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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화 (14/191)

17화

“아릴, 나오니까 좋지?”

“아옹!”

마멜라가 바구니 안으로 손을 넣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방 안에서만 지내서인지, 밖을 나오자 기분이 들떴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는 게 맞는 말인가 보다. 처음엔 불안해서 즐기지도 못했는데 두 번째는 경험이 있어서인지 나름대로 즐거웠다.

날이 화창하고 바람도 선선해서 마음이 붕 떴다. 유일한 흠이라면 바구니 안에 있어야 해서 마음껏 달리지 못한다는 것 정도일까.

그녀가 손을 이마 위로 들어 쨍쨍한 햇볕을 가리는 게 보였다.

“아릴, 저기 봐. 예쁘지 않아?”

들뜬 걸음걸이로 걷던 마멜라가 바구니를 살짝 들어 올렸다.

마멜라의 시선을 따라가니 연못이 보였다. 연못의 수면 위로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거렸다. 그런 광경을 처음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잎과 꽃이 떠다니고, 잉어가 헤엄쳐 다녔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아치 모양 다리는 꽃 넝쿨에 휘감겨 장관을 이뤘다.

“우리 건너가 볼까?”

“아옹!”

마멜라가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로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꽃향기가 나.’

장미보다는 은은하고 조금은 시원한 향기였다. 나는 그 냄새를 맡다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이 시원한 향, 맡아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맡았더라?

코를 연신 벌름거렸다.

그사이 다리에 올라 천천히 거닐던 마멜라가 연못 좀 보라며 바구니를 옆으로 돌려 줬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연못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마멜라와 함께 다리의 중간. 딱 그쯤 갔을 무렵이었다.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뒤편에서 다른 이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분명…….

위험을 감지한 나는 서둘러 바구니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아릴? 왜 그래?”

“마멜라.”

바로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멜라가 놀라서 굳는 게 보였다. 나는 여전히 활짝 열려 있는 바구니의 덮개를 보고는 황급히 앞발을 휘저었다.

‘어서 덮개를 닫아, 마멜라!’

내 열정적인 신호를 받아들인 건지 마멜라가 서둘러 덮개를 내렸다. 그사이, 점점 다가오던 인기척은 조금 떨어진 어느 곳에서 멈췄다.

“마멜라?”

“오, 오라버니……?”

뒤돌아본 마멜라가 바구니를 뒤로 숨기는 것이 느껴졌다.

“여긴 어…… 어쩐 일이세요?”

덜덜 떨리는 마멜라의 목소리에 나는 앞발로 이마를 탁 짚었다. 수상해 보이기 딱 좋았다.

“집중이 안 돼서 산책 나왔어. 널 만나다니 우연이구나.”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나는 홀린 듯 라탄 바구니의 벽면에 붙었다.

바구니의 틈새로 그의 모습을 보려 했지만, 흐릿하기만 했다.

“아, 그으…… 러시구나. 오라버니가 산책을 하다니 별일이네요. 그럼 저는 방해되지 않게 얼른 가 볼게요! 산책 열심히 하세요……!”

“잠깐만!”

도망치려고 몸을 튼 마멜라를 이딜로스가 불러 세웠다. 그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마멜라가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마멜라에게 손에 든 바구니가 뭐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바구니를 열어 보라고 하면?

‘아, 아니야. 긴장하지 마.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서 훈련도 열심히 했잖아.’

나는 바구니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만약 날 보자마자 쫓아내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그의 말은 내 불안을 완전히 빗겨 갔다.

“마멜라. 이렇게 마주쳤는데 다과라도 들지 않을래? 네가 좋아하는 루나뜨의 과자를 들여왔는데.”

……루나뜨? 그게 뭐지?

마멜라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게…….”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을게.”

마멜라가 머뭇거리자 그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꼬리를 축 내린 강아지 같은 목소리라,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마멜라가 매몰차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멜라 역시 거절하기 힘든 건지 뜸을 들이다 답했다.

“그럼…… 잠깐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빛이 새어 들어오는 바구니의 덮개를 바라봤다.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마멜라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걸 거다. 저렇게 말하는데 누가 거절할 수 있겠어…….

바구니 안에 내가 있다는 걸 티 내지 않으면 된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래. 그럼 다과를 준비해야겠구나.”

이딜로스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운 저음이 되었다.

그의 기척이 점차 다가왔다. 바구니 안에 그림자가 지며 스며드는 빛이 줄었다.

갑작스레 끼쳐 오는 시원한 향기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주변에서 나는 은은하면서도 시원한 꽃향기가 언젠가 맡아 봤던 이딜로스의 향과 유사했다는 것을.

마멜라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오라버니! 머리 헝클어져요!”

“며칠 못 봤다고 그새 키가 자란 것 같구나. 애라 그런가?”

“저 애 아니거든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마멜라가 발끈하는 목소리도 함께였다. 나는 그 화기애애하고 정겨운 소리에 귀 기울였다.

‘……역시 가족이란 건 저렇게 사이가 좋은 건가 봐.’

고작 바구니의 얇은 벽 하나를 두고 있을 뿐인데 그들과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로 저들의 사이에 낄 수 있을까?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마멜라는 이딜로스와 자리를 옮겼다.

풀 내음이 여전한 걸 보니 실내로 간 것 같지는 않았고, 어디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 이동한 것 같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쪼르륵, 무언가를 따르는 소리도 들렸고 맛있는 냄새도 폴폴 풍겼다.

‘윽, 이거 완전 고문이잖아.’

바구니는 어딘가에 내려놓은 건지 마멜라의 냄새 대신 달콤한 냄새가 가까이서 느껴졌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지?’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마멜라. 다친 곳은 좀 어때?”

