 장난감을 가지고 왔던 인간은 다른 것도 있다며 주머니에서 온갖 신묘한 장난감들을 자랑처럼 꺼내 놓기 시작했다.

불빛이 나는 요술 낚싯대부터 꾹 누르면 내 발바닥 모양이 남는 쫀득한 젤리 볼까지.

모든 게 신기했지만 솔직히 이 모든 걸 담아 온 인간의 주머니가 가장 궁금했다.

나는 신통방통한 장난감을 가지고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다들 할 일이 없어 한가한 건지 내가 빨빨대는 것을 지켜보거나 장난감을 들고나와 놀아 줬다.

내가 귀엽다며 웃는 소리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인간들의 웃음소리는 듣기 좋아.’

그들 역시 애교쟁이인 내 면모를 좋아하니, 고양이와 인간은 이런 식으로 긍정적인 부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걸까 싶었다.

한껏 애교를 부리던 중 한 시녀가 간식을 꺼내어 쥔 손바닥을 불쑥 내밀었다. 밀려오는 간식의 냄새에 나는 하고 있던 모든 걸 중단하고 손바닥을 쳐다봤다.

이 인간…… 뭘 좀 아는 인간이다. 내 관심을 독차지하려면 어떻게 하는 건지 알고 있잖아.

“이리 온, 아릴.”

“아옹.”

오라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갔다. 일전에 마멜라가 낯선 인간이 먹을 거로 유인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내게 충고했었지만 나는 모른 척 눈을 초롱초롱 떴다.

왜 따라가지 말라는 거지? 상대가 못된 인간이라면 간식만 낚아채고 도망가면 되는데.

취할 수 있는 모든 이득을 취하고 내빼야 할 것 아닌가. 마멜라는 너무 무르다.

나는 간식을 받아먹기 위해 시녀의 손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 손에서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간식을 입에 물긴커녕 움직임을 뚝 멈췄다.

왜냐하면 이 인간의 손에서 나는 냄새가…….

‘……이딜로스?’

코를 몇 차례 킁킁댄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고 있는 시녀의 얼굴이 보인다. 시녀는 웃음을 띤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먹어도 돼.”

“넬라, 아릴은 별로 간식 생각이 없나 봐.”

“그럴 리가! 아릴은 때를 가리지 않고 간식을 찾는다고 아가씨께 들었는걸.”

다른 사용인과 대화를 하느라고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인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동공이 사냥감을 가늠하듯 축소되었다가 커지길 반복했다.

……이 인간의 손에서 왜 이딜로스의 냄새가 나지?

왜…… 이 인간의 손에서 묻어나지 말아야 할 냄새가 날까?

마지막으로 코를 벌름거린 나는 간식을 뒤로하고 시녀의 손을 핥았다. 내가 갑작스레 손을 할짝이기 시작하자 시녀는 흠칫했다. 그러곤 뭐가 좋다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릴, 너무 간지러워!”

아까까지만 해도 듣기 좋았을 웃음소리가 지금은 이상하게도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넬라라고 했던가. 이 인간의 손에서 이딜로스의 냄새가 나는 건 우연일까?

난 왜 이리도 못 견디게 기분이 나쁜 거지?

넬라의 손에서 이딜로스의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내 흔적을 마구잡이로 묻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안셀에게 내 영역을 침범당했을 때 느꼈던, 그래 딱 그 불쾌함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에게 이런 감정이 들어도 되는 걸까……?

그때 넬라의 옆에 있던 인간이 말했다.

“아무래도 간식이 안 먹고 싶은 게 맞나 봐. 이리 줘. 내가 버릴게.”

“……아옹!”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간식을 빼앗길 새라 잽싸게 입에 물었다.

‘아니, 지금 내가 간식을 눈앞에 두고 잃을 뻔한 거야? 저 인간은 또 왜 멀쩡한 걸 버린대?’

찰나 간 이상하게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던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넬라를 올려다봤다.

다른 인간에게서 이딜로스의 냄새가 나는 게…… 뭐가 어때서?

넬라가 우연히 이딜로스와 부딪혔을 수도 있는 거고 이딜로스에게 물건을 가져다준 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어쩌면 넬라가 빨래 담당인 걸 수도 있는 거고.

불안정하게 넘실대는 감정을 애써 다스린 나는 간식을 준 넬라에게 고마움을 담아 해맑게 울었다.

넬라는 아까까지 이딜로스의 냄새가 묻어 있던, 그리고 이제는 내 흔적으로 범벅된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눈앞에서 흔들리는 요술 낚싯대에 정신이 팔려 낚싯대를 따라 폴짝 뛰었다.

어느새 아까의 불쾌감은 잊히고 있었다.

“아릴은 고양이들 중에서 유독 활발한 것 같아.”

“아옹!”

당연하지. 나는 고양이들 중에서도 가장 커다랗고 멋있는 천재 고양이거든!

인간들의 칭찬에 으쓱한 나는 다시 한번 낚싯대로 폴짝 뛰어올라 걸려 있던 자그만 물고기 인형을 붙잡았다.

사용인들이 내게 잘한다며 흐뭇하게 박수를 쳤다.

그러던 중, 내게 낚싯대를 흔들어 주던 시녀가 돌연 창밖을 바라봤다.

“왜 그래?”

의아함을 느낀 다른 사용인들이 창문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곤 시녀와 똑같이 창밖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들이 수군거렸다.

“어머, 안셀 님 힘드시겠다……. 하필 저런 진상 손님을…….”

“어떻게 공작저에 개를 데리고 올 생각을 하지? 그것도 세 마리씩이나.”

그들의 말에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진…… 무슨 손님? 개를 데려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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