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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28화 (25/191)

28화

이딜로스는 늘 같은 악몽을 꾸었다.

6년은 더 지난 기억.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임에도 그 지독한 기억은 악몽이 되어 매번 그를 찾아왔다.

그 탓에 자연히 수면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고, 꿈조차 꾸지 않을 깊은 잠에 빠져들도록 몸을 피로의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일이 버릇이 되었다.

<사고로 공작 부부가 돌아가셨대요. 졸지에 성년도 채 되지 않은 장남이 작위를 잇게 되었는데……. 어린 동생도 있고 카델라로트 공작가도 어찌 될지 모르겠어요.>

<다행인 소식이 있더군요. 황가도 혈족인 카델라로트가 위태로운 건 마냥 볼 수 없었던 모양인지, 새 공작이 성년이 될 때까지 가문을 맡아 주겠다고……. 황가의 재정 지원과 보호를 받으니 얼마나 안전하겠어요?>

<다들 그 사실 들으셨습니까? 글쎄, 카델라로트 공작이 돌연 황실과 모든 연을 끊겠다지 않습니까? 참, 어리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린 건지……. 가문의 막중한 무게도 있는데. 아, 왜 그랬냐니? 당연히 치기 어린 사춘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도 불필요한 동정으로 받아들인 거겠지요.>

<카델라로트 공작가도 망조가 들었네. 난 공작가가 망하는 데 한 달이 걸린다, 에 푼돈을 걸지. 아, 공작이 다시 울면서 황궁에 찾아가는 거는 보름이고.>

<카델라로트 공작이 사업을 시작했대요. 황실과 연을 끊으며 정권에서도 손을 완전히 놓더니…… 부라도 키울 셈인 건지.>

<이번에 카델라로트 공작의 마르젠로트가 신문사를 매수한 건지 1면에 마르젠로트의 의상이 실렸지 뭐예요? 그런데 그게…… 헤르핀드 공녀가 지난 황궁 연회에서 입었던 드레스와 같았어요. 저만 공녀의 드레스를 보았을 때 정신이 팔렸던 건 아니잖아요?>

<카델라로트 공작요? 황실과 절연한 인물인데 각별히 얽히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사업 파트너로서는 조금…… 아니 상당히 유망한 존재입니다.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할까…….>

지지리도 길고 짜증 나는 꿈이 이어졌다. 이미 열 번도 넘게 들은 말들과 삿대질인데 짜증이 안 나고 배길까.

아무런 사정도 모르면서.

그가 얼마나 비굴하고 비참한 인생을, 그들이 말한 그 어린 나이에 겪었는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멋대로 상상하고 평가하고 깎아내렸으며 또 멋대로 그의 가치를 저울질했다.

그가 여러 사업을 거느리고 돈줄을 쥐기 시작했을 때 즈음, 그들은 구역질 나는 시선을 다시금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카델라로트이지 않나.>

이딜로스는 그들의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보다도 지금의 이중적인 시선이 더욱 역겨웠다.

황실과의 연에서 스스로 배제의 길을 걸은, 명분상 권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오로지 돈벼락뿐인 이도 저도 아닌 자.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제법 가치가 있는 상승세를 타는 자.

이딜로스는 제게 친근한 척 아는 체를 해 오는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겉으로는 선망하는 척을 하면서 속으로는 토마토나 던지고 있을 그들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사람은 믿을 게 못 됐다.

그게 설령 피가 섞인 혈연이라 할지라도…….

<저것마저 내 자리를 넘보면 어떡한단 말이냐. 어린 것은 계집이니 화친을 맺을 때 여러모로 쓸 만하겠다만……. 진즉 함께 보내 줬더라면 손 더럽힐 일도 줄었지 않겠나!>

……사람은 믿을 게 못 됐다.

이딜로스는 이제는 질릴 법도 한 기억의 일부를 무던히 넘겼다.

문틈 새로 스며들던 빛과 그 너머 들리던 백부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드디어 이 긴 꿈이 끝나는 걸까, 생각한 때였다.

등 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잡는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잔떨림이 전해지자 이딜로스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핏기 가신 조그만 손이 보였다. 덤덤하던 이딜로스의 심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오라버니, 무서워요…….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왜, 왜 안 돌아오시는 거예요?>

……그만.

