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6화 (13/191)

16화

마멜라의 말을 귀담아들은 건지 안셀은 그날부로 정말 틈만 나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주로 챙겨 오는 건 내가 가지고 놀기 좋은 인형이나 낚싯대 같은 장난감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게 간식은 한 번도 안 가져오지?’

내 취향은 이런 장난감들이 아니라, 고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안셀이 내가 먹을 만한 걸 단 한 번도 주지 않은 건 또 아니었다.

나는 한쪽 귀퉁이에 있는 내 밥그릇을 노려봤다.

‘……내 사료를 바꿔 줬지.’

고기 향은 더 강해졌지만 맛은 더럽게 없는…… 아니, 떠올리지 말자. 안셀 말로는 고양이에게 필요한 영양소들을 다 갖춘 영양 사료라고 했다.

‘그러면 뭐 해. 맛이 있어야지. 미각이 괜히 있는 줄 아나?’

나는 안셀이 찾아오는 게 싫었지만, 숙제가 없어서 할 게 없다던 마멜라는 안셀이 찾아올 때마다 좋아했다.

그녀가 말하길, 안셀은 어릴 적부터 이딜로스와 친구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만큼이나 자신과도 친하다고.

‘안셀에게 이딜로스의 냄새가 많이 묻어 있던 건 그래서인가.’

……설마 이딜로스에게 잘 보이려면 이 인간에게 잘 대해 줘야 하나? 내게 간식도 준 적 없는 인간인데?

한창 고뇌에 빠져 있을 때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릴, 여기 좀 봐 주렴.”

“세상에, 안셀. 너무 귀여워! 이런 건 어디서 구해 온 거야?”

“인근의 애완용품점에 가니 팔길래 저도 모르게 쓸어 와 버렸습니다.”

안셀과 마멜라가 화기애애하게 하하 웃었다. 나는 식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안셀이 이번에는 작고 이상한 옷들을 한가득 들고 왔다.

저런 작은 옷들로 무슨 인형 놀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나를 간식으로 꼬드긴 마멜라가 갑자기 나한테 그 옷들을 입히기 시작했다.

강제로 옷이 입혀진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인형 놀이 맞네. 내가 인형일 뿐이지.’

이게 뭐야…….

나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옷을 내려다봤다. 흰색 레이스와 짙푸른 리본이 달린 하늘색 옷에, 등에는 자그만 천사 날개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아옹…….”

“자, 아릴. 거울 한 번 보자꾸나.”

안셀이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거울 앞에 내려놓았다.

한숨을 내쉬며 슬쩍 거울을 본 순간, 나는 충격을 받고 굳었다. 안 그래도 맹하게 생겼는데 이런 바보 같은 옷을 입으니 더 못 볼 꼴이 되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고 있자, 뒤에서 안셀이 박수를 쳐 댔다.

“제가 올해 본 것 중에서 최고로 귀엽습니다! 이 조그맣고 앙증맞은 모습이라니…….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분명 오라버니도 이 모습을 보면 푹 빠질 텐데!”

“분명 그렇겠죠. 이리도 귀여운 아이를 싫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건 내 고양이 인생 최대의 수치였다. 누가 이 거추장스럽고 이상한 옷 좀 벗겨 줬으면 좋겠는데……!

안셀은 말이 통하질 않는 인간이니, 마멜라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마멜라, 나 이거 싫어. 불편해…….’

동그랗게 뜬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마멜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 너무 귀여워……!”

으악!

역효과가 났다. 마멜라가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얼굴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마멜라를 밀어내려고 앞발로 그녀의 볼을 눌렀다.

‘숨 막혀!’

효과가 없었다. 마멜라는 황홀한 표정이 되더니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나는 결국 체념했다.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마멜라에게 안겼다.

하…… 묘생 참 힘들다.

시선을 돌린 나는 거울 속 창피하기 그지없는 차림의 내 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난 왜 자라질 않는 것 같지?’

혼자 거울을 봤을 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마멜라에게 안긴 모습을 보니 내 크기가 처음 봤을 때와 변함이 없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자그맣고 멍청해 보이는 모습은 실망감을 불러왔다.

‘난 원래 이 크기밖에 되지 않는 걸까?’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자,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안셀이 딸랑이를 마구 흔들며 여기 좀 보라고 하고 있었다.

“아릴, 이 옷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번 입어 보자꾸나.”

안셀이 한 손엔 딸랑이를, 다른 한 손엔 레이스가 달린 딸기 무늬 옷을 들고 있었다. 마멜라가 딸기 옷을 바라보더니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이 옷 너무 귀엽다! 우리 아릴이한테 찰떡이겠는데?”

나는 그 딸기 옷을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것만큼은 싫어서 몸서리를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젠장!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안셀을 울분 섞인 눈으로 노려봤다.

이딜로스의 친구인 인간이니 할퀴어 버릴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동물을 싫어한다던 이딜로스에게 밉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사이 안셀은 딸기 레이스 옷을 들고 다가왔다.

“자, 아릴. 그 천사 옷부터 벗자. 만세!”

나는 눈물을 머금고 두 앞발을 들어 올렸다.

* * *

아릴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심신의 안정을 찾은 안셀은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공주 같은 옷을 입은 앙증맞은 아기 고양이의 모습은 몸도 마음도 살살 녹일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성격은 또 얼마나 새침데기인지, 앙칼진 표정으로 째려볼 때면 깨물어 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다음엔 간식을 사서 아가씨께 가져다드려야겠다.’

맛있는 간식을 받으면 아릴이 저를 조금 더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안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무실의 문을 박자감 있게 두드렸다.

늘 이 앞에만 서면 두려웠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리 겁나지도 않았다.

평소와 같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안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분 좋게 문을 벌컥 열었다.

