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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26화 (23/191)

26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바라봤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의심이 들기가 무섭게 또 한 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

침대 쪽에서 들린 걸 보면 아무래도 이딜로스가 낸 소리인 것 같은데…….

그런데 이건 꼭 끙끙 앓는 소리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무심코 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침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퍼뜩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그냥 잠꼬대하는 거일 테니 신경 쓰지 말자. 여기 계속 있다가 이딜로스가 깨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곳에서 마음 편안히 지낼 수 있게 이딜로스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

바보같이 이곳에 멍하니 있다가 이딜로스가 깨기라도 하면 그만한 낭패도 없었다.

‘내가 집무실로도 모자라 방까지 멋대로 들어온 걸 알면 이딜로스가 분명 싫어할 거야.’

나는 다시금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또다시 들려오는 끙끙거리는 소리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거기다 미약하게 들리던 숨소리는 점차 불규칙적으로 변해 어느새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야 해. 가야 하는데…….’

나는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침대가 보였다. 괴로운 듯 거칠어진 숨소리가 마음 한구석을 긁었다.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망설임 끝에 발걸음을 뗐다.

그리하여 도착하게 된 곳은, 문 앞이 아닌 침대 앞이었다.

‘어디 아픈 걸지도 모르잖아. 확인만 해 보는 거야.’

나는 뛰어올라 침대 위로 사뿐히 착지했다. 그제야 침대에 있던 인영이 더욱 확실히 보였다.

흰 침구 위로 흩어진 금빛 머리칼. 미려한 얼굴은 찌푸려져 있고 엷은 색소의 긴 속눈썹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 깨어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이딜로스는 내가 제 침대에 올라온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딜로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베개 위로 살포시 올라간 나는 이딜로스의 상태를 살피곤 놀랐다.

안색이 어디 아픈 사람처럼 창백했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고 연거푸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었다.

‘악몽을 꾸는 건가……?’

나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

어쩐지 조금 착잡해지는 기분에 미간을 찡그렸다. 눈앞에서 마멜라와 닮은 인간이 앓고 있어 그런 걸까.

잠시 고민한 나는 곧 이딜로스의 얼굴 위로 앞발을 들어 휙휙 흔들어 보았다. 악몽에 깊이 빠져 있는지 그는 끙끙 앓는 것 외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길래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나는 고민 끝에 조심스레 앞발을 뻗었다. 그의 뺨이 내 발바닥에 꾹 눌렸다.

‘……조금만 참아.’

어서 이 자리를 떠야 한다고 생각 중인 내게 한 말인지, 아니면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뺨에 닿은 앞발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불온한 잡념들을 지워 버릴 만큼의 맑은 기운을 그에게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가 놀라 깨지 않게 천천히 기운을 나눠 주던 나는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내 기운을 못 받아들이는 거지? 마멜라는 이러지 않았는데.’

뭔가가 어그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밀어 넣어 준 기운이 질서 없이 흩어졌다. 내가 보내 주고 있는 기운의 8할이 흩어져 나가고 2할 정도만 이딜로스에게 제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뭔가가 내 기운을 계속 쳐 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이딜로스를 잠자코 내려다봤다. 늘 안색이 좋지 못한 인간이었기에 이딜로스의 상태가 썩 멀쩡하지는 못할 거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기분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이렇게 위태로워도 되는 건가.

‘이대로 두면 죽을 거 같아, 넌.’

……그렇게 되면 마멜라가 슬퍼하겠지.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고작 2할 정도만 이딜로스에게 전해진다면 그 2할을 차곡차곡 모아 흩어지는 8할을 뛰어넘으면 되지 않나.

‘빠져나간 기운은 금방 차오르니까 난 괜찮을 거야.’

그에게 맞닿은 앞발을 매개로 나는 주저 없이 맑은 기운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래도 견딜 만하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장대비가 온몸을 때리는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빠져나가는 기운에 영혼이 끌려 나가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숨소리가 안정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에게 내 기운을 밀어 넣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조금만 더…….’

마침내 그에게서 앞발을 거두었을 땐 그의 불규칙적이던 숨소리가 평온한 흐름을 찾아갔고, 찡그리고 있던 미간도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이딜로스의 표정은 더없이 안온했다.

‘이제야 좀 살아 있는 사람 같네…….’

그에게서 거두어들인 앞발이 후들거렸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딜로스의 곁에 붙어 기운을 나누어 준 건지 모르겠다.

잠시 가만히 선 나는 끝없이 뽑아냈던 기운이 다시 천천히 차오르고 있는 것을 느끼곤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 노고를 알아줄 리도 없는 이딜로스를 괘씸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내가 너 아프지 않게 도와준 거야. 건강하게 만들어 줬는데…… 내일도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난 정말로 슬플 거야.’

부질없게 속으로 칭얼거린 나는 그가 평온하게 잠든 것을 다시 확인하다가 혀를 찼다.

이 인간, 식은땀을 얼마나 흘린 건지 이마가 흥건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나는 그의 머리맡에 가서 두 발을 들었다. 이번 한 번만 내 털을 희생해 주는 거다.

