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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21화 (18/191)

21화

나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가 굳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오, 오라버니!”

“전하!”

비명을 지른 안셀과 마멜라가 나를 지나쳐 달려가 이딜로스를 둘러쌌다.

나는 갑자기 지푸라기처럼 쓰러진 인간을 바라봤다.

상황만 봐서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 보이는데 나는 억울했다. 내 발바닥은 이딜로스에게 닿지도 않았다.

대체 뭐지. 이 인간, 나를 내쫓기 위한 연기라도 하는 건가?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아니, 안색이 조금 안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하지만 연기라기엔 안셀이 들어 올린 이딜로스의 금발과 팔이 힘없이 아래로 치우쳤다.

더군다나 정말로 정신을 잃은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숨소리까지 잠잠해질 수 있나.

마멜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셀! 어서 의원을 불러와 줘!”

“예, 아가씨……!”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 잊힌 나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몇 걸음 뒤로 도망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걸까.

* * *

의사는 이딜로스의 맥을 짚더니 유감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심한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해 쓰러지신 듯합니다.”

“으흑, 모두 제 잘못입니다! 출장 내내 전하께서 도통 주무시지도 못하시는 것을 보고서도 휴식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눈가를 팔로 가린 안셀의 소매가 빠른 속도로 젖어 갔다. 홍수라도 난 기세를 본 의사는 말없이 안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난번에 드셨던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을 다시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조그만 통에 담긴 약과 함께 안셀에게 간단한 설명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안셀은 이딜로스가 제 수명을 갉아 없애고 있다며 엉엉 울면서 그의 팔을 내려쳤다.

“아프다.”

“흐어, 억! 깨, 깨셨습니까?”

“네가 그렇게 때려 놓고서 깼다고 놀라는 것도 웃기는군.”

이딜로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안셀은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안셀은 이딜로스에게 미지근한 물을 건네었다.

이딜로스는 물 몇 모금으로 목을 적신 후에 입을 열었다.

“마멜라는.”

“아가씨는 아릴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 계십니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시기에 잘 달래어 돌려보낸…….”

“그 고양이가 아직도 있다고?”

안셀의 말을 뚝 끊은 이딜로스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이딜로스의 날카로운 물음에 안셀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있다고 말하면, 곧장 아릴을 내쫓으라고 할까 봐.

하지만 그건 안셀이 대답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인 거였다.

이딜로스는 한숨과 함께 실소를 흘렸다. 마멜라와 측근의 앞에서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버린 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니.

그는 막 잠에서 깬 만큼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가서 그 고양이를 당장 내쫓고 와.”

“하지만 전하…….”

“가만 보니 너도 고양이한테 단단히 사로잡혔나 보군. 그냥 내가 가서 엄하게 말하고 오마.”

이딜로스는 고작 고양이에게 빠져 상사의 명에도 따르지 않는 안셀을 한심하게 쳐다보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셀은 놀라 이딜로스를 붙잡으려 했다.

“전하, 아직 무리해선 안 됩니다!”

“너도 같이 쫓겨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놓아라.”

이딜로스는 안셀을 뿌리치곤 방을 나섰다. 그의 걸음은 당연하게도 마멜라의 방으로 향했다.

그 고양이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니 미칠 지경이었지만 마멜라는 그가 직접 말해야만 들을 것이 분명했다.

어느새 마멜라의 방문 앞에 선 이딜로스는 화가 난 것과는 달리 여동생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크하려 손을 들었다.

그러다 마멜라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곤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더 정확히는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온 훌쩍이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문 너머에서 마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릴, 미안해……. 내가 진작 오라버니한테 말했으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옹…….”

“나 널 키우겠다고 소리쳤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널 기르게 해 달라고 고집부리는 것밖에 없어……. 그마저도 거절당하면 결국 난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

“못난 주인이라서 미안해…….”

훌쩍이는 소리가 커졌다.

이딜로스는 계획대로 마멜라를 마주하는 것도 잊고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역시 아릴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흑, 재미없고 힘들기만 한 수업에 갔다 올 때마다 네가 반겨 줘서 얼마나 좋았는데……. 혼자 식사하고 와도 네가 밥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이야…….”

“…….”

“친구 한 명 없던 내게 넌 유일한 친구였어, 아릴…….”

이딜로스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들리는 여동생의 흐느끼는 목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그는 못난 오빠였다. 여동생이 바라는 것, 부탁하는 것 하나 들어주기도 힘든.

이딜로스는 조용히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시선은 발치로 떨궈져 다시 올라올 기미가 없었다.