저도 모르게 비성을 실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왔습니다, 전하!”

“무슨 농땡이를 피우다 이제 오는 거지?”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안셀은 흠칫했다. 뒤이어 느껴지는 공작의 시선이 주변 공기를 얼려 버릴 것 같았다.

아, 맞다. 이 인간 요즘 들어 계속 기분이 안 좋았지.

상사가 기분이 구리면 부하 직원도 강제로 기분이 구려져야 하는 법이거늘. 안셀의 행복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안셀은 절로 공손해졌다.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골라서 대답했다.

“흠, 전하께서 저보고 방해가 되니 좀 나가 있으라고 하셨기에 그 명대로 나가 있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분 좋게 놀고 왔다는 건가? 난 놀다 오라고는 안 한 것 같은데.”

“시, 시키셨던 일은 다 해 두었습니다…….”

“그럼 바로 왔어야지. 네게 시킬 일이 어디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아?”

그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안셀은 울고 싶어졌다. 나가라 할 땐 언제고…….

확실히 최근 들어 이딜로스의 지랄 맞은 성격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다. 이유는 뻔했다.

‘수면 부족이랑 아가씨를 못 봐서겠지.’

아가씨의 일은 둘째치고, 수면 부족은 그의 심각한 일 중독에서부터 비롯된 고질병이었다.

‘제발 저놈의 일만 손에서 놓으면 좋으련만.’

6년 전, 작위를 계승했을 때의 그 필사적인 노력이 그의 버릇으로 굳어진 게 분명했다. 더는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도.

그걸 알기에 안셀은 저 성격 나쁜 공작에게 굽힐 수밖에 없었다. 상관이기 이전에 친우였으므로.

“죄송합니다, 전하.”

이딜로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과 짜증이 덕지덕지 느껴지는 것이, 숨이 턱턱 막혔다.

지금 그의 상태는 저기압이 아닌 고기압인 게 분명했다. 상대방을 아주 질식시켜 죽이려 하고 있지 않은가.

안셀은 어떻게든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을 꺼냈다.

“전하, 혹 아가씨께서 만나 뵙기를 거절하셔서 그런 거라면……. 제가 아가씨께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네가 잘 이야기해 보겠다?”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안셀은 다시금 긴장해야 했다.

이제 날아온다. 잘리고 싶나, 그 무시무시한 말이…….

그러나 예상외로 공작은 별말 없이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뭐야,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안셀은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생각했다.

‘마멜라 아가씨께서 전하의 외출 제안을 거절하신 건 아르벵 백작 일도 있었을 테지만…… 결정적으로는 아마 아릴 때문이었을 거다.’

아릴을 두고 외출하기 불안했을 테지.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지 않은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아릴과 놀아 주고 감시까지 할 수 있는 안셀이 있는데.

더구나 애정으로 보살펴 주기까지 하니 분명 마음 놓고 아릴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아릴과 둘이서 노는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한 안셀은 광대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짧게 헛기침한 안셀이 말문을 뗐다.

“전하, 내일 아가씨께 다시 외출 제안을 하는 건 어떠신지요? 이번에는 필시 받아 주실 겁니다.”

“…….”

공작은 대답 없이 창밖의 어딘가만 바라봤다.

안셀은 그의 무시가 익숙했기에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묵묵히 서 있을 작정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했다. 공작은 창밖을 보며 넋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시간에 서류를 몇 번 더 넘겼으면 넘겼지.

‘밖에 뭐가 있나?’

안셀이 고개를 빼 창밖을 보려던 순간이었다. 공작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예?”

“지금 가야겠다. 안셀, 한가할 텐데 마침 잘됐군. 이것들 좀 처리해.”

이딜로스가 일어서더니 걸어 두었던 겉옷을 잡았다. 안셀은 그가 가리킨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보며 당혹스러움에 빠졌다.

“전하, 갑자기 어딜 가시는…….”

안셀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마멜라 아가씨의 방을 나올 무렵.

<아가씨, 바구니는 왜 챙기시는 겁니까?>

<이따가 아릴이랑 산책하려고. 지난번에 아릴이에게 화원을 다 못 보여 줬거든.>

안셀은 아연히 입을 벌렸다.

‘그럼 방금 창밖을 보고 있던 게……!’

안셀은 눈을 부릅뜨고 공작을 바라봤다.

일 났다. 어떻게든 그가 나가는 걸 막아야 한다……!

안셀은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 전하! 지금 나가시면 안 됩니다.”

이딜로스는 제 팔을 붙잡은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눈가를 구기며 물었다.

“왜지?”

“그, 그게, 일거리가 이렇게 쌓여 있는데 어딜 가시겠단 겁니까! 전하께선 원체 이런 걸 참지 못하시니 아가씨는 내일 뵙는 게…….”

“그래서 너한테 시킨 거야.”

“하, 하하. 농담도.”

“아니면 자는 시간을 줄이면 되니 상관없다.”

아니, 그건 좀 아니지.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겠다, 이 인간아. 안 그래도 눈 아래가 거뭇거뭇하면서!

안셀은 다른 핑계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아, 전하! 오늘은 햇볕이 무척 따갑습니다. 볕을 쬐는 걸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그, 들어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셀.”

“예, 전하!”

“잘리고 싶나?”

안셀은 입을 닫았다. 이딜로스는 안셀을 흘겨보며 말했다.

“한 번 더 방해하면 새벽까지 남고 싶다는 걸로 알아듣겠다.”

야근 협박에 안셀은 굳고 말았다. 아니, 말이 야근이지 또 잘리고 싶냐고 할 게 분명했다.

그사이 이딜로스는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안셀은 침음을 흘렸다. 머저리같이 아가씨께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못했다!

안셀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 안셀, 이 일은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부디 들키지 마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