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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9화 (16/191)

19화

수도 델트로타에서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안셀은 수도에 있는 내내 공작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이딜로스는 수도로 출발했을 때부터 지속적인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안셀은 그런 공작을 보자 짠함을 느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보다.’

안셀은 카델라로트로 돌아가면 아가씨께 고양이는 제게 맡기고 공작과 휴식을 좀 보내 달라는 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원치 않게 이루어지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안셀은 겉옷을 챙겨 입는 이딜로스를 보며 의아해했다.

“전하, 어디 가십니까? 조금 있으면 헬리슨 백작이 방문할 겁니다.”

“네가 맡아.”

“예? 제가요?”

안셀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그사이 시종에게서 디저트가 한가득 담긴 상자를 건네받았다.

붉은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상자에는 카델라로트에서 운영하는 유명 제과점, 루나뜨로트(Runatteuroteu)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이딜로스는 며칠 밤을 설쳐 생기라곤 없는 눈으로 안셀을 흘겨보며 말했다.

“난 먼저 돌아가마. 큰 계약 건은 해결했으니 남은 일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지.”

“아니, 저, 전하. 잠……!”

쾅. 붙잡을 새도 없이 문이 닫혔다.

안셀은 공작을 향해 뻗은 손을 허공에서 멈췄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의 불길함이 엄습했다.

망. 그야말로 대망, 아니…… 폭망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전하가 나흘은 더 지나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실 텐데……!’

일찍이 아가씨께 말해 놓은 터였다. 이번에는 델트로타에서 적어도 2주는 있어야 올 것이니 그전까지 마음 놓고 아릴과 놀아 주라고.

안셀은 소파를 짚은 채 주저앉았다. 일전에 이딜로스가 뭔가를 눈치챈 사람처럼 이것저것 물어봐 댔던 것이 생각났다.

이러다 자신 때문에 아릴이 모습을 들켜 내쫓기기라도 한다면…….

‘아니, 그럴 순 없다……!’

안셀은 열의가 활활 불타오르는 눈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마멜라 아가씨의 뒤를 잇는 저택의 꿈과 희망을 잃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 공작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겠다.

마멜라 아가씨도 함께 부탁할 터이니 둘이서 덤비면 분명 공작도 마지못해 허락하겠지.

그렇게 의지를 불태운 안셀은 이딜로스가 맡기고 간 일을 빠르게 해치웠다. 일적인 측면에서는 안셀도 이딜로스 못지않게 능력자였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양해를 구하고 일부러 시기를 앞당겨 만났다.

사업왕 카델라로트 공작이 손 뻗은 사업처들에 일일이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 드디어 끝났군.”

바쁘게 일을 끝마친 안셀은 몸을 혹사한 끝에 마침내 평소보다 일찍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마차에 서둘러 짐을 싣자 마부가 그에게 다가왔다.

“안셀 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많이 나쁘신 듯한데…….”

“이 정도로는 끄떡없습니다.”

며칠 새 양 뺨이 움푹 들어간 안셀이 야윈 미소를 지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 같았다.

마부는 공작의 최측근인 안셀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벌써 아릴을 내쫓으신 거면 안 되는데…….”

안셀은 후회가 막심한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가도 카델라로트 저에 도착하려면 며칠이 걸린다. 역시 이딜로스가 떠나려고 할 때 붙잡았어야 했던 걸까.

스스로 줄곧 유능한 인재라고 믿어 왔건만 이런 면에서는 어쩜 이렇게 형편이 없는지. 마멜라 아가씨께 드는 송구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못 들 지경이었다.

안셀이 스스로를 질타하던 때였다. 어디선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

고개를 들어 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사람이 바로 옆에서 안셀을 보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수상한 차림새.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안셀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자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네. 무척 근심이 깊은 표정으로 계시더군요.”

안셀은 그를 슬쩍 훑어본 후에 사기꾼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 은근슬쩍 접근해서 이상한 종교를 믿으라고 권유하려는 게 분명했다.

안셀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닌데요.”

그러자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제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안셀은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갈 길이 바쁜데 이런 자에게 붙잡혀 있을 시간이 있을 리가 없다.

이딜로스의 성질머리를 닮아 가는지 안셀이 사기꾼에게 분풀이하듯 말했다.

“아니라니까요. 약 팔지 마십시오. 전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 제국의 유일신인 천신만을 믿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댁의 종교엔 일절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자 로브를 쓴 남자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어디가 웃음이 나올 만한 포인트란 말인가.

안셀은 그를 째려보곤 등을 돌렸다. 상대하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이리라. 이럴 시간에 어서 출발하는 게…….

남자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반갑군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크로델리아 신성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응당 그래야지요.”

안셀은 의심스러움에 흘깃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가 머리까지 가리고 있던 로브를 걷었다. 모자가 스르륵 흘러내리며 그의 선한 얼굴과 검은 머리칼이 드러났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남자를 찬찬히 훑던 안셀의 시선은 그의 목에서 멈췄다.

목을 살짝 가린 새하얀 카라에 크로델리아 신전 소속임을 상징하는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안셀의 눈이 커졌다.

