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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1화 (8/191)

11화

새하얀 목련 같은 무언가가 눈앞에서 흐릿하게 어른댔다.

점차 초점이 맞추어지고, 눈앞의 잔상이 선명해지자 그 목련이 새하얗고 부드러운 누군가의 머리칼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지?’

달빛을 닮은 하얀 머리칼의 주인은 낯선 여자였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기다란 속눈썹과 바다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여태 내가 봐 온 인간들과는 달리 신비롭고 오묘하게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그 낯선 여자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든 것은.

그녀가 내리쬐는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 활짝 웃었다. 꽃이 가득 핀 들판에 산들바람이 불자 새하얀 머리칼은 깃털처럼 나풀거렸다.

처음 보는 여자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반가운 기분이 몰아쳤다.

‘대체 누구길래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불현듯 시야에 낯선 손이 나타났다. 여자의 머리끝까지만 보였기에 그녀보다 키가 큰 듯한 손 주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군가의 손은 바람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다정히 머리칼을 넘겨 주던 손은 그녀의 뺨에 닿았고, 뺨을 간지럽히듯 문지르다가 다시 조금 내려와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위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빛났다.

‘이상해…… 기분이 왜 이렇지?’

그녀에게 닿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이 위치에서 앞발을 뻗으면 닿을까? 그러나 어림도 없어 보였다.

‘내게도 짧은 다리와 앞발이 아니라, 인간처럼 긴 팔과 손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여자처럼 인간의 모습이기만 했더라면……!

뭔가가 철퍼덕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조금 전의 들판과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꿈……?’

밀려오는 허탈감에 허망해졌다. 대체 뭐가 이렇게 실망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아릴, 깼어?”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떨어진 두꺼운 책을 막 들어 올리는 마멜라가 보였다.

나는 그런 마멜라를 잠시간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 차렸다. 여긴 상자 안이 아니잖아.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잤던 건 분명한데……. 설마 내가 사고 친 것도 다 꿈이었던 건가?

뭐야, 그랬던 거구나.

나는 안도하며 마멜라의 다리 위로 축 늘어졌다.

아, 괜히 마음 졸였네. 그래, 저기 멀쩡한 소파가 떡하니 있…….

무심코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낯빛을 바꿨다.

분명 꽉 들어차 있어야 할 곳이 휑하다.

당황한 나는 소파가 있어야 할 자리를 한 번, 마멜라를 한 번 바라봤다. 마멜라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소파는 버렸어.”

……무슨 말이지? 아니, 알아들을 수 없어도 정황상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다. 못 쓰게 되었으니 버린 거겠지!

아무래도 내가 잠시 졸은 사이에 청소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마멜라는 사고를 쳐 놓고 한가하게 낮잠이나 자고 있는 날 본 거고…….

나는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뿐이랴, 친히 날 상자에서 꺼내 온 것 같았다.

기껏 주워 왔는데 말썽꾸러기에다 버릇과 양심도 없으면, 이건 정말 미움받기 딱 좋은 것 아닌가.

나는 서둘러 일어나 쭈뼛거렸다. 그러자 마멜라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말했다.

“너 설마 이제야 미안해하는 건 아니지?”

“아옹…….”

나는 눈썹을 축 내리며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다신 사고 치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 고양이는 인간의 말을 못 하는 걸까?

울상을 지으며 올려다보자 마멜라가 눈가에 힘을 풀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어. 처음부터 네가 친 사고는 전부 내 책임이라는 마음으로 데려왔는걸. 너처럼 쪼그만 애가 뭘 알고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마멜라가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조그만 손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나는 열심히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아옹…….”

“알았어, 알았어. 화 안 낼게. 대신 앞으로 사고 칠 거면 예고 좀 하고 쳐 줘. 나도 대비를 좀 하게…….”

마멜라의 목소리와 표정이 느슨히 풀어졌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충분히 혼쭐이 날 만한 상황이었는데…….

준비해 둔 비장의 애교를 쓰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그날 마멜라는 회초리를 드는 대신, 웬 낯선 물건을 가지고 왔다.

방 한구석에 직삼각형의 길쭉한 무언가가 자리하게 되자 나는 마멜라의 품에 안겨 그녀를 올려다봤다.

‘저게 뭐야?’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그 수상쩍은 물건에 다가가 나를 내려 줬다.

나는 그 근처를 기웃대다가 다시 그녀를 올려다봤다.

“앞으론 소파 말고 이걸로 놀아, 알았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말해 줘 봤자, 난 알아듣지 못한다고…….

내가 계속 어리둥절하는 걸 알아챈 건지 마멜라가 직접 몸을 숙여 그 물건에다 손톱을 긁는 시늉을 했다.

“아옹?”

“이렇게 하면 돼.”

나는 갸웃대며 바라보다가 마멜라를 따라 앞발을 뻗었다. 그러곤 천천히 발톱을 세워 긁었다.

‘헉! 뭐야, 이거.’

