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릴, 난 오라버니가 널 좋아하게 만들어야겠어.”
마멜라가 의지가 굳은 눈빛으로 말을 꺼낸 것은 이딜로스가 나를 허락한 지 사흘째 된 날이었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설마 내 귀에 털이 찌기라도 한 건지 알 수가 없어 멍한 얼굴을 했다.
“오라버니랑 친해지게 도와줄게.”
다행히 내 귀는 멀쩡한 거였다.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마멜라를 쳐다봤다.
“아옹…….”
마멜라, 그새 잊은 거야? 너희 오빠가 날 허락한 대신 절대 근처로 못 오게 하라고 했잖아.
나는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아옹아옹 울었다. 요즘 들어 마멜라의 건망증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해서 걱정스러운 마음도 듬뿍 담고 있었다.
그러자 마멜라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 마멜라의 반응에 나는 반갑게 꼬리를 살랑거렸다.
‘설마 내가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마멜라도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걸까?’
마음이 솔깃했다. 기대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마멜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 귀여움으로 오라버니를 꼬시면 되겠다! 아까 한 그대로 오라버니한테 해 주자. 다시 해 봐, 다시.”
기대가 산산이 조각났다. 그럼 그렇지.
나는 마멜라의 손등을 앞발로 찰싹 쳐 냈다. 그제야 마멜라가 제대로 반응했다.
“싫다고?”
“아옹.”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내 단호한 반응에 마멜라가 꿍얼거렸다.
“그렇지만 난 널 가족으로 생각한단 말이야. 네가 내 가족이니 오라버니도 네 가족이어야 해. 난 오라버니가 널 좋아했으면 좋겠어.”
마멜라의 말을 잠자코 듣던 나는 일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멜라가 내게 이딜로스를 그린 그림을 내밀었던 날.
그때도 마멜라는 그가 내 가족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딜로스는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던데…….’
내가 자신감 없이 마멜라를 흘끔대자 그녀는 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릴,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잖아. 싫은 마음도 좋은 마음으로 바뀔 수 있어.”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해 보지도 않고 낙담하는 건 조금 이른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괜히 다가갔다가 도리어 내쫓기면 어떡하나. 어쩌면 나를 더 싫어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한 내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건지 마멜라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내 턱을 간지럽힌 마멜라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릴, 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잖아. 내가 꼭 오라버니가 널 좋아하게 만들게.”
그녀의 말에서 묻어나는 굳건한 확신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일렁거렸다. 나는 가만히 입을 벌린 채 마멜라를 올려다봤다.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다고……. 이 세상에 그런 다정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마멜라가 생긋 웃었다. 나는 서서히 용기를 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혹시 몰라. 정말로 이딜로스가 나를 좋아하게 될지.
인간들의 말 중에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괴상한 말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비장한 눈빛으로 앞발을 척 뻗었다. 그러곤 마멜라의 말랑한 뺨을 꾹 누르며 울었다.
“아옹!”
“그럼 당장 내일부터 실행하는 거야!”
마멜라가 내 앞발을 잡으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렇게 이딜로스를 꼬셔 내기 위한 꼬마 공녀와 아기 고양이의 하찮은 계획이 시작되었다.
* * *
“가장 먼저, 우연인 척 마주쳐 보도록 하자.”
마멜라는 나를 품에 안고 계단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뭘 하는가 싶었지만, 곧 위에서 내려오는 안셀의 모습을 보고 눈치챘다.
‘이딜로스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거구나.’
요즘 들어 부쩍 핼쑥해진 안셀이 우리를 발견하곤 삼촌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 느껴지는 건 친숙함도 인자함도 아닌 안쓰러움이었다.
듣기로는 마멜라와 합세해 나를 숨긴 걸 들키고서 이딜로스에게 무시무시한 갈굼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날부로 이딜로스의 성격이 조금, 아니 상당히 나쁘다는 걸 알게 되어서인지 안셀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종종 사용인들 사이에서 ‘내가 안셀 님이었다면 울면서 사직서를 던지고 다른 나라로 피난 갔을 텐데’라는 말도 들리니 말 다 했다.
“하하, 공녀님. 아릴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양 뺨이 움푹 들어간 안셀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나갔다. 오히려 힘내야 하는 건 본인 같은데…….
밥은 잘 챙겨 먹나 몰라. 설마 이딜로스가 굶기기까지 하겠어.
마멜라도 그의 뒷모습을 미안하게 바라봤다.
“나 때문에 안셀이 고생이 많은 것 같아.”
“아옹.”
정확히는 마멜라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지……. 내가 굴러 들어온 탓에 이런 상황이 생겼으니 말이야.
마멜라는 계단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지 하나 떨어지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계단 모퉁이에 앉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멜라가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오라버니가 내려오실 거야. 원래 내가 수업에 갈 시간이면 늘 여기서 오라버니를 마주쳤거든.”
평상시엔 출장이 아니면 집무실에서 꿈쩍도 안 하는데 이 시간 때가 되면 귀신같이 내려온다니까?
마멜라가 자신만만하게 하는 말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아무리 봐도 네 오빠가 널 보려고 그 시간에만 내려온 것 같은데…….’
물론, 그게 다 중요한 업무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굳게 믿는 마멜라의 생각처럼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도 않는 위층을 보니 내 생각이 맞았다.
“이상하네…… 오라버니는 원래 이 시간이면 내려오시는데.”
“어머, 아가씨. 거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건가요?”
지나가는 사용인들이 계단에 앉아 있는 우리를 보곤 알은체를 해 왔다.