“다쳤다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코를 살짝 부딪쳤을 뿐인걸요. 이젠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구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마멜라의 목소리가 들리던 방향에서 바삭한 뭔가가 와사삭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뭔진 알 수 없지만 위장에 엄청난 자극을 주는 소리였다.

잠시간 대화가 끊겼으나 곧 이딜로스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마멜라, 너 혹시…….”

“앗, 오라버니! 이거 설마 블루베리를 절인 거예요?”

“어……? 아, 응. 맛이 이상해?”

갑작스레 말이 끊긴 이딜로스는 당혹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멜라는 해맑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너무 맛있어서요.”

“응, 그래……. 많이 먹어.”

그 말을 끝으로 이딜로스가 말이 없다. 분명 뭔가를 말하려고 한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나?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조용한 이딜로스 대신 마멜라만 계속해서 조잘댔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평소에 햇볕을 쬐는 걸 싫어하셨잖아요?”

“싫어하긴 하지. 땀 나는 것도 질색이고.”

“그런데 왜 나오신 거예요? 집무실에 계시지.”

나는 그녀의 말에 살짝 기겁했다. 뉘앙스가 꼭, 대체 왜 나온 거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느낀 게 나뿐만은 아닌 듯했다. 조금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멜라, 역시 내게 화가 난 거지.”

“네? 저 화나지 않았어요.”

마멜라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황급히 부인했지만 이딜로스는 여전히 침울하게 물었다.

“그럼 그간 나를 보기 싫어한 이유가 뭐야?”

“제가요? 그런 적…….”

마멜라가 말을 뚝 멈추었다.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마멜라가 이딜로스를 만나기를 거절한 건 총 세 번이었는데 그중 두 번이 나 때문에 그런 거였다. 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네가 힘들다고 내게 직접 말했는데도 외면해서 미안해.”

“…….”

“이번에 널 찾아갈 때마다 네가 학업에 시달려 시간조차 내지 못하는 걸 보고 네가 힘들어한다는 걸 느꼈어. ……정말 미안하구나.”

마멜라는 잠시 당황한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털어 내듯 웃었다.

“이제라도 절 이해해 주셨으니 괜찮아요. 그래도 오라버니를 보기 싫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는걸요.”

그들의 사이가 나 때문에 틀어지는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년이면 너도 열세 살이니 학교에 입학하겠구나. 널 보고 있으면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말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거렸다. 아무래도 마멜라의 잔잔한 목소리는 이딜로스를 빼닮았나 보다.

‘듣기 좋아.’

조금은 나른하면서도 기분 좋은 울림이 있는 낮은 목소리. 그 잔물결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까이서 보면 어떤 느낌일까.’

늘 멀리서만 보던 그 서늘한 인상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할 때도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딜로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바구니의 틈에 눈을 댔다. 역시나 잘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에 한숨짓던 그때, 나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구멍을 넓히면 되잖아.’

날카로운 발톱을 바라봤다. 이거면 가능하겠는데?

바구니의 틈을 넓히기 위해 발톱으로 틈새를 쿡쿡 찔렀다. 괜히 바구니가 다 찢어져 버리면 곤란했기에 힘 조절에 신경 썼다.

‘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적당히 틈이 넓어졌을 때 나는 앞발을 내렸다. 다시 눈을 가져다 댔다.

‘보인다……!’

이딜로스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마멜라가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모양이었다.

마멜라는 내가 갑자기 난동이라도 부리면 어쩌려고 여기에 둔 거지…….

나는 넋 놓고 틈새 너머를 바라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예쁘다…….’

미소가 걸쳐진 그의 입가는 지난번에 본 것과 달랐다. 그때는 웃음기가 없어 꽁꽁 얼어붙은 빙하 같았는데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마멜라와 판박이였다.

별 같은 눈은 부드럽게 접혔고, 엷은 색의 머리칼은 빛을 잘게 부수어 흩뿌린 듯 눈부셨다.

‘꼭 햇살 같아.’

그게 아니라면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창가에서 본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이딜로스만은 달랐다. 더 눈부셨고 그만큼 더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의 잔잔한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내년에 기숙사를 가면 떨어져 지내야 할 텐데 괜찮겠어?”

“……기숙사요?”

“나도 보내기는 싫지만, 네가 입학할 학교가 수도에 있으니 기숙 생활을 해야지.”

“그럼 언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요?”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돌아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내년부터는 마멜라가 집에 거의 없다는 거야?

잘게 떨리는 눈으로 마멜라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마멜라가 없으면 난…….’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 더 오갔지만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서 무엇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마멜라가 내년에 떠난다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아니, 휘몰아쳤다는 수준에 가까웠다.

상념에 잠긴 나를 현실로 끄집어낸 건 이딜로스의 날벼락 같은 관심이었다.

“그런데 마멜라.”

“네?”

“이 바구니에는 뭐가 들었어?”

순간 머릿속의 모든 잡념이 깨졌다.

나는 눈을 굴리다가 다시금 틈새에 시선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딜로스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아니, 이렇게 작은 틈새로 내다보고 있는데 눈이 마주쳤을 리가 없다. 그저 바구니 전체를 보고 있던 거야.

내가 조마조마하는 사이 마멜라가 그럴듯한 말을 내놓았다.

“새, 샌드위치예요……! 피크닉하려고 챙겨 왔거든요.”

마멜라가 어색하게 웃자 이딜로스도 뒤따라 눈꼬리를 휘었다.

“그래? 네가 만들었어?”

“네? 네…….”

“듣기론 네가 요즘 다양한 취미를 만들고 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구나.”

이딜로스가 맞은편을 향해 싱긋 웃는 게 보였다. 무척 다정한 미소였다. 그러나 뒤이은 말은 폭탄과도 같았다.

“내가 한번 맛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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