<백부님, 마멜라를 어디로 보내려고 하신 겁니까……? 지난밤에 제 방에 어떤 자들이 찾아왔는지는 아시는 겁니까?>

제발, 그만…….

그의 옷자락을 붙잡던 자그만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쿵 내려앉는 절망감과 함께 이딜로스는 서둘러 그 손을 쫓아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무엇도 없었다.

대신 눈앞에 제 부모를 죽이고 여동생과 자신까지 사지로 몰아넣은 파렴치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딜로스의 눈빛이 슬픔과 절망에서 점차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뒤바뀌었다.

그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이딜로스는 주먹을 쥔 손을 파르르 떨었다.

<네가 미친 게로구나. 황실과의 혈연을 포기해?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 대체 누구 마음대로…….>

그때였다.

아옹!

난데없는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거대한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고양이는 곧장 눈앞의 파렴치한을 와앙 깨물어 버렸다.

이딜로스는 놀라 입을 벌리고 굳었다.

고양이가 한입에 삼켜 버린 황제의 모습은 단숨에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고양이는 성이 난 것처럼 아오옹 울더니 이딜로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딜로스는 흠칫했다. 반사적으로 발이 뒷걸음질할 준비를 했다.

“아옹.”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물건을 다 물어 뜯어 버릴 기세이던 포악한 고양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칭찬을 바라는 눈길로 잠자코 그를 바라봤다.

그 초롱초롱한 눈에 겁먹은 이딜로스가 기겁해서 뒷걸음쳤다.

악몽 하나가 끝나더니 이번엔 또 다른 악몽인 건가?

아까는 극강의 짜증을 느꼈던 악몽이라면 이번엔 극강의 공포를 느낄 악몽임이 분명했다.

“아옹?”

꼭 마멜라가 데려온 것과 똑 닮은 거대 고양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딜로스에게로 앞발을 뻗었다.

이딜로스는 사색이 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 공포감에 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있는데 보드라운 털이 그의 이마에 스쳤다.

자신이 짐승의 앞에 서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의 포근함이 밀려왔다. 마음을 허물어 버릴 것 같은 따스한 빛이 몸을 감쌌다.

믿기 힘든 안정감에 이딜로스는 숨을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의 거대 고양이는 어느새 흔적조차 없었다. 그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녹이고 사라진, 마치 요정처럼 말이다.

이딜로스는 침대에 떨어져 있던 털 뭉치를 문질러 만졌다.

“……고양이가 왔다 가기라도 했다는 건지.”

정말 그런 거라면 실로 소름 돋는 일이었지만 어째선지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공포심보다는 호기심, 의문감 그리고 묘한 안도가 느껴졌다.

이딜로스는 부스러기 같은 고양이 털을 침대 옆 서랍장 위로 날리듯이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이 일으킨 바람에 털이 나풀거리며 날아가려 하자 이딜로스는 물잔으로 털이 날아가지 못하게 눌렀다.

어차피 얼마 후면 시녀들이 청소해 버려질 게 뻔한 먼지에 불과한데…….

참 이상하고 사소한 신경이었다.

* * *

오후의 낮잠을 탓하며 이딜로스는 쉬지 않고 서류철을 넘겼다. 창밖과 대비되는 밝은 집무실이 바깥에서 날벌레를 꼬이게 했다.

이건 고질병에 가까웠다. 잠을 마다하는 건 악몽에 대한 트라우마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공을 들여 쌓은 탑. 작은 발길질로도 이젠 무너지지 않지만 이딜로스에게는 일에 대한 집착이 강박처럼 남았다. 그렇기에 고질병이고 버릇인 거였다.

“후…….”

손이 찡하게 저려 오자 이딜로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잠시 스트레칭으로 손목을 털었다. 눈가도 한 번 문지르며 피로를 달래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웅성웅성, 새벽이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지금 시간에 깨어 있는 이들은 얼마 없을 텐데.’

이딜로스는 수상쩍음에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소란스러움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불이 몇 개 켜져 있지 않은 복도를 걷다가 소리가 나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래층은 이상할 정도로 환했다. 사용인들도 뭐가 난리인 건지 소란을 떨며 우왕좌왕 움직이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난리통 속에서 지나가던 사용인을 붙잡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부산스러운 거지?”