나는 오만상을 써가며 앞발의 털로 그의 이마를 열심히 문질러 닦았다. 축축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양이 발 수건이라니 이 인간은 평생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이 성격도 괴팍한 인간이 뭐가 예쁘다고 내가 이렇게까지 희생을…….

아니, 예쁜 건 맞다만. 이 예쁘장한 얼굴과 마멜라의 가족이라는 혈연만 아니었어도 이러지는 않는 건데.

이딜로스의 이마가 깨끗해지자 나는 침대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내 소중한 털이 다시 깨끗해지려면 목욕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았다.

‘익, 찝찝해…….’

나는 이동하면서 틈틈이 앞발을 이불에 문질러 축축함을 최대한 없애려고 했다.

마침내 침대 모퉁이에 도착해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런데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순간이었다. 한순간 띵해진 머리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시야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나는 휘청이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바로잡았다.

‘왜 이러지……?’

아까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걸까.

꼬박 몇십 분을 이딜로스의 옆에 붙어 있었으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기로 꾹 참고 비틀비틀 걸어 마멜라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그날 밤. 나는 갑작스러운 열병에 앓아누웠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간호하던 마멜라가 내 앞발을 쥐었다.

“아릴, 곧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참아.”

“아웅…….”

기진맥진하게 엎드려 있던 나는 마멜라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온몸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겁고 심장은 불에 덴 것처럼 무섭게 쿵쾅거렸다.

나는 숨을 색색 몰아쉬며 시선을 들었다. 눈동자만 겨우 굴려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건 눈앞의 마멜라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몇몇 사용인뿐.

‘……이딜로스는 없네. 하긴, 그 인간에게 내가 아프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마음은 도통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 같았다. 도와줬음에도 이렇게 외면을 받는 건 상당히 서러웠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으며 마멜라의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못된 인간…….

하지만 그로서는 내가 자신을 도운 탓에 앓아누웠다는 걸 알 리가 없으니…… 그래, 이건 당연한 거였다.

그간 필사적으로 따라다녔음에도 이딜로스는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으니.

마멜라가 밤새도록 간호했지만, 다음 날도 열병은 차도가 없었다.

이른 아침 찾아온 안셀은 끙끙 앓고 있는 나를 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번에도 안셀은 혼자 왔구나.

“안 되겠습니다. 당장 수의를 부르겠습니다.”

“응……. 빨리,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해 줘…….”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제가 신전으로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신전의 수의라면 분명 금세 올 수 있을 겁니다.”

안셀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흐릿하게 들려왔다. 머리가 너무 아픈 탓에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밭은 숨을 토해 내며 힘이 빠진 눈꺼풀을 스르르 감았다.

이제껏 쭉 잤는데 또 졸음이 밀려온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마멜라와 안셀이 코를 훌쩍이고 있었는데 내가 또다시 잠든 사이에 모두 어디론가 가 버린 걸까.

나는 새벽 공기처럼 고요하기만 한 공간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편안함이 잔물결처럼 몸을 적셨다.

안온감에 흠뻑 취해 몸을 살짝 움직였을 때였다. 찰박, 소리가 났다.

‘……물소리?’

몸을 조금 더 움직여 바닥을 더듬었다.

차갑다. 잔물결처럼이 아니라, 진짜 물이잖아.

나는 당황한 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까와 달리 온몸이 녹을 것처럼 뜨겁지도 않았고 심장이 무서운 기세로 뛰지도 않았다.

나는 눈을 바르르 떨다가 굳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힘껏 들어 올렸다. 눈부신 빛이 시야를 찔러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찡그리다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여기가…… 어디지?’

창창한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꿈…… 이겠지?

그러니 몸이 잠시나마 평온할 수 있는 것일 터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바닥의 고인 얕은 물에서 차르륵 소리가 들렸다. 털이 젖어 물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 시야가 높아진 것 같지?

멍하니 얕은 물이 깔린 지평선을 보고 있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무, 무슨……. 아니, 이게 대체 뭐야?’

복슬복슬한 털이 있어야 할 곳에 투명하고 매끈한 피부가 있다. 앞발이 있어야 할 자리엔 꼭 인간의 손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미심쩍게 손을 들어 올린 나는 앞뒤로 뒤집어 가며 손을 살폈다. 그러다가 입을 살짝 벌렸다. 다음으로 인간들의 검지에 해당하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선…….

“아야!”

나는 눈물을 핑 터뜨렸다. 이빨 자국을 따라 발갛게 부어오른 검지가 보였다.

이게 나한테 달려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어 있는 힘껏 깨물어 본 것인데 정말로 아플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이 인간의 손이 내 거란 말이야? 그럼 이 아래 보이는 다리와 발도……?’

아니 그뿐인가. 나는 뒤늦게 목을 더듬거렸다.

방금 분명, 내가 목소리를 냈어.

흥분감에 흐트러진 숨을 내뱉은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아.”

한마디를 내뱉고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어…….”

모두 처음 해 보는 발음임에도 어색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꿈이란 말인가. 가끔 인간의 말을 하고 싶다고, 인간의 팔다리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는데…….

내가 인간이 되는 꿈이라니. 이런 건 상상도 한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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