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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29화 (26/191)

29화

안셀은 낯익은 자애로운 미소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순간 반가운 마음이 치밀어 소리까지 쳤다.

“아니! 와 주시기로 한 수의님이 사제님이셨습니까? 이제야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겠군요.”

“아, 지난번 그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이딜로스의 시선이 화색을 띤 채 앞으로 몇 걸음 나온 안셀에게로 넘어갔다.

안셀은 머쓱하게 웃더니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 전하께서 처음 아릴을 발견하셨던 날 제게 도움을 주셨던 사제님이 계신다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분이십니다.”

“그렇군.”

“그런데 전하와 사제님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입니까? 아, 혹시 신전에 후원금을 보낼 때 정산해 주시는 분이 사제님이십니까?”

아슐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없이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잘못 짚었음을 눈치챈 안셀이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아, 신전에 가끔 오가며 종종 마주쳤던 사이인가 보군요.”

“안셀.”

“예?”

이번에야말로 맞으리라 생각했건만 이딜로스의 눈빛은 굳어져 있었다.

또 헛다리인가? 하지만 그 두 사례가 아니면 이딜로스와 신전의 사제 간의 접점은 하나도 없었다.

워낙 힘든 시기를 홀로 감수했던 탓인지 이딜로스는 유독 신앙심이 없어 사실 신전을 잘 찾지도 않았다.

갈피를 못 잡는 안셀을 보며 이딜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는 어디다 두고 왔느냐는 식으로 그가 말했다.

“신전의 삼 사제님이시다.”

“아, 사제님이신 건 저도 아는 사실……. 잠깐, 삼 사제님요? 칠성 삼 사제님이시란 말입니까?”

안셀은 턱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입을 떡 벌렸다. 시선을 천천히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온화한 미소가 깃든 눈으로 마냥 웃고 있는 아슐란이 보였다.

“소개가 늦었군요. 크로델리아 대신전의 칠성 삼 사제 아슐란이라고 합니다.”

“대, 대신관님!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안셀은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허리를 숙였다. 아슐란은 곤란한 낯으로 그를 만류했다.

“고개를 드시지요. 제게 그런 인사는 과분합니다.”

“아, 아니, 제가 감히 쳐다봐도 될지…….”

이딜로스는 안셀의 오버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신전에서 칠성의 삼 사제란 최고위 신관에 해당했다.

먼 옛날 교황이란 신분이 존재했을 때 교황의 독재를 막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실과의 동등성을 위해 교황이란 신분을 세 명의 신관으로 쪼갠 것이 바로 일곱 개의 별을 거느린 세 명의 사제, 칠성 삼 사제였다.

그래 봤자 같은 사람인데.

이딜로스는 90도로 허리를 접고 있는 안셀의 등을 탁 치고는 말했다.

“삼 사제님께서 고개를 들라 명하지 않던가.”

“명은 아닙니다만…….”

“그보다 귀하신 분이 이리 직접 방문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사제들을 시키시면 될 것을, 많이 무료하신가 봅니다.”

이딜로스의 거침없고 무례한 말에 안셀은 기겁했다.

황후나 황제에게는 사연이 있어 그렇다 쳐도, 대신관에게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더구나 안셀은 이딜로스가 오래전에 칠성 삼 사제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이딜로스 본인 입으로 직접 들은 말이었다.

안셀은 안절부절못하며 아슐란을 살폈다. 다행히 아슐란의 표정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고 있었다.

“공께서는 신전의 유망한 후원자님이 아니십니까. 덕분에 신전도 많은 신세를 지고 있으니 인사차 오랜만에 뵈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이딜로스의 무관심한 대답에도 아슐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공께 전하고픈 말도 있고요.”

“……무엇입니까?”

그제야 관심을 보이는 이딜로스에게 아슐란이 몇 걸음 다가갔다.

안셀은 이유 모를 위압감과 후광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아슐란을 바라봤다.

아슐란은 스쳐 지나갈 듯한 애매한 거리에서 낮게 읊조렸다.

“따지자면 충고입니다만. 공녀의 고양이를 부디 가까이 두십시오.”

“……?”

의미 모를 말에 이딜로스가 아슐란을 바라봤다. 지척에서 마주친 심연 빛의 녹색 눈이 부드럽게 접히더니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갔다.

“충고는 그게 다입니다. 그럼 다음번에 또 뵙지요.”

이딜로스는 제 할 말만 마친 채 인사도 받지 않고 가 버리는 아슐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고양이를 가까이 두라고?’

저의도 알 수 없는 말을 따라야 하나?

이딜로스는 불신이 담긴 눈으로 멀어지는 흰 자태를 바라봤다.

옆에서 안셀의 아쉬운 곡소리가 들렸다.

“대신관님! 아이고, 차라도 들고 가시지……! 작별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이딜로스는 그런 안셀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안셀이 서둘러 쫓아왔다.

“복도도 넓은데 같이 갑시다, 전하!”

“돌아가서 서류나 엮고 있지 그러나.”

“아, 예? 진심이십니까?”

“난 늘 진심이다. 잘리고 싶냐 물을 때도 진심이지.”

“……아가씨의 방까지 무탈하게 가시길 바랍니다.”

안셀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이딜로스에게 꾸벅 인사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입을 내밀고 억울함에 눈을 글썽이면서 말이다.

