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나는 마멜라를 힐끔 올려다봤다. 마멜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제 몸 뒤에 꼭 숨기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한 상대를 바라봤다.
‘이딜로스.’
이렇게 정면에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존재감이 강렬한 인간이었다.
밝고 화려한 금발과 조금 가라앉은 듯한 짙은 금안, 싱그러운 꽃을 연상케 하는 수려한 생김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 이글이글 노려보는 저 시선!
이상한 건 내가 쳐다보지 않고 있을 땐 나를 뚫어 버릴 기세로 째려보면서 내가 쳐다보면 곧바로 시선을 피한다는 거였다.
‘동물을 싫어한다더니 나와 눈도 마주치기 싫은 건가 봐.’
마멜라의 옷자락 뒤에서 빼꼼 얼굴만 내밀고 있던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이런 식으로 이딜로스를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다.
‘분명 마멜라는 이딜로스가 이틀 뒤에나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애초에 안셀에게서 얻은 정보를 믿는 게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마멜라는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저택 뒤편에 있는 조그만 텃밭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다 저택 대문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있는 걸 발견했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챈 마멜라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오라버니잖아……! 왜 벌써 오신 거지? 아릴, 우리 어서 돌아가자.”
마멜라는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서둘러 저택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층에 다다르자 마멜라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방 앞에서 그가 웬 상자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마멜라, 산책하다 왔어?”
미소를 띤 이딜로스의 시선은 마멜라에게로 부드럽게 머무르다가 미끄러져 내려와 내가 숨어 있는 바구니에 닿았다.
일전에 벌려 둔 바구니의 틈새로 상황을 파악 중이던 나는 그의 표정이 일순 굳는 걸 포착했다.
‘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그때, 그 정원에서 이딜로스가 바구니 속의 내 엉덩이를 봤던 걸까……?
마멜라는 횡설수설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언제 오셨어요? 이번에는 일찍 돌아오셨네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오면서 눈을 좀 붙였더니 괜찮아. 그것보다 마멜라.”
“네?”
이딜로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보이며 싱긋 웃었다.
“루나뜨의 케이크를 가져왔는데 먹을래?”
“……케이크요? 새로 나온 거예요?”
마멜라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녀가 단것에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마멜라가 내 존재를 잊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이딜로스가 자꾸만 바구니를 힐긋대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이딜로스는 여상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와아, 정말 맛있을 것 같아요. 딸기 케이크예요? 블루베리? 아니면 초코나 캐러멜이에요?”
“네가 말한 건 다 있는 것 같은데. 네 방에서 먹을까?”
“어, 제 방요……?”
기뻐서 좋아하던 마멜라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졌다. 나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마멜라가 잘 대처할 수 있을까……?
마멜라는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그러지 말고 우리 화원에 가요. 꽃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질 거예요!”
마멜라의 초조함을 느끼지 못하기엔 그녀의 말이 너무 이상했다.
나는 불안하게 이딜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은 굳어 가고 있었다.
나는 조마조마하게 속을 졸였다. 이딜로스의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러자.”
이딜로스의 대답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안도의 숨을 막 내뱉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게 헛숨을 넘어가게 했다.
“그 전에, 너 바구니 안에 숨기는 게 뭐야?”
“네……?”
이딜로스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마멜라를 바라봤다. 이미 마멜라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오라버니한테 숨기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마멜라.”
“…….”
“그 바구니 열어 봐.”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서둘러 차선을 생각했다.
‘어, 어떡하지? 지금 나가서 싹싹 빌까? 훈련의 성과를 보여 줘야 하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와중에 이딜로스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이딜로스가 앞서 마멜라의 방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분명 마멜라도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왜냐면, 실컷 어질러 놓고 정리도 안 하고 나왔으니까!
그가 들어가다 말고 멈춰 서는 게 보였다. 방을 둘러보던 이딜로스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이내 그는 한숨을 내쉬곤 무심하게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마멜라는 망설임 끝에 그를 따라 들어갔다.
“소파가 바뀌었구나. 나한텐 아무런 보고도 올라오지 않았는데.”
“아, 그건…….”
“됐어. 일단 바구니부터 열어.”
마멜라가 내뱉는 숨결이 묵직해졌다.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 상황에선, 마멜라가 더는 나를 감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결국 마멜라는 바구니의 덮개를 열었다. 방 안의 불빛이 바구니 안으로 밀려들었다.
막 바깥이 보이려는 때였다. 이딜로스가 갑작스레 말을 붙였다.
“잠깐만. 미안한데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열어 줘.”
“네?”
“거기서 다섯 발자국만 뒤로 가.”
“……?”
마멜라는 고분고분 그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로 바구니의 덮개가 완전히 열렸다. 마멜라가 내게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아릴, 우리 오라버니니까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는 마멜라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정말로 이딜로스를 마주하는 거다. 이딜로스가 내 존재를 알게 되는 거야.
‘긴장하지 마.’
나는 재빠르게 털을 정리한 후에 멀끔한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쪽을 보고 있던 이딜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어정쩡하게 굳는 게 보였다.
마멜라는 고개를 숙인 채 그에게 이실직고했다.
“여태 속여서 죄송해요……. 별장에서 다친 걸 발견하고 치료해 줬는데 두고 가기가 힘들어서… 그래서 몰래 데려왔어요.”
“…….”
“이름은 아릴이에요. 아직 아기여서 사고는 좀 치지만 그래도 똑똑해요. 제 말도 무척 잘 듣고요!”