“아, 가주님! 그게, 아가씨의 고양이가 열이 펄펄 나고 아프다기에 걱정이 되어서 다들…….”

사용인의 설명을 듣던 이딜로스는 기가 찼다.

그러니까 고작 고양이 하나 아프다고 이 새벽에 다 일어나서 이 난리를 부렸다는 건가?

아기 고양이가 좀 아픈 게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가주님도 함께 가시겠어요?”

“됐다. 시끄러우니 소란 피우지 말고 다들 돌아가라 전하라.”

이딜로스는 무관심하게 걸음을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그런 보잘것없는 이유일 줄이야. 소란에 못 이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것이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하지만 막상 집무실에 돌아와 다시금 펜을 잡으니 자꾸만 집중이 흐트러졌다.

‘왜 다들 그 고양이에게 못 죽어 안달이지?’

그 무섭고 저돌적이기만 한 고양이가 뭐라고…….

자신에겐 늘 앞날에 대한 막막함을 주는 존재가 다른 이들에겐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 역시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았더라면 저들처럼 굴었을까. 어릴 적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니…….

무심코 종이에 찍고 있던 펜촉으로부터 잉크가 나와 웅덩이를 이루자 그제야 이딜로스는 놀라 펜을 뗐다. 이게 뭐라고 정신이 팔릴 일인가.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곤 까맣게 웅덩이진 종이를 치워 버렸다. 그 한숨에 저도 모르게 근심이 묻어난 줄도 모르고.

“고양이도 열 같은 게 나기도 하는 건가…….”

마지막으로 이어진 무심한 혼잣말과 함께 이딜로스는 다시금 펜에 잉크를 묻혔다.

* * *

날이 밝자 이딜로스는 안셀을 불렀다.

“……이게 고양이 간식인가?”

그는 이상하게 생긴 말린 고기 조각이 담긴 유리병을 보다가 안셀에게 물었다.

“예. 닭고기와 연어를 말려서 만든 겁니다. 그간 사용인들이 여러 간식을 줘 왔던 것을 분석해 봤을 때 아릴이 유독 이 종류의 간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더군요.”

“……그런 걸 분석까지 하고, 한가한가 보군.”

“예에? 아니요, 아닙니다! 너무 바쁘지만 무척 궁금하기에 짬을 내어 분석한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 밤은 둘째 형님을 만나기로 했기에 더더욱 바쁘고요!”

이딜로스가 입에 야근이라도 올릴까 봐 안셀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딜로스는 그런 안셀을 흘겨보곤 깜찍한 포장 봉투에 유리병을 넣었다.

“그보다 전하께서 아릴의 병문안을 가겠다고 하시다니. 전 전하께서 뭘 잘못 드시기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그 입을 묶어 버리고 싶구나.”

“아,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해가 서쪽에서 뜬 것입니까. 잘 알겠습니다.”

“……난 병문안을 가겠다 한 적 없다. 밤새 간호했을 마멜라가 걱정되어 간다고 했지.”

“아하, 그러시군요. 마침 신전에서 사제님도 오시니 뵈러 가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아릴이 걱정되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 잘 아는군.”

안셀은 공작의 반응에 피식피식 입꼬리가 올라가려던 걸 참았다. 이렇게 속이 훤히 드러나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거였다.

“예예, 그럼 어서 가시지요. 수의 분이 떠나시겠습니다.”

안셀은 당최 걸음을 떼지 않는 이딜로스의 등을 떠밀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드디어 아릴과 아가씨가 노력한 결실을 보는 것일까. 이딜로스가 고양이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날이 오다니.

안셀은 속으로 허허 웃으며 이딜로스를 뒤따랐다.

그런데 갑작스레 이딜로스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하마터면 상사에게 코를 박을 뻔했던 안셀은 무릎에 힘을 주어 간신히 부딪히지 않게 견뎠다.

설마 갑자기 안 간다고 변덕을 부리는 건 아니겠지.

“전하, 무슨 일입니…….”

“아슐란 사제님.”

사제님이란 호칭에 안셀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이딜로스의 지극히 차분한 시선이 눈앞의 고귀한 차림새의 인물에게 향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카델라로트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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