안셀을 버리고 마멜라의 방문 앞에 선 이딜로스는 선뜻 노크하지 못했다.

이 문 너머 그 고양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긴장감에 몇 번이고 망설이게 되었다.

‘……해.’

소심하게 자신을 응원하곤 마침내 문을 두 번 두들겼다.

“마멜라, 잠시 들어가도 될까?”

그러자 방 너머에서 웬 우당탕 소리가 났다.

이딜로스가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찰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잠시 심호흡이라도 하려 했던 이딜로스는 흠칫 놀랐다.

“아, 오라버니! 어쩐 일이세요? 아니, 어서 오세요?”

“……?”

마멜라의 이상한 억양에 이딜로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나 이딜로스는 마멜라의 얼굴에 서린 얼떨떨함을 보곤 깨달았다.

자신이 고양이가 있는 마멜라의 방에 직접 찾아오는 건 무척 희한한 일이었다는 것을.

마멜라는 과장스럽게 미소 짓더니 한 걸음 비켜서며 이딜로스를 방 안으로 들였다.

이딜로스는 방 안에 들어서며 고양이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굴렸다. 그러다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고양이를 발견하곤 반사적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딜로스는 침대와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마멜라는 요나를 불러 차를 준비시키곤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네 고양이가 아프다고 해서.”

“……네?”

마멜라는 귀를 의심했다. 마멜라뿐 아니라 저 멀리 침대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아릴도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설마 이딜로스가 자신을 걱정해서 와 준 건가?

아릴은 미심쩍은 눈으로 이딜로스를 살폈다. 어디 잘못 먹은 것도 없어 보이고 오늘 해는 동쪽에서 멀쩡히 떴는데…….

이딜로스는 들고 왔던 깜찍한 포장 봉투를 마멜라에게 건넸다.

일단 그가 내밀었기에 얼떨결에 받게 된 마멜라는 귀여운 물고기 무늬가 그려진 봉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고양이가 좋아할 만한 걸 가져와 봤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이딜로스의 말에 이번엔 마멜라와 아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딜로스의 어서 열어 보라는 눈짓에 봉투를 들여다본 마멜라는 토끼 눈을 했다.

저 멀리서 보고 있던 아릴은 궁금해 야단이 날 지경이었다.

‘날 위해 가져온 거라니. 대체 뭘까. 뭘 가져왔을까?’

기대감이 한창 솟구치고 있을 때였다. 마멜라가 봉투 속에 든 유리병을 꺼내었다. 마멜라는 진심으로 기쁜 듯 화색을 띠며 말했다.

“이건 아릴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에요! 오라버니가 알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간식이라고?

아릴은 어감마저 좋은 그 두 글자를 듣고 유리병에서 이딜로스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 눈빛에 황송함이 담겨 있었다.

이딜로스가 자신을 생각해 간식을 가져다주다니 감읍할 지경이었다. 맨날 이상한 옷과 장난감만 가져오는 누구 씨와는 차원이 다르다.

역시 이딜로스라서 센스가 좋은 걸까? 그의 뒤에 후광이 찬란하게 비치는 것 같았다.

‘나한테 관심을 다 주고……. 내가 앓아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거라 생각했는데. 그간의 내 노력이 통한 건가 봐.’

울컥한 아릴은 침대에서 폴짝 내려와 이딜로스의 발치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 아릴을 발견한 이딜로스가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다 말고 경직되었다. 발목에 꿈에서 느꼈던 그 보들보들한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옹!”

“오라버니, 아릴이가 간식 선물을 받아서 기쁜가 봐요.”

아릴은 온 애정과 감격한 마음을 담아 이딜로스의 발목에 이마를 문질렀다. 상상만 하던 ‘이딜로스에게 냄새 묻히기’를 하다니. 아릴은 간식을 받은 것과 더불어 기분이 좋아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러나 부동자세로 굳어 버린 이딜로스는 숨도 내쉬지 못했다. 머릿속에 온갖 욕설과 기함과 울먹임이 뒤섞인 생각이 길길이 날뛰었다.

미친, 어떡하지. 이대로 죽는 건가와 같은 생각들.

이딜로스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달달거리며 찻물이 찰랑거렸다.

마멜라의 시선이 열심히 애정을 표현하는 아기 고양이에게 빼앗겨 다행이었다.

이딜로스는 기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되뇌며 간신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발치에 스치는 간지러운 감촉이 이리 소름 돋을 수가 있나? 가시로 긁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아니, 가시는 너무 유한 표현이었다. 화살촉을 문대는 것 같아 게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싶었다.

“오라버니, 우리 아릴이 너무 귀엽죠?”

“…….”

“어디 아프세요?”

“……응.”

“네……? 아프시다고요?”

“뭐?”

“네?”

신경이 고양이에게 쏠려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이딜로스는 정신적 한계에 몰리는 것 같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릴이 열심히 가르릉거리며 냄새를 묻히고 있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아릴은 갑자기 목표물이 사라지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마멜라는 바보 같은 얼굴을 하다가 물었다.

“……오라버니? 뭐 하시는 거예요?”

“아, 요즘 이 자세가 편해서. 실례 좀 하마.”

두 다리를 곧게 뻗어 테이블 위로 오만하게 꼬아 올린 이딜로스는 태연한 척 등받이에 몸을 푹 뉘었다.

뒤이어 지어 보이는 여유로운 표정까지. 이만하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일 법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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