“이런, 사제님이셨군요! 무례한 언사를 해 죄송합니다!”

남자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서, 어떤 난관에 처해 계신지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안셀은 밀려드는 신뢰감에 주저 없이 사정을 터놓기 시작했다. 말하다 보니 한이 맺히는 탓에 가슴까지 팡팡 두들겨 가면서 말이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데 길이 멀어 제때 도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작은 생명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제가 능력이 없는 나머지…….”

진지하게 듣던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한 일에 처해 계셨군요.”

“예……. 제게 이리 도움을 주시려는 마음은 감사하나 저로선 그저 빨리 돌아가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가던 길 마저 가셔도 좋습니다.”

이야기를 터놓은 것만으로 속이 후련했다.

안셀은 그에게 인사한 후 우울하게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때 뒤편에서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거라면 제가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안셀이 돌아봤다.

“예? 어떻게 말입니까?”

“신력을 사용하면 대상을 다른 위치로 이동시킬 수도 있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사제를 보며 안셀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어찌 사제님의 귀한 신력을 허비한단 말입니까.”

“작은 생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작다 한들, 신실한 신의 종으로서 그 소중한 생명을 무시할 수가 없군요.”

후광이 비치는 말본새에 안셀은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성정이 이리도 깨끗하고 착할 수 있다니. 누구와 엄청나게 비교가 됐다.

안셀이 감격한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아 쥐자 남자가 안셀을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창밖에서 물었다.

“급하다 하셨지요. 어디로 보내 드리면 됩니까?”

“카델라로트 공작저로 갑니다. 아, 위치는…….”

“알겠습니다.”

안셀이 막 위치를 설명하려는데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한순간에 마차가 눈부신 빛에 휘감기더니 고대어로 보이는 문자들로 둘러싸였다.

너무 눈부신 나머지 안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츰 빛이 멎는 것 같을 때, 눈을 떴다. 익숙한 저택이 코앞에 보였다.

마차와 함께 통째로 이동한 안셀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믿기지 않았다.

워프와 같은 고위 신법은 사제 여럿이 모여도 반나절이 걸릴 텐데 이렇게 한순간에……?

사실 안셀은 한나절은 부쩍 지나야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냥 마차를 타는 것에 비해 훨씬 빠를 테니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도착하다니…….

‘아, 성함을 여쭈어야 하는데!’

안셀은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부석을 돌아보니 얼떨떨한 표정의 마부가 제 얼굴을 꼬집어 보고 있는 모습만 보였다.

감사 인사도 하지 못했다. 사제의 이름을 모르니 어찌 감사의 말을 전한단 말인가.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어서 아릴을 지켜야 한다!’

안셀은 놀람과 당황스러움 속에서 정신을 붙잡았다. 기껏 도와준 사제님의 신력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는 저택을 지키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월렌 경.”

“안셀 님. 방금 그건 대체…….”

“전하께서는 이미 도착하셨나?”

서로 거의 동시에 내뱉은 말이었다. 안셀의 다급한 표정을 보니 월렌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월렌 경은 재차 묻는 것 대신 대답했다.

“네. 한 시간 전쯤 도착하셨습니다.”

“아, 다행이군, 다행이야.”

안셀은 중얼거리며 저택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전하께서 아직 아가씨를 찾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셀에게 희망이 생겼다.

비록 그가 곧장 마멜라를 만날 것처럼 과자를 바리바리 들고 가긴 했지만…… 어쩌면 그녀가 이딜로스의 접근을 여느 때처럼 잘 막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서둘러 마멜라의 방이 있는 층으로 갔다.

고요했다. 무거운 적막이 불길했지만 야트막한 안도가 밀려왔다. 이딜로스가 아릴을 발견했더라면 저택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을 테니까.

애초에 공작이 다짜고짜 여동생의 방문을 열어젖힐 정도로 무뢰한은 아니었다. 그러니 분명 마멜라가 아릴을 숨길 정도의 시간은 있을 터였다.

아가씨의 방 앞에 선 안셀은 목을 가다듬은 후, 노크했다.

“아가씨, 저 안셀입니다. 전하께서 일찍 귀가하신 바람에 저도 서둘러 왔습니다. 아릴에게는 아무 일 없는지요?”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멜라에게서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외출하셨나?’

안셀은 조금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노크하며 말했다.

“아가씨, 안 계십니까? 아가씨?”

“들어와라.”

아가씨의 방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무척 익숙하리만치 냉랭하고 싸늘한…….

안셀은 입을 떡 벌렸다. 이건 공작의 목소리였다……!

그가 마멜라의 방문 앞에서 쩌적 굳었다. 차마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얼어붙어 있는데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셀의 시선이 한기가 느껴지는 금색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을 지나쳐 방 안을 둘러보니 겁먹은 표정으로 있는 마멜라와 그런 아가씨의 뒤에 숨은 고양이가 보였다.

“뭐 하나, 안셀.”

공작의 목소리에 안셀이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가 답지 않게 안셀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주 분노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런 소름 끼치는 미소로, 그가 말을 씹어 냈다.

“들어오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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