마멜라가 해맑게 대답했다.
“오라버니가 내려오시는 걸 기다리고 있어.”
“가주님께 아가씨가 기다리신다고 말씀 올릴까요?”
“아니야, 안 돼. 우연히 마주쳐야 한다고.”
“네?”
빨래 바구니를 든 사용인들의 얼굴에 ‘내려오지도 않을 사람을 왜 굳이?’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쯤 되니 나도 참 대단했다. 인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게 엊그제인데 이젠 낯만 봐도 알아차릴 지경이 되다니.
고양이는 원래 이렇게 다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내가 타고난 건지…….
마멜라가 사용인들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한 손으로 입 옆을 가리곤 속닥였다. 덕분에 마멜라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나는 그녀의 상체에 눌려 납작해졌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오라버니가 아릴이를 좋아하게 만들 거야.”
줄곧 마멜라의 품에 파묻혀 있던 내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나를 용케 발견도 못 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그제야 나를 알아보곤 화색을 띠었다.
“어머!”
“이 고양이가 바로 그 소문 자자하던 아릴 님이군요.”
아릴 님이라니, 이상한 존칭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사용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서로 야단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 그동안 아릴 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너무 조그매서 처음엔 공녀님이 인형을 껴안고 있는 줄 알았어요. 어쩜 이렇게 귀엽고 자그말 수가 있지?”
이 인간들이 지금 내가 작다고 놀리는 건가?
심술 난 표정으로 마멜라를 바라봤다.
우리 저쪽 모퉁이로 자리 옮기자, 마멜라. 이 무례한 인간들은 상대를 못 해 주겠어.
그런데 마멜라는 어째선지 흡족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 아릴이는 털도 복슬복슬하고 부드러워. 만져 볼래?”
“아옹……!”
나는 질겁한 눈으로 마멜라를 바라봤다.
그래 봤자 이미 던져진 말. 그들이 좋다고 너도나도 손을 뻗었다.
나는 귀와 꼬리를 바짝 세우며 인간들의 손을 하나하나 쳐 냈다.
“아옹!”
어딜 만져!
맞고 나가떨어진 인간들은 기세가 죽기는커녕 실실 웃음을 흘렸다.
왜 내가 으르렁대는데 아무도 겁을 먹지 않는 거지?
“어머, 정말 앙칼지네요. 귀엽기도 하지.”
“안셀 님 말로는 간식을 주면 제법 얌전해진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요, 아가씨?”
하악질 하려던 나는 뚝 멈췄다.
“아마 그럴걸? 우리 아릴이가 간식을 많이 밝혀서.”
“그럼 다음에는 간식을 가지고 와야겠네요.”
나는 스멀스멀 올라가려는 입매를 애써 억눌렀다.
안셀 이 인간, 쓸모 있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잖아?
안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 좀 하는 모양이던데 아까 마주쳤을 때 애교를 좀 떨어 줄 걸 그랬다.
마멜라와 까르르 웃으며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용인들은 다시 빨래 바구니를 들고 떠나갔다.
소란스러움이 사라지자 마멜라는 무료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나와 놀아 주기 시작했다. 마멜라의 손을 붙잡아 아프지 않게 깨물던 나는 어느새 마멜라가 손을 움직이지 않자 시선을 들었다.
‘마멜라가 잠들었어.’
마멜라는 벽에 머리를 기대어 졸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마멜라를 깨우지 않기 위해 깨물고 있던 손을 조심히 놓아주었다.
그러곤 멍하니 위층을 바라봤다.
‘이렇게 무턱대고 기다리는 게 소용이 있긴 한 건가…….’
따분하게 멍때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위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에 눈을 크게 떴다.
몸을 일으킨 나는 마멜라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옹, 아옹!”
“으응, 나 일어났어, 아릴…….”
내가 좀 세게 때렸던 건지 한쪽 뺨이 발갛게 된 마멜라가 비몽사몽 눈을 떴다.
‘마멜라, 이딜로스가 오고 있단 말이야. 어서 준비해!’
앞발을 위로 뻗어 허우적대자 마멜라가 고개를 들더니 숨을 들이켜며 벌떡 일어섰다.
다행히 나와 통한 마멜라는 서둘러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아릴, 쉿.”
마멜라는 슬그머니 계단을 내다봤다. 이윽고 그토록 기다리던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질 때, 마멜라가 자연스레 걸어 나갔다.
위층에서 막 내려오던 이딜로스가 보였다.
“앗, 오라버니잖아. 이런 우연이!”
“……?”
나는 이상한 눈으로 마멜라를 올려다봤다. 꼭 사전이라도 읽는 듯한 경직된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건가?
“마멜라?”
이딜로스가 우리 쪽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제일 먼저 마멜라에게 닿았다가, 이내 그녀의 품에 안긴 내게로 떨어졌다.
계단을 내려오던 이딜로스의 걸음이 뚝 멈췄다.
마멜라는 방실거리며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이딜로스의 가지런한 눈썹이 틀어지더니 그가 손을 펼치며 말했다.
“거기 서.”
“네? 아, 혹시 아릴이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
“걱정하지 마세요! 아릴이가 얼마나 얌전한데요. 그러지 말고 한 번 쓰다듬어 보실…….”
“아니.”
단호하게 말한 이딜로스가 붙잡을 새도 없이 쌩하니 내려가 버렸다.
나는 입을 벌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인간이 저렇게 빠를 수도 있구나…….’
그렇게 우리의 첫 계획은 단 1분 만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