차마 원래 계획대로 노크를 하고 마멜라에게 고양이를 내보내라는 매몰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문 너머에서 마멜라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릴, 왜 그래? 어, 기다려, 어디가……!”

이윽고 아래로 향해 있던 그의 시야에, 문틈에서 나타난 보송한 앞발이 쏙 들어왔다.

“……?”

넋을 놓고 있던 이딜로스가 의아함을 느끼자마자 그 앞발이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이딜로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앞에 또 한 번 조그만 아기 고양이가 나타났다.

“오라버니……?”

이딜로스가 고양이를 보고 굳어 버리기도 잠시, 그는 맞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여동생을 바라봤다.

그새 눈이 발갛게 부은 마멜라가 서둘러 달려와 아릴은 안아 데려갔다. 혹시나 몸도 안 좋은 이딜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봐 불안한 눈초리였다.

이딜로스는 그런 여동생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마멜라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우물쭈물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어요…….”

“…….”

마멜라는 이딜로스의 시선이 조용히 제 품에 안긴 고양이에게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딜로스가 먼저 말하기 전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릴이는요……! 오라버니가 정말 안 된다고 하신다면 밖으로 보낼게요……. 흑, 대신 아릴이를 예뻐해 줄 행복한 곳으로 보내 주시면…… 아, 안 될까요?”

하지만 결국엔 말을 하다 말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릴의 털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옹…….”

아릴은 그런 마멜라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졌다. 그녀가 아픈 이딜로스에게 고집을 부릴 수는 없어 의견을 굽힌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딜로스 역시 펑펑 우는 여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양이가 있는 곳에 섣불리 다가가 마멜라를 달랠 수도 없었다.

그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고양이가 마멜라의 품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뺨을 핥아 주기 시작했다. 꼭 울고 있는 마멜라를 달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딜로스는 긴장감에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이윽고,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그가 착잡하게 입을 열었다.

“……그 고양이만 있으면 돼?”

“……네?”

마멜라는 눈물을 닦아 내다 말고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의 말이 분명히 들렸지만 너무나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라 잘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딜로스는 복잡한 눈으로 시선을 피했다. 지금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는 결코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딜로스는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허락하마.”

“네? 뭐를…… 요?”

“네 고양이. 저택에서 길러도 돼.”

마멜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갑자기 허락해 줄 줄은 몰랐기에 마멜라는 바보같이 입을 벌렸다.

이딜로스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마멜라를 바라보다 물었다.

“싫어?”

“아, 아니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그제야 마멜라는 안도의 미소를 피워 내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딜로스는 여동생의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반응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다만 마멜라가 기쁜 얼굴로 이딜로스에게 다가가려 했을 땐 질겁하며 마멜라를 멈춰 세워야 했다. 품 안에 여전히 고양이가 있지 않은가.

이딜로스는 한숨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이딜로스가 아릴 쪽을 소심하게 흘긋 바라봤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정확히 아릴이 있는 곳의 옆 방바닥을 쳐다봤다.

“그 고양이가 내 쪽으론 절대 접근 못 하게 해.”

“네…… 당연하죠!”

마멜라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아릴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아까보다 아릴을 더 꽉 끌어안으며 기쁘게 소리쳤다.

“아릴, 우리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

“아옹!”

고양이가 기쁜 듯 마멜라의 뺨에 제 볼을 문질렀다.

이딜로스는 그 화기애애한 모습을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러다 불가피하게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딜로스는 눈썹을 크게 움찔하며 급히 걸음을 돌렸다.

“마멜라, 난 이만 가 볼게.”

“네! 푹 쉬세요, 오라버니! 감사해요!”

이딜로스는 문이 닫힐 때까지 고맙다며 인사하는 마멜라를 뒤로한 채 방을 나왔다.

철컥, 문이 닫히자마자 이딜로스는 한숨을 쏟아 냈다. 그의 눈에 깊은 막막함이 어려 있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이 집에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가출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가주가 하기엔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들을 이어 가며 이딜로스는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돌이킬 수도 없었다.

‘괜찮아. 마멜라를 위한 거잖아.’

이딜로스가 할 수 있는 건 소심하게 제 자신을 다독이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쁜 웃음소리는 이딜로스에게 안도와 같은 감정을 선사했다.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던 이딜로스는 막연함을 갈무리하곤 집무실로 향했다.

돌아가면 안셀의 반응이 제법 귀찮겠다는, 애써 불안감을 잊기 위한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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