마멜라가 나를 완전히 꺼내려는 듯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입구를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이딜로스의 눈이 일순 커지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꺼내지는 마……!”
그러나 그가 말했을 땐 나는 이미 바구니에서 명랑하게 빠져나온 후였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귀여운 표정으로 눈을 둥글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딜로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릴이 너무 귀엽죠? 이렇게 귀여운데 내치시는 건…….”
“안 돼.”
“네?”
불규칙한 숨을 내뱉은 이딜로스가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절대 허락 못 한다. 당장 내쫓아.”
“네?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이미 이름도 지어 줬고 정도 들었어요……!”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이딜로스의 미소가 싸늘하게 굳었다.
냉각된 공기가 몸을 짓눌렀다. 나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예상했던 일이고 마음의 준비도 철저하게 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상상과 실제는 와닿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나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일까.
나는 고개를 들어 마멜라를 바라봤다. 마멜라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거기다 이딜로스의 쌀쌀맞은 태도에 겁까지 먹은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그러한 마멜라의 반응이 낭패라는 듯 혀를 찼다.
“넌 내쫓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시종을 불러 내다 버리라고 해야겠구나.”
그의 건조한 말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날…… 버리겠다고? 어떻게 말을 그렇게 못되게 해?
이딜로스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문으로 다가갔다. 정말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나를 쫓아낼 생각인 것이다.
잘게 떨리는 시선으로 멀어지는 이딜로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몰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 안셀입니다.”
이딜로스의 미간에 금이 갔다. 나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입을 벌리곤 이딜로스를 살폈다.
‘설마 안셀이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나랑 같이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방 안의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안셀은 불쌍하게도 자폭을 택했다.
“전하께서 일찍 귀가하신 바람에 저도 서둘러 왔습니다. 아릴에게는 아무 일 없는지요?”
정적이 흘렀다. 이딜로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방 안의 누구도 소리 한번 내지 않자, 안셀이 다시 노크했다.
“아가씨, 안 계십니까? 아가씨?”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제발 그만해, 이 바보야……!
가만히 굳은 표정을 유지하던 이딜로스가 서늘하게 벼린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라.”
문 너머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신세 한탄에 앞발로 이마를 짚을 뻔했다. 이러다 우리 셋 나란히 쫓겨나는 거 아니야?
안셀이 들어올 기미가 없자 이딜로스는 친히 문을 열며 분노가 여실히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뭐 하나, 안셀. 들어오래도.”
그리하여 지금 이 상황.
마멜라는 울먹이며 말했다.
“오라버니, 제가 책임지고 기를게요. 제발 허락해 주세요……!”
바보 안셀도 눈물을 줄줄 흘렸다.
“부탁드립니다, 전하. 이 귀여운 녀석을 좀 보십시오! 어떻게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안셀이 마멜라 뒤에 숨어 있던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이딜로스에게 보였다. 당혹스러운 내 시선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이딜로스의 눈빛에 충격이 이는 게 보였다.
안셀은 이딜로스의 딱딱하게 굳은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주절주절 말했다.
“이 솜방망이 앞발, 새침한 표정만 봐도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
“요 앙증맞은 녀석이 똑똑하기는 또 얼마나 똑똑한지, 한 발로 물구나무도 설 줄 압니다! 저글링도 할 수 있지요!”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안셀을 바라봤다.
야, 내가 언제 그런 걸 할 수 있댔어!
나는 안셀을 뜯어말리기 위해 그의 뺨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하지만 안셀은 내가 애교를 부린다며 웃더니 계속해서 독주했다.
“전하께서는 힐링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매일 같이 찌들어 사는 흑백 세상! 이 귀여운 아이가 졸졸 쫓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이딜로스의 눈치를 살폈다. 들을수록 화가 나는 모양인지 이딜로스의 안색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
“아, 얼마나 사랑스러운 모습입니…… 커헙.”
결국 안셀의 입을 앞발로 틀어막았다. 하필 안셀이 말하고 있을 때였는지라, 내 앞발이 그 입에 쏙 들어가고 말았다. 윽…… 기분 나빴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셀을 흉흉하게 쏘아봤다. 더 말하면 내 털을 먹여 버릴 테다!
안셀을 눈빛으로 협박하고 있는데 이딜로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난폭한데…… 집에서 키우겠다고?”
이딜로스의 숨결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연이어 그는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와락 구기기까지 했다.
나는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줄곧 이딜로스의 눈치만 보던 난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안셀의 갑갑한 품에서 훌쩍 벗어났다.
그러곤 용기 내어 이딜로스에게 다가가 보려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내가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이딜로스가 미미하게 흠칫거리는 게 보였다.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싫은 거야? 몸서리칠 정도로……?’
나는 마음이 상했지만 잇새를 아프게 물기만 할 뿐, 결코 굴하지는 않았다.
뭐든 교감이 중요한 법 아니던가. 내 보송한 털을 만져 보면 분명 마음이 달라질 거야. 내 머리를 쓰다듬어 보면 분명 날 좋아하게 될 거야……!
나는 이딜로스의 발치로 달려갔다. 두 눈에 애교를 담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부탁이야, 날 내쫓지 마.’
이딜로스가 기겁한 숨소리를 흘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점점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질색하는 표정이라고 생각한 나는 일부러 이딜로스의 구두를 두 앞발로 짚으며 꼬리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러자 이딜로스는 반대쪽 발을 뒤로 물리는가 싶더니…….
쿵!
갑자기 종이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