앞발을 움직일 때마다 와 닿는 거친 면에 발톱이 긁히는 기분이 상당한 쾌감을 선사했다.

소파나 벽, 책상다리를 긁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불어 내 발톱이 왠지 모르게 더 깔끔해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나는 고개를 홱 들어 마멜라를 바라봤다. 이 요물은 어디서 구해 온 거야?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방긋 웃었다.

“마음에 들어?”

“아옹.”

“그래, 다행이다. 책상 쪽이랑 벽 쪽에도 좀 놔둬야겠네. 너 저기 보여? 네가 긁어 놔서 엉망이잖아.”

마멜라는 내가 열심히 영역을 표시해 둔 곳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식으로 하면 된다고 설명해 주는 거구나.’

역시 마멜라는 친절하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아까처럼 직접 행동으로 알려 주기도 하고.

덕분에 마멜라의 말을 잘 알아들을 때가 종종 있다. 역시 마멜라와 나는 통하는 사이인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을 텐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인간의 말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보다 어른인 고양이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지만, 아무리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도 고양이는커녕 쥐도 보이지 않았다.

‘마멜라의 말을 알 수 있게 된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

나는 새로 생긴 그 물건을 내버려 두고 마멜라의 품으로 폭 안겼다.

“아옹!”

* * *

“아릴, 잘자.”

마멜라가 간이 스탠드의 불을 끄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마멜라의 침대와 조금 떨어진 잠자리에 엎드리고 있던 나는 금세 잠에 든 마멜라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낮잠을 자서 그런가 잠이 안 와…….’

멍하니 있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시원한 유리창에 붙은 나는 초여름의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만히 앉아 어떻게든 무료함을 떨치기 위해 하늘에 박힌 별의 개수를 세고 있었다.

그런데 아래에서 웬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귀를 쫑긋거린 나는 고개를 내렸다.

밤이라 제법 어두운 시야에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다.

‘……마멜라의 가족이잖아.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내 시야에 나타나는 그는 늘 정해진 코스가 있는 것처럼 길을 따라 쭉 가다가 대문 앞에 멈춰 서 있는 마차에 올라타면서 모습을 감춘다.

오늘도 시간대가 달라지기만 했을 뿐, 금방 나가 버리겠지.

하지만 그러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곧잘 가고 있던 걸음을 정원 방향으로 틀었다. 손에는 꽃잎이 예쁘게 핀 새하얀 백합 두 송이를 든 채였다.

그가 정원 깊숙이 들어가 버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밤에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인데 하늘에 빛이 사라져도 여전히 눈에 띄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낮의 소란스러움이 없어서인지 고요한 만큼 쓸쓸해 보였다. 어쩐지 의기소침해 보이기도 하고.

나는 창가에서 폴짝 내려왔다.

근처의 테라스와 이어진 커다란 창문에서 커튼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빛이 침대 캐노피를 흠뻑 적시는 모습이 멍하니 바라보기 좋았다.

슬슬 하품이 나왔다. 앞발을 쭉 뻗으며 입을 크게 벌린 그때.

덜컹.

“……?”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쏟아지는 커다란 테라스 창 너머, 바람에 밀린 나무가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는 게 보였다. 아까까진 잠잠하기만 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댔다.

‘저러다 뽑히겠네, 불쌍한 나무…….’

안타까움에 고개를 내저었다. 여긴 아무래도 바람이 되게 많이 부는 곳인가 보다.

지난번 하늘을 날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때였다. 갑작스레 창문이 부서질 기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괘, 괜찮아. 창문이 잠겨 있잖아…….’

굳게 걸려 있는 빗장을 바라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한번 강풍이 몰아치는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창문에 걸어 둔 빗장이 저절로 탁 소리를 내며 돌아가더니, 저 혼자 천천히 미끄러지며 풀렸다.

미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창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휘몰아쳐 들어오는 바람이 거세서 눈도 뜨기 힘들었다.

‘으……!’

내 자그만 몸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붕 떠오른 몸이 바람에 못 이겨 벽에 처박히는 건 한순간이었다.

쿵! 까마득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릴!”

귓가에서 웽웽 울리는 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소리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처럼 울리다 사라지는 것이 낯설었다.

이상하다. 비좁은 머릿속이 확 트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섬뜩함에 몸을 바르르 떨자 다시 한번 소리가 머리를 거세게 내려쳤다.

“아릴!”

“아옹…!”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있던 별 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서서히 풀었다.

‘아, 마멜라였구나…. 내가 기절한 걸 깨워 줬나 봐.’

나는 마멜라를 살폈다. 내가 기절해 버렸던 탓인지 마멜라의 얼굴이 눈물로 일그러져 있었다. 마멜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릴, 괜찮아? 어디…… 어디 아픈 곳은 없어?”

뭐……?

순간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마멜라의 부드러우면서도 조금은 격정적인 목소리를 타고 날아온 말이, 의미가 